침묵에 대한 예화 모음
▣ 침목의 소리
일본에 한 후덕한 군주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군주가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숨지고 말았습니다. 군주의 대를 이어 외동딸 유미코가 군주직을 물려받았습니다. 유미코도 선친처럼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유미코가 나이가 들어 신랑감을 자신이 직접 고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커다란 북통에 무명천을 씌워 이상한 북을 만든 후 신랑을 선발하다는 방을 써 붙였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청년들 앞에서 명주 북을 힘껏 내리치며 물었습니다. “북소리가 들립니까?”
많은 청년들이 그녀에게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무명 북이 소리가 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만이 대답이 달랐습니다.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침묵의 소리입니다”
유미코는 그 청년의 대답을 듣고 그를 신랑으로 점찍었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미코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청년이 지도자로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고 그를 선택한 것입니다.
▣ 침묵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잠 13:3)
캐나다의 의학박사 윌리엄 오슬러는 침묵에 대한 귀한 말을 남겼습니다. “침묵은 가장 훌륭한 예술에 속한다. 생활의 분위기는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사소한 일, 즉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투덜거리거나 실랑이함으로써 어두워진다. 항상 모든 일이 우리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거든 침묵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라. 또한 항상 온화한 마음을 가지도록 애쓰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이 내는 불평으로 인하여 짜증을 내거나 힘들어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나중에 말한 것을 후회해도 일단 입으로 쏟아놓은 말은 도로 주워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함부로 했던 말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굉장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입을 지켜 꼭 필요한 말, 유익한 말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지 않으면, 나중에 고통을 겪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조심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 침묵
타우라스라는 산이 있다. 이 산은 독수리 서식지로 유명한 곳이다. 독수리의 가장 좋은 먹이는 두루미이다. 두루미들이 타우라스 산을 넘을 때면 독수리들은 포식을 하는 날이다. 산을 오르는 두루미들을 독수리가 여지없이 공격하는 것이다. 독수리의 먹이가 되는 두루미는 소음을 내는 두루미이다. 타우라스 산을 수없이 넘지만 노련한 두루미는 거의 희생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행을 떠나기 전 입에 돌을 물고 가기 때문이다. 돌을 문 두루미는 돌 때문에 무사히 산을 넘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침묵은 사탄의 먹이가 되지 않게 막아준다.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어는 침묵이며 그리스도인의 침묵은 성화의 본질에 속한다. 말을 잘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침묵은 더 좋은 일이다.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 침묵
[냅시]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세 가지의 침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하얗게 떨어지는 눈송이의 침묵이요, 둘째, 먼동이 트기 직전 한 시간의 침묵이며, 셋째, 죽은 자의 침묵이라고 했습니다.
▣ 침묵의 언어
제가 아는 어떤 분들이 수양을 하는 방법으로서 한 시간 이상 나무와 대화하는 훈련을 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나무 앞에서 침묵하며 동산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표현되지 않은 언어, 즉 인간이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원색의 언어를 날마다 새롭게 들을 수가 있고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상이고 이것이 영감이고 이것이 진짜 시인입니다. 그 말은 구태여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은 시로 표현할 수조차도 없는 줄로 압니다. 그 말은 일종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누구나 종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연에는 엄청난 침묵의 언어가 있습니다. 생명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신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 한 마디를 안했던 사람
영국의 사상가이자 역사와 문필에 능통했던 토마스 카알라일은 아주 신경질이 많아서 자기 부인을 학대하여 부인이 거의 자살하려고까지 했다. 그의 부인은 한번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부인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고 좋은 남편이 아닌 것 같았고 살아도 희망이 없을것 같았다. 그래서 그 부인은 죽었다. 누가 보아도 부인은 억울하고 토마스 카알라일은 자기 부인에게 좋지 않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카알라일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내 속을 모른다. 단 5분만이라도 좋다. 아니 2분만이라도 좋다. 내 아내가 한 번만 다시 살아난다면 꼭 한마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죽었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누가 이 사정을 알아주랴?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랴? 사실은 나는 내 아내를 사랑했다." 이 사람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항상 주님과 가족과 친구와 모든 사람에게 소망을 고백해야 한다.
▣ 29년 침묵 끝의 말
울드 부부는 1967년에 그들의 다섯 살 난 아더가 정박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드 부부는 아이가 가족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 사랑에 보답하지도 못할테지만 아이를 정박아 수용소가 아닌 집에서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보답을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울드 부부는 가급적이면 아이를 정상인처럼 대하려고 노력했다. 일요일에는 교회도 데려가고 평일에는 특수학교를 보냈으며 일부러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바보처럼 웃기만 했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느새 열여덟 살이 된 아더, 울드 부부는 그동안 아들을 장애아 학교에 보내고 장애아들이 모여서 일하는 작업장에도 보냈다. 그러나 아더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1991년 아더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아더는 장애인 작업장에서 단순한 전자장비를 조립하는 일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캐럴이라는 새로운 책임자가 이곳에 발령되었는데 그녀는 아더에게서 어떤 숨은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곧 그녀는 아더에게 컴퓨터로 의사 소통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캐럴은 아더가 매우 똑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울드 부부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들을 작업장으로 불렀다. 그리고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주변환경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캐럴이 먼저 아더에게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컴퓨터 자판으로 물었다. 그러자 아더의 손가락이 아주 천천히, 힘들게 움직였다. 컴퓨터 화상에 알파벳 한 글자 한 글자가 떠올랐다. 아더가 한 문장을 만드는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29년간의 침묵 끝에 아더의 마음이 완성되었다. "이제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울드 부부는 울고 있었다.
▣ 30년 간의 침묵
사업가인 짐이 빌리 그레이엄에게 말했다. "저와 30년 동안 동업하는 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 부끄러운 일이군요. 함께 무릎 꿇고 하나님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한 후 빌리 그레이엄이 이렇게 권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즉시 폴에게 가서 당신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십시오. 새롭게 살아야 하며, 삶을 새롭게 영위하기 위해 구주를 받아들이도록 간청하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짐은 폴의 사무실에서 아무 말 없이 서성거렸다. 이상히 여긴 폴이 물었다. "짐, 매우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응,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 "그게 뭐지?" "자네 영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네. 난 자네가 예수를 믿으면 좋겠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폴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몇 년 동안 나는 자네가 내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해주길 바랐네. 예수께서 내 삶에 들어오셔서 새롭게 해주시길 그리스도께 기도하겠네. 자네와 함께 이번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그 분께 정식으로 믿음을 고백하겠네."
▣ 톱밥 속에서 들린 시계 소리
얼음공장에서 일하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톱밥이 쌓여 있는 곳에서 값비싼 시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동료 와 함께 2시간 이상이나 시계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어떤 어린 소년이 그의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꼬마야, 그 시계 어디서 찾았니?" "예, 제가 톱밥 위에 앉아 있는데 시계 소리가 `째깍 째깍'하 고 들렸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정신없이 요란하게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용한 가운데서 하 나님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조용한 가운데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 침묵하는 강자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움을 벌였다.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를 정하는 수컷끼리의 싸움이다. 여기에서 이기면 모든 암컷 호랑이들을 거느리며 좋은 먹이와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마침내 결전이 벌어졌다.한 마리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덤벼들었다. 그런데 또 한 마리는 침묵하며 이에 맞섰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렁차게 포효하던 호랑이가 용맹스럽게 싸울 것 같더니 도중에 그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고 말았다. 크게 소리 지르는 호랑이일수록 약한 놈이고 싸움에 진다고 한다. 진정 강한 호랑이는 오로지 침묵과 위엄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고 한다.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이 세상, 호랑이가 보고 웃을 것이다. /이정익 목사
▣ 침묵하지 못하는 사람
스파르타의 정치가 데마라투스가 공회 석상에서 한마디의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이를 본 그의 친구가 '여보게, 못나서 말을 않나?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 안하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대는 모르는 말일세! 못난 사람은 절대 침묵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라네'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을 통제할수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미성숙한 사람은 절대로 말을 통제하지 못한다.
▣ 침묵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의 작품에 「침묵」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극심한 박해로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해서 쓴 책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하니까 그 십자가에서 죽어 보라며 다음과 같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즉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다 십자가를 세워 놓고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잠시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 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푹 잠겨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답니다.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지켜 보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애처롭게 고난당하며 순교하는 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 영혼이 일어나고 싶을 때 읽는 책 / 양원석
* 기도: 사랑의 주님, 영적으로 무지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깨닫게 하시고, 징계 뒤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의 손길을 기뻐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도 존귀와 영광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
신앙인에게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 저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저의 다급한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으면서 왜 그렇게 침묵하십니까? 얼마 전 일이었습니다. 저녁 6시 20분경에 아내와 저는 교회 앞에서 유치원 차를 타고 오는 딸 은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행복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좋아하는 맛있는 어묵을 요리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슈퍼마켓에 들르자고 졸라댔습니다. 웬만하면 은혜의 요청을 들어주겠지만 그 순간만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은혜가 좋아하는 어묵을 준비해 놓았는데, 영양가도 없는 과자를 사주어서 입맛을 버리면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은혜는 엄마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막 떼를 쓰며 울었습니다. 껌 사줘요! 과자 사줘요! 엉엉엉! 은혜야! 집에 가면 맛있는 어묵이 있어! 조금만 참으면 돼! 그래도 은혜는 그 잠깐의 순간을 참지 못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울어댔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 아내 울고 있는 은혜에게 재빨리 냄비에서 어묵 꼬치 하나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은혜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양가 없는 껌과 과자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의 종합적인 영양을 고려하여 잠시 침묵으로 대응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 속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음성이 들어 있습니다. - 행복을 향기처럼 / 이한규
▣ 침묵을 창조하라
하루는 어떤 부인이 성 빈첸시오 신부를 찾아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더 이상 남편과 살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의 신경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를 넘어섰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다시 화목해질 수 있을까요?" 빈첸시오 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부인, 울 수도원 앞뜰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답니다. 수위에게 가서 그 우물물을 좀 얻어 가십시오. 그리고 남편이 집에 돌아오시면 그 물을 얼른 한 모금 입에 머금으십시오. 삼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겨예요." 착한 부인은 신부의 말대로 수도원의 물을 얻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늦게서야 귀가한 남편은 또 어느 날처럼 부인에게 불평과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같았으면 부인도 마구 달려들었겠지만, 그녀는 빈첸시오 신부의 가르침대로 성수를 얼른 입안 가득 히 물었습니다. 그리고 물이 새지 않도록 입술을 꼭 깨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떠드는 소리가 점차 잠잠해졌습니다. 그날 밤 이들 부부는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부인은 남편이 신경질을 부릴 때마다 그 성수를 입 안 가득히 머금곤 했습니다. 그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남편의 행동은 눈에 띄게 변했습니다. 신경질도 줄어들었고, 오히려 부인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의 달라진 태도에 무척이나 기뻐하며 신부를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빈첸시오 신부는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기적을 일으킨 것은 수도원 앞뜰의 우물물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침묵이죠. 당신의 침묵이 남편을 부드럽게 한 것뿐입니다." / 고진하
▣ 그리운 말 한마디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사람을 얼마나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느낌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도록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라도 해명도 변명조차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유안진
▣ 말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굴에 들어가면 절대적인 침묵을 요구하는데 만약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것이다. 하루는 바보 삼 형제가 그 굴을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면서 그 중 제일 큰 형이 말했다. "너희들 이곳에서 말하면 죽는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둘째 형이 " 것 봐, 말하면 죽지," 그러면서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셋째가 자신있게 말합니다. " 나는 절대 말 안할 거야" 결국 셋째도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 침묵도 사랑이다
사람은 침묵이 필요합니다. 혼자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행동과 작은 임무와 신상에 일어나는 혹독한 곤경에 소비되는 내면적 힘을 축적하는 것은 바로 침묵 속에서입니다. 침묵은 천지창조보다 먼저 와서 온 하늘을 말없이 덮었습니다. - 도로시 헌트의 《마더 데레사 일일묵상집》 중에서 -
* 침묵에 대한 명언은 많다. 침묵이 그만큼 값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침묵이 왜 필요한지를 압축한 완전한 말은 그리 많지 않다. 데레사 수녀의 말에서 침묵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된다. 침묵도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자기와 모든 사물에 대한 그윽한 사랑이다.
▣ 침묵 속의 가르침
젊은 철학자 에머슨이 대사상가인 칼라일을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호수 주변의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해질 무렵에는 둘 다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두 사람은 단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에머슨은 매우 기쁜 표정으로 칼라일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칼라일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에머슨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나도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 자네는 매우 훌륭한 철학자가 될 걸세.” 두 석학은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말보다 침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번 한 주간, 침묵 가운데 전해지는 가르침을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박재천/ 시인. 가정,효 아카데미 원장 >
▣ 침묵의 지혜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창조는 침묵과 함께 시작되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생각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상상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계획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할 피조물을 품으셨다. 침묵은 하나님의 언어이다. 침묵은 말이 없다. 침묵은 말이 없는 언어이다. 소리가 없는 언어이다. 침묵 속에 담긴 언어는 무게가 있다. 깊이가 있다. 침묵 중에 나온 언어는 생명이 있고 넘치는 에너지가 있다. 침묵 중에 나온 언어는 사람들의 영혼을 살린다. 침묵 중에 나온 언어는 새 역사를 창조한다. 침묵 중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다. 참된 말은 침묵 속에서 나온 말이다. 침묵으로 품은 말속에 참된 의미가 있다. 생명이 있다. 능력이 있다. 그런 까닭에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의 언어는 깊이가 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우주에서 침묵만큼 하나님의 모습과 닮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맛보게 된다. 침묵은 고요함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고요히 자란다. 어린이들은 고요히 자란다. 서서히 자란다. 고요함중에 꽃이 피고 고요함중에 꽃이 진다. 고요함중에 태양이 뜨고 고요함중에 태양이 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라. 소리없이 움직인다. 식물은 소리없이 자란다. 곡식은 소리없이 영근다. 침묵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최상의 지혜이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과실은 기다림을 통해 맛을 더해 간다. 풋사과는 신선하지만 깊은 맛이 없다. 사과의 깊은 맛은 기다림을 통해 더해 간다. 기다림은 맛을 더하게 하시는 하나님 은총의 선물이다. 침묵할 때 우리는 듣게 된다. 침묵할 때 우리는 드러난 언어 속에 담긴 감춰져 있는 언어를 듣게 된다. 언어 속에 담긴 세계를 알게 된다. 누군가 침묵 중에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랑이란 언어 속에는 엄청난 세계가 담겨 있다. 침묵은 지혜다. 침묵할 때 마음은 고요해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맑아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깊어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부드러워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따뜻해진다. 그러므로 더 많이 침묵하라. /강준민 목사(LA동양선교교회)
▣ 침묵이 좋은 몇 가지 이유
침묵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줍니다. 침묵은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을 예방합니다. 침묵은 후회할 말들을 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침묵은 세상과 나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둘 수 있도록 해줍니다. 침묵은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들어줄 수 있게 합니다. 침묵은 무한한 인내심을 길러줍니다. 침묵은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기도하게 합니다. 침묵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 핑계였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그리고 침묵하면 당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합니다. /최용우
▣ 침묵의 힘
어떤 의미에서 침묵은 현재, 과거, 미래를 하나로 만든다. 예를 들면, 사랑은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에 의해서 흔히 드러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베풀어지는 예감과 통찰력은 이러한 침묵의 초시간적인 성격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 막스 피카르트의《침묵의 세계》 중에서 -
* 입을 열어 다툼이 되느니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말 때문에 싸움의 불길을 키우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침묵은 때로 끊길 뻔 했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주기도 하고, 그 사람과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시 연결해 줍니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며, 성숙된 인격의 한 표현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비난과 침묵
말에 어폐가 좀 있지만,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은 무척 쉽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걱정해 주는 것처럼, 또 진심으로 위하여 충고해 주는 척하면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을 끼쳐주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간간이 우리 주변에 불미스러운 추문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기대감과 비례해서 충격의 파장은 크고 소문은 확산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무책임하게 침소봉대하여 말들이 말을 낳고 또 말을 만들어 겉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특히 사이버 상에서의 소문은 진위 확인은 고사하고 유통기한도 없이 가히 언어 폭력 수준입니다. 이럴 땐 말을 옮기지 말고 그저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해 주는 것이 어려우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도 좋습니다. 사실 추문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걱정한답시고 이리저리 글을 펴다 나를 정도로 우리는 걱정하지도 않으며, 또 실제로 당사자와 친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조금 더 혹평하면 그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기심에 따라 소문내는 참새 입방아 노릇만 하게 되고 결국 상처를 재생산하며 마귀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남의 말은 좋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차라리 침묵이 나을지 모릅니다. 격려할 수 없다면 오히려 비난보다는 침묵이 그 사람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가만히 들어주세요
누군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교훈이나 어떤 말을 해주기보다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위로가 될때가 있습니다. 깊이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는 이 앞에서 말은 그야말로 말일 뿐입니다. 어깨를 다독거려 준다든지 눈을 바라본다든지 하면서 침착하고도 평화롭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세요. 그의 이야기와 이야기 너머의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오히려 더 든든한 위안과 설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슬픔이나 아픔에서 벗어나는 기간 동안 당신도 그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해두세요. 예를 들면 그의 아픔을 함께하며 목도리를 짜서 준다든지 그를 위하여 하루하루 정성을 모은 저금통을 준다든지 그렇게 만드는 과정이나 시간이 들어간 것들을 선물해보세요 진정으로 귀 기울여준다는 것은 말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무처럼 바위처럼 떠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오래 지켜주는 것입니다. /권대웅, <당신이 별입니다> 중에서
▣ 조용한 물이 깊은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말 중에 대부분은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아픈곳을 말하면서 그 말에서 기쁨을 찾으려고합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자기를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할 뿐 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말을 하지않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생각없이 합니다.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확실한 이야기도 아닌 추측을 가지고 말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의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삶의 힘을 돋구어 주는 그런 말을 나눈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할까... 사람들은 드러내는 말 보다는 밝은 미소로 침묵으로 조용한 물이 깊은 것 처럼 깊이 있는 말로 사랑과 감동을 전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요?
▣ 3·2·1 법칙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천’이 성공 비법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그 내용 중 하나가 “속내를 털어놓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것이었다. 대인 관계의 3·2·1 법칙이 있다. 그것은 3분간 경청하고, 2분간 맞장구쳐주고, 1분간 말을 하라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정신과 의사들의 주된 일은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아무리 흥분한 사람도 한 시간만 말을 하면 화가 진정된다. 황하는 작은 시냇물이 흘러들어 오는 것을 막지 않았기에 그만큼 커질 수 있었다. 오늘날 엄청난 과학기술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통신망은 눈부실 정도로 발전했다. 휴대전화는 신체의 일부처럼 밀접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점점 고독을 느낀다. 아이들은 컴퓨터 속으로, 어른들은 텔레비전 속으로 빠져든다. 성경은 말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진정 필요한 시대다. /설동욱 목사(예정교회)
▣ 하나님의 침묵
본문: 시편 83 장 1 절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기도를 하여도 응답이 없을 때 답답한 마음에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은 아닐까?’라는 섣부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현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도하며 기다려도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주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행동 하나하나까지 알고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짧은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쫓아가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한정된 머릿속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시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때가 무르익었을 때 과일을 수확해야 그 과일이 맛이 있듯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에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를 고르십니다. 침묵의 시기가 지나면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 기도: 침묵 후에 이어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도하게 하소서.
▣ 말을 아껴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교수에게 한 학생이 "교수님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교수는 "입을 적게 움직이고 머리를 많이 움직이게"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일에 골몰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일에 골몰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타인들의 흠만보인다. 그리고 타인들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는 60년이 걸린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하기 전에 반드시 두 번 생각한다.
▣ 침묵 게임
부모님은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침묵 게임’을 시키셨다. 가장 오랫동안 침묵하는 사람이 이기는, 많은 부모가 좋아하는 게임이다. 어느 날 몇 시간 동안 그 게임을 하고 있을 때(우리는 그 게임을 잘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침묵 게임을 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나는 요즘도 전혀 다른 이유로 침묵 게임을 하고 있다. 진정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움 때문에 말하길 억제한다. 갈등이 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통이 두렵고, 인간관계의 혼란을 정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것이 두렵다. 당신을 괴롭히는 그 무엇에 대해 괴롭지 않은 척할 때, 본심과 달리 타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척할 때 침묵 게임을 하는 것이다. 나는 수년 동안 서로 침묵 게임을 하는 부부들을 안다. 그들은 말싸움을 피하기 위해 그 게임을 하지만, 실은 친밀감을 회피하고 있다. 나는 직장에서 침묵 게임을 하는 직원들을 안다. 그들은 파문 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 게임을 하지만, 실은 원망과 좌절 속에서 수년을 보낸다. 나는 믿지 않는 이웃이나 친구와 침묵 게임을 하는 교인들을 안다. 그들은 거절이나 부끄러움을 피할 수 있겠지만, 불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제공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지금 당신은 누구와 침묵 게임을 하고 있는가? 침묵 게임 뒤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 「단순하게 믿으라」/ 존 오트버그
▣ 침 묵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마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때, 침묵은 양선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용서해 줄 때, 침묵은 자비입니다. 불평없이 고통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더라도 타인에게 영광이 돌려지도록 내버려둘 때, 침묵은 겸손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시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침묵은 신앙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순종입니다.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할 때 모든 것을 참으로 모든 것을 믿을 때 침묵은 사랑입니다.
▣ 침묵에 관한 성경 말씀
0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욥 13:5) 0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83:1) 0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시94:17) 0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시83:1) 0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0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잠11:12) 0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13:3) 0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잠17:28) 0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전3:7) 0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 0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눅20:26) 0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행18:9) 0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0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약3:1-3)
▣ 침묵에 관한 금언
0 언어는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위대하다.(토마스 칼라일) 0 혀를 조용히 쉬게 하는 것은 현명한 머리이다.(윌리암 제임스 루카스) 0 말을 할 때와 침묵을 지킬 때가 따로 있다. 0 비록 자기가 올바를 지라도 끝까지 침묵할 줄 아는 사람에게 큰 힘이 있다.(카토) 0 고통을 받을 때는 침묵이 최고이다.(죤 드라이든) 0 침묵은 승낙을 의미한다.(영국 속담) 0 하지 않은 말은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루이스 코수드) 0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때 침묵은 분별력 있는 웅변이다.(보비) 0 만일 그대가 현명하다는 평을 받고 싶으면 그대의 혀를 다물 줄 아는 현명함을 먼저 배우라(프란시스 촬스) 0 개미보다 설교를 더 잘하는 자는 없다. 그런데 개미는 말이 없다.(벤자민 프랭클린) 0 사람이 말하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배우게 되지만 침묵하는 일은 좀체로 배우지 못한다.(탈무드)
고독과 침묵을 사랑함에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적당한 때를 구하고(전3:1)하나 님의 사랑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자주 명상할 기회를 가 지도록 하십시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나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독서하지 말고 오직 당신의 몸과 마음을 경건으로 이 끌어 주기에 적절한 책들을 읽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당신이 불필요한 잡담뤠모a 목적없는 방문을 피하고, 뉴스와 소문듣는 일을 절제한다면 당신은 선한 일에 대해 명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성도들 은 될 수 있는 한 사람이 모인 곳을 피하고 고독하고 은밀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겼읍니다. 어떤 경건한 사람은 `내가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마다 나는 전보다 작은 사람이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라고 고백했읍니다. 우리가 종종 많은 시 간을 사람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중에 이러한 말이 사실임 을 경험하게 됩니다. 도에 지나치지 않게 말한다는 것보다 는 전혀 말하지 않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 그리고 집 밖에 서 대중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집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더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침묵하지 못하는 사람 스파르타의 정치가 데마라투스가 공회 석상에서 한마디의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이를 본 그의 친구가 '여보게, 못나서 말을 않나?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 안하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대는 모르는 말일세! 못난 사람은 절대 침묵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라네'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미성숙한 사람은 절대로 말을 통제하지 못한다.
15분간의 침묵 인간이 이룩한 20세기말의 경이적인 사건인 콜럼비아 호의 우주 궤도 여행은 다시 한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영과 크리프라는 이름을 가진 두 우주 비행사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큰 개가였다. 우리는 다시한번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주 정복을 향한 인간의 도전과 지혜의 싸움은 끝이 없다. 콜럼비아호가 착륙 예정 시간보다 2시간 8분 전에, 36번째의 마지막 궤도 비행을 끝내고 영과 크리프 두 우주 비행사가 콜럼비아 호를 궤도로부터 이탈시켜 지구로 내려오게 하기 위한 두 대의 궤도 조정 로케트를 점화시켰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콜럼비아 호가 하와이 북서쪽 고도 80Km상공에 이르렀을 때 특히 마찰을 많이 받는 날개 끝과 밑 부분이 섭씨 1500도로 달아올라 용광로처럼 뜨거워진 것이다. 이 고열로 인해 대기권에 돌입하는 순간부터 약 15분간 콜럼비아 호와 지상 관제소간의 교신이 두절되었다.
침묵의 언어 제가 아는 어떤 분들이 수양을 하는 방법으로서 한 시간 이상 나무와 대화하는 훈련을 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나무 앞에서 침묵하며 동산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표현되지 않은 언어, 즉 인간이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원색의 언어를 날마다 새롭게 들을 수가 있고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상이고 이것이 영감이고 이것이 진짜 시인입니다. 그 말은 구태여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은 시로 표현할 수조차도 없는 줄로 압니다. 그 말은 일종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누구나 종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연에는 엄청난 침묵의 언어가 있습니다. 생명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신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침묵의 기도 깊은 침묵에로 이끄는 기도는 우선 수락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향해 마음(손)을 열고 서 있는 사람이다. 그의 주위의 자연, 만나는 사람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세상이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 비밀이 자기에게 밝혀지기를 바라며 그는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내어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신을 내어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계속 두드리신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성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정된 존재이며 종속되어 있고 약하며 죄인이라고 하는 우리의 고백이 요청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이것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또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도 않음을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아직 이루지 못했고 이것은 현세에서 이룰 수도 없음을 항구하게 마음을 열고 새 생명을 주는 은총을 계속 기다리고 있음을 .....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침묵 성 구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이사야 53:5) 1587년 이래 일본의 대수 히데요시가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카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제일 먼저 나가사끼의 니시사까에서 26명의 사제와 신도들이 집에서 쫓겨나고 고문을 받아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장군도 이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여 1614년 모든 카톨릭 성직자를 해외로 추방하기로 했다. 이때 포르투갈의 예수회가 일본에 파견하고 있던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나가사끼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를 맹세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2명의 신부를 몰래 일본에 파견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 정부에게 잡히게 된다. 오사와노는 이들 중 하나인 로드리고 신부에게 배교하라고 설득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인 신도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이때 행해진 배교의 방법은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하나님, 왜 당신은 계속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까?" 포교를 위해 멀리 일본에 건너왔던 한 포르투갈 신부는 이렇게 되묻고 있지만 바다조차 어둡게 침묵한 채 잠잠하기만 했다.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서 그는 인간의 진실과 신앙의 진리 그 어느 것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침묵은 금 감리교의 위대한 전도자 죤 웨슬레는 두 여인에 대한 관찰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한 여인은 열정적으로 손짓 발짓 다해 가며 거칠게 지껄여 댔다. 그러는 동안 다른 여인은 한 마디도 없이 평온하게 그 옆에 서 있었다. 결국에는 첫번째 여인은 침묵을 지키는 여인 때문에 지치게 되어 고함을 질렀다. "말 좀 해요. 그래야 내가 말을 만들어 할게 아니요" 웨슬레는 이 장면으로 "침묵은 욕설에 대한 최선의 답변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침묵의 기도 깊은 침묵에로 이끄는 기도는 우선 수락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향해 마음(손)을 열고 서 있는 사람이다. 그의 주위의 자연, 만나는 사람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세상이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 비밀이 자기에게 밝혀지기를 바라며 그는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내어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 피조물인 인간 에게 당신을 내어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계속 두드리신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성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정된 존재이며 종속되어 있고 약하며 죄인이라고 하는 우리의 고백이 요청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이것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 님이 아니고 또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도 않음을,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아직 이루지 못했고 이것은 현세에서 이룰 수도 없음을 항구하게 마음을 열고 새 생명을 주는 은총을 계속 기다리고 있음을 .....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침묵의 소리
자기만 알던 한 남편이 결혼생활에 위기가 다가 오자 목회자를 찾아가 상담했다. 목회자는 남편에게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고 "일주일간 아무 소리 말고 부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시오"라고 일러 주었다. 남편은 일주일 동안 부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자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독선적이었던가를 깨달았다. 일주일 후 남편이 목회자를 찾아가자 목회자가 말했다. "이번엔 일주일 동안 부인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시오. 침묵의 소리가 들리면 부부관계가 좋아질 것입니다."
침묵의 신비
어떤 수도사에게 여인이 찾아와 "남편과의 다툼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수도사는 물이 담긴 병을 하나 주면서 "남편과 다투기 직전 이 물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삼키지 말라"고 말했다. 여인은 남편이 시비를 걸 때마다 그렇게 했다. 그러자 가정이 조용해지고 부부가 화목하게 됐다. 후에 여인이 수도사를 찾아 '신기한 물'이라고 감탄하자 수도사가 말했다. "그 물은 평범한 물입니다. 다만 침묵이 신비로울 뿐입니다."
침묵의 언어 어떤 분들이 수양을 하는 방법으로서 한 시간 이상 나무와 대화하는 훈련을 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나무 앞에서 침묵하며 동산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표현되지 않은 언어, 즉 인간이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원색의 언어를 날마다 새롭게 들을수 있고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상이고 이것이 영감이고 이것이 진짜 시인입니다. 그 말은 구태여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은 시로 표현할 수 조차도 없는 줄로 압니다. 그 말은 일종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누구나 종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연에는 엄청난 침묵의 언어가 있습니다. 생명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신실한 것입니다.
침묵의 훈련 진실한 사람을 침묵하게 만들어보자. 그로부터 모든 가식, 이기심, 육욕, 영혼의 나태함을 제거하고 생각과 애정을 하나하나씩 차례로 제거하라. 그가 모든 것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할 때까지. 그의 창문을 열어라. 그리고 밤을 내다보아라. 밤의 숨결이 얼마나 조용한가. 이것의 행진이 얼마나 장엄한가. 밤의 시야가 얼마나 깊은가. 그리고 생각해보라. 당신이 하나님의 영원성을 제외하고는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가 하는 것을, 그리고 이마에 와닿는 미풍처럼 가까이에서 영원한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오, 하나님, 당신은 항상 이렇게 가까이에 있군요.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인생의 진정한 조화와 정신이 무한히 깨끗한 마음에 열려 있지 않으면 그에게 유혹의 하찮음과 신뢰의 위대함을 보여주라. 그는 노력하는 도중에 그렇게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용감히 시도하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창피하게 여긴다. 그는 자신을 가렸던 먼지가 얼마나 작은가를 발견하고 조용하고 신성한 사랑의 정상에서 굉장한 슬픔으로 자기 인생을 괴롭혔던 시기. 두려움과 흥분을 내려다본다. 강력한 결심의 표시가 그에게 있고 그 영혼의 모든 분위기를 신선하게 한다. 하찮은 어려움이 사라지듯이 차례로 어려움을 쓸어버리면서, 그는 더이상 시간의 간막이에 갇혀 있지 않고 현재와 이곳이라는 영원에 속한다. 각각의 영혼의 고립은 사라지고 하나님과 비슷한 무한한 영혼의 덩어리로서 그는 다만 무한한 심연의 파도이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비밀스런 장소를 발견하였다.
침묵의 힘
1914년 미국에 의해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기 전, 건설을 맡은 총책임자는 불리한 지리적 여건과 악천후를 이겨나가는 한편 "운하는 완공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여론과 맞서야 했다. 특히 그는 온갖 비난과 모략을 감당해야 했는데, 그 와중에도 침묵을 지키며 성실히 일을 추진했다. "왜 그런 모함을 받고도 침묵합니까?"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물을 때마다 그는 "때가 되면 하지"라고 대답했다. "그 때가 언제 입니까?" 그는 웃으며 짤막하게 말했다. "운하가 완공된 후."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살전 1:5; 행 15:7
AD 2세기의 철학자 캘수스는 초대 기독교인들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에 대해 말했다!"라고 했다. 성경은 그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밀하고 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 8:1-4) "나는 그 분에 관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라고 흥분하면서 말할 때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 분의 능력과 구원을 마치 스핑크스처럼 불가해한 것이라 하여 침묵을 지킬 때, 우리는 거짓말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감한 거절도 필요하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충고했다. "과감히 노우하라. 이것이 때로는 무엇보다도 값질 수가 있다." 노우라고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선과 진과 하나님을 향한 굳센 믿음을 소유하였을때 거기서 이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옳지 않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표현 할 만한 용기를 소유하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선과 의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 할 것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악마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다." 히틀러가 지배자가 된 것도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고 대항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협박에 대해 단지 침묵함으로써 동조하지 않음을 표시하는 수동성에서 벗어나 그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정복할 만큼 굳세어 져야 한다."
두고 볼 줄도 아는 훈련
저는 지금까지도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3월부터 성대가 상해 '침묵'해야 했는데, 지난해 12월 거의 10개월만에 조금씩 말하는게 가능했으나 많이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말연시 이곳 예수마을을 찾아온 손님들과 조금씩 대화를 나눈게 화근이 되어 다시 성대주변이 붓고 따가와 현재(1월 중순) '침묵'중입니다. 이 먼 곳까지 쳐들오 오신 분들을 문전박대할 수도 없어 입을 연게 '미련한'짓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께 송구스럽기 그지 없고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도 어언 석달 보름이 다 되어갑니다. 이 산골 마음에 있는 자그마한 교회에 출석을 하는데 교인이 한 40여명되는 아담한 교회입니다. 이 곳에 이사와서 교회에 나가며 제가 제일 견디기 힘들고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배전 찬송부르는 시간입니다. 시골 교회들이 거의 그렇듯이 대부분이 노인들이신데(설령 젊은 사람들이 좀 있더라도 그들조차도) 찬송을 부르는 것이 흡사 타령이나 중얼거림이기 십상인 것입니다. 전도사님이라도 마이크에 대고 찬송을 부르시면 낫지만 예배전엔 전도사님께서도 예배준비, 기도등의 이유로 미리 나오시기 어려우므로 하는 수 없이 교인들끼리 찬송을 부르는데, 반주자도 없고, 게다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찬송가가 거의 악보가 없이 가사만 있는 것이기에 오로지 '대강, 기억만으로'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찬송소리는 땅바닥에 깔려 있고(적어도 한 옥타브 이상) 그나마 곡이 제대로 흘러가기가 어려울 뿐더러 때로는 잘 나가다가 가사는 맞는데 곡조는 전혀 다른 곡의 것이 끼어들어 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선 목소리 큰 할머니의 곡조가 이깁니다. 어쨌거나 그 할머니의 '창'에 다른 이들도 따라가기 마련인 것입니다. 축축 늘어지는 노랫소리들...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그 자리 한 가운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곳에 오기 전엔 비록 시덥잖은 엉터리이긴 했었어도 명색이 찬송인도자였습니다. 제 목소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크고 우펑차며, 이삼백명 앞에서도 마이크 없이 세시간 이상 강의를 할 만큼 튼튼한 성대를 가졌습니다(덕분에 이처럼 엉망이 되었지만) 그런 사람이 이런 자리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잇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말을 조금 할 수 있던 때에도 일체 찬송은 못 부르고 그저 입만 달싹여야 했으니...! 마음 같아선 그냥 큰 목소리로 찬송을 이끌어 나가고 싶은데 그게... 가능한 얘긴가요? 한 두달 동안은 너무 답답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정말 홧병이 생기지 않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공연히 애ㄲ게도 옆에 있는 아내 옆구리만 쥐어 박는 것입니다. "좀 크게 해! 제발!" 그러나 아내도 곤욕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들이 시작한 찬송 음이 워낙 낮아 따라하기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피아노음대로 하면 할머니들이 도저히 소리를 낼 수 없으니 그렇게 인도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함께 흐느적 흐느적 할 수 밖에요. 쯧쯧..! 그 가운데 앉아 있는 저는 주여! 하며 가슴만 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구, 답답혀! 도대체 이것도 찬송이라도 부르는 건가?'
당장이라도 일어나 앞에 나가 고함을 치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이것 좀 보세요. 다들! 아니 누가 죽었습니까? 어떻게 찬송이 전부 장송곡입니까? 그리고 하나 따져 봅시다. 주님 찬송하는게 그렇게 시시한 일입니까? 왜들 그렇게 찬송소리가 풀어 푹-죽어 있습니까? 저야 말을 못하니 그렇다 치고, 아니 여러분들은 다들 목소리가 멀쩡한데 그 목 아껴뒀다가 무덤속에 갖고 가실 계획들입니까? 좀 속 시원하게 찬송 못해요 정말?"하고 말입니다. 예전에 각 교회에 가서 많이 떠들던 소리이기도 합니다. 목만 나으면 아주 이 교회 찬송부르는 자세부터 고쳐놓아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묵상중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용덕아! 불쌍한 내 아이야! 내가 네 목을 친 까닭을 아직도 다 모르고 있구나. 그렇게 감을 못잡겠니? 목이 멀쩡하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뭘 가르치겠다고 했느냐? 쯧쯧! 오! 아니다. 용덕아! 그게 아니다. 저 백성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어 내가 너를 이 산골짜기까지 끌고 들어왔겠느냐? 천만의 말이다. 착각하지 말아다오. 너 말고도 이 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너무나 많단다. 너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구나. '그렇찮아도 할 일 많은 이때에 왜 하필 하나님께선 최간사를 저렇게 1년가까이나 말도 못하게 만드십니까?'하고 말이다. 오해하지 마라. 내가 일꾼이 모자라서 나의 일을 제대로 못 이룰 줄 아느냐? 그건 너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다. 용덕아! 만약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이걸 가르쳐 주마.대구에서 찬미선교팀을 결성한 후 지난 5년간 승승장구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최용덕, 최용덕하며 너를 찾고 너의 간증을 원하고 강의를 요청하니까 너는 네 스스로 아마도 대단한 예수의 일꾼이나 되는 줄 알았겠지? 그리고 너의 주변의 사람들도 그렇다. '찬미'하면 곧 '최용덕', '최용덕'하면 곧 '찬미' 운운하며 마치 찬미가 최용덕이 하나 때문에 유지되는 양 '최간사 없으면 찬미야 하루아침에... '어떻게 하며 떠들더구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다면 나는, 이 땅에 최용덕이란 사람이 없어도 나의 계획과 사역이 어떻게 능히 잘 이루어 져 갈 수 있는지를 너와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줄 작정이다. 찬미도, 최용덕이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사역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겠다. 아니 대구땅에서 찬미팀 조차 사라진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내 나라는 확장되어 갈 수 있다는 것도 가르쳐 주려한다. 용덕아! 명심해라. 추호라도, 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사역자나 되는 것처럼 거들럼거리지 마라. '찬미'라는 이름의 팀이 무슨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도 생각지 마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것을 잊진 않았겠지? 나는 나의 피조물들이 다른 피조물들을 나보다도 더 주목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내가 속좁은 옹졸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 줄 아느냐? 그게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곧 너희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 있어선 패망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네 스스로 조금이라도 우월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면 그것이 곧 네가 망하는 길로 접어 들었음을 깨닫도록 하여라. 지난 10개월동안 너는 말을 하지 못하는 연단을 통해 내가 의도했고 계획했던 많은 훈련을 그런대로 잘 감당해온 것도 사실이다. 너의 목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많은 나의 자녀들의 기도소리를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가 기대했던, 이 연단을 통해 얻기 원했던 아주 중요한 몇가지 [과목]에서 아직도 빵점을 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너의 목을 아직 열어줄 수가 없단다. 적어도 나는 네 스스로 그 정도는 쉽사리 깨달을 수 있을 줄 알았고, 난 그것을 학수고대했다. 왜냐하면, 그까짓 것 쯤이야 당장이라도 하루아침에 나의 능력으로 네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나는 나의 자녀가 스스로 깨달아 조금씩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벅찬 감격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시간까지도 너는 나를 기쁘게 해 주지 못하는구나. 내가 왜 널 이 산골마을 교회당 안에 앉혀놓았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그 한가운데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다는 소리가 "으이그! 이것도 찬송이냐?" 겨우 그런 탄식이냐? 건방진 녀석.... 도대체 네가 거기에 무엇하러 앉아 있는 게냐? 내가 널, 거기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 찬송부르는 자세, 음정, 박자 심사나 하라고 보내놓은 줄 알았더냐? 이 답답한 아이야! 내가 널 선생, 재판관으로나 쓰려고 말도 못하게 만들어 이 산골짜기로 쫓아보낸 줄 알았더냐? 여기서 큰 소리나 치고, '무식한 사람들'앞에서 훈계나 하라고, 그래서 그동안 갈고 닦은 네 진면목이나 보여 주라고 이곳에 보낸 줄 알았어? 이 불쌍한 녀석아! 아직도 넌... 참으로 멀었구나. 아직도 그걸 못 배웠니? 도대체 언제까지 네 알량한 경험과 지식으로 남들을 평가하고 분석하고 앉아있을 작정이냐? 이것하나 분명히 알아두어라. 네가 볼 땐 이곳 시골교회 교인들이 '흐느적거리며 타령조로 부르는'(이건 네가 했던 말이다) 찬송들이 도대체 음악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고 찬송도 아닌것 처럼 보이는 지는 모르겠는데 이놈아! 그건 네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야.내겐 이들의 음정, 박자도 안맞는 그 흐물거리는 찬송이 어찌 그리 귀하고 소중한지 늘 언제나 이들 가운데 함께 하여 귀를 기울이고 또 너무도 기쁘게 그 고백들을 받는단다. 왜, 뭐가 이상하니? 너희 인간들은 뻑하면 내 이름을 들먹이며 음악의 수준을 논하고 가사의 문학성을 이야기하고 화음과 표현의 세련미를 떠드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데엔 크게 관심이 없다. 그거 알고 있니? 그게 '거룩'이라고?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의 마음의 진실성과 정성, 바로 그것이다. 나는 네가 소위 '찬양강의'라는 걸 통해 늘 빠짐없이 바로 이 말을 떠들며 가르치는 것을 수없이 들었지. 그러나 정작 문제는, 네 자신은 지금도 별로 그런 문제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녀석이 교회 한 가운데 앉아서 '으이그, 답답혀! 이것도 찬송이라고!'하며 가슴을 치는 거냐? 넌 아직도 멀었구나. 나는 네가 적어도 그 알량한 얼마간의 경험과 주워들은 지식으로 남들을 가르치려는 태도부터 고치지 않으면 너의 목을 열어주지 않으려 한다. 도대체 네가 똑똑하면 얼마 똑똑하며, 잘났으면 얼마나 잘난 게냐? 나는 네가 적어도 남을 가르치기 전에, 네가 먼저 지녀야 하고 배워야 할, 태도, 자세부터 익히지 아니하면 네가 말로 남을 가르치는 일은 맡길 수가 없다. 어디 물어보자! 네겐 도대체 뭐가 그렇게 '차마 보지 못할 것'도 많고 '차마 듣지 못할 것'도 많고 '가만 두고는 못 볼 것'이 많으냐? 말 나온 김에, 네 발목 얘기... 어디 네 입으로 설명 좀 들어보자. 어서!"
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숨겨둔 내용인데 어차피 이곳에 들린 많은 분들께 발각이 되었기에 이실직고 합니다. 사실은 제가 말만 못하는 게 아니고... 잘 걷지도 못합니다. 벌써 두달째입니다. 죄송합니다. "에이그~ 참 지지리도 못났군! 기가차서! 아 최용덕씨 당신 왜 그래?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뭐 아픈게 자랑이야? 동정표 긁어모을 일있어?" 할 말이 없습니다. 한 달 반동안은 정말 겨우 몇 발자국만(병원에 갈때) 걸을 수 있었고 집에선 꼼짝없이 기어다녀야 했답니다. 지금은 목발을 짚고 조금씩 다닙니다만... 양쪽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디딜 때 마다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이거- 오래 가는 거 알죠? 걸으면 안돼요! 계속 무리하면 인대늘어난 건 돌이킬 수 없어요!”라며 협박(?)을 했습니다. 물리치료를 보름이상 계속받고 침도 보름이상 맞았지만 그게 원체 하루 아침에 낫는 게 아니니… 어쨌든 저는 이곳에 이사온 지 한달 뒤부터 방안에 꼼짝 못하고 앉아만 있어야 했습니다. 하긴 가을에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며 놀 때(?)가 좋았지요. 저는 원래 성격상, 어느 정도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저분하게 정리가 안 되어있고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꼬락서니’는 가만 두고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찬미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오며 가며 늘 잔소리인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결혼 후 아내가 저에 대해서 포기한 것은 책상, 방 정리입니다. 돼지우리처럼 만들어 놓고도 그속에 들어 앉아 작업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긴 그건 ‘나아진’게 아니라 무질서해 진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쨌거나 옛버릇 어디 가겠습니까? 제 방이야 제 자신도 포기했다 치더라도, 다른 곳이 어지러워져 있으면 그건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 이곳에 이사를 오니... 세상에! 이럴수가! 이게 사람사는 곳입니까? 도처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 무성한 운동장의 잡초들, 10년동안 손을 보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나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들, 귀신나올 것 같이 온통 부서지고 뜯기고 엉망진창인 기와집, 비가 새는 교실 지붕들, 무너져 내린 벽, 엉터리 전기시설들... 적어도 제 눈엔 그런건 내버려두고는 못 볼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도착하자 마자 주먹을 쥐고 이를 갈았습니다. 하긴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낫이니 톱이니 하는 공구들을 죄다 사오기도 했습니다. 이튿날 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집근처 풀이라도 베어내고 캐내니 좀 나아진 듯 했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고랑을 메꾸고 마당을 정돈했습니다. 그리고는 오후엔 뻑하면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땄습니다. 일손이 없어 감따는 일은 우리외엔 아무에게도 맡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감나무에 올라가 버티고 서서 장대로 감을 꺾어내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발목에 힘이 얼마나 많이 가는 일입니까? 며칠 후 오른쪽 발목이 시큰둥하고 아팠을 대 정신을 차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품이 하도 되먹지 못해서, 제 자신이든 누구든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거나 게으름을 부리거나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 ‘꼴’은 용납하지 못하는 터라 눈 앞에 산적한 일거리를 두고 발목이 조금 아프다고 ‘엄살’을 부린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늘 그런 식으로 무식하게 살아왔고 실제로 그런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대부분 먹혀들어 갔었습니다. 아내가 ‘제발 좀 쉬어라’고 당부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음날 꼭두새벽에 일어나 절뚝거리며 톱을 들고 나갔습니다. 혼자 사다리를 어렵게 어렵게 플라타너스에 걸쳐놓고는 올라가 곡예하듯이 매달려 가지들을 톱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반나절이나 걸렸습니다. 오른 발이 아프자 왼쪽 발만으로 깨금발을 해가며 다녔습니다. 머저리... 멍청이... 바보... 미련둥이... 똥고집... 무식쟁이... “이거 지금 더이상 무리하면 평생 고생합니다. 발목 인대는 달라요, 다른 데 하고.” 의사와 다른 분들의 경고에 그제서야 겁이 덜컥 났습니다. “다니면 안돼요!” 하기는, 목도 그랬지 않습니까? 따갑고 아플 때 이미 경고를 느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몇달 전에 잡혀 있는 집회들을 목이 좀 따갑고 아프다고 취소를 한단 말입니까? 저로선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엄살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느 봉사모임의 뮤직디렉터로 삼일 밤낮을 꼬박 찬송인도를 하고 이튿날부터 잡혀있는 찬미집회들을 하고 세시간짜리 강의까지 마이크 없이 진행했습니다. 병원에 들렀을 땐 이미 성대의 모세혈관이 터져 물혹이 생긴 후였습니다. 서울 한강성심병원 이비인후과, “이거 수술로 제거하는 방법외엔 다른 방법 없습니다. 수술날짜 잡지요.”그렇게 무식할 수도 있는 건가요? 저 말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는 걸 왜 몰랐던 걸까요? 우리의 육체는 애초부터 어느 한계이상 혹사를 시키면 이상신호(경고)를 보내게 하나남께서 만드셨고, 그 경고를 무시하면 넘어지게 되어 있는게 하나님께서 주신 법칙이거늘...
뒤늦게야 겨우 이 초보적인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달은 저는 의사선생님의 권고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더이상 아내를 속썩히는 죄도 지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즈음에 저희가 살 집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산골에서의 공사에 일손이 모자라는 게 당연하고 집 주인이 가서 집일이라도 돕는 것이 상식입니다. 일이 제대로 되어 가는지 돌아보고 싶고 도 마땅히 보는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저는... 200m 떨어진 임시 거처에 들어 앉아 멀거니 쳐다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일 괴로웠던 것은 공사 일꾼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거... 일하기 싫어서 엄살부리는 것... 다 압니다. 에이그... 저희는요, 갈비뼈 부러졌는데도 톱질했다구요.”하는 말이었습니다. 제 성격에, 이 와중에 들어앉아 있는 것도 견딜 수 없는 고문이거늘... 엄살, 요령의 혐의는 차마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속에서 울화통이 치밀어도... 그래도 도리가 없습니다. 이 상황을 참고 견디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저희가 살 집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이사를 하는 날, 찬미형제들과 일꾼들이 죽을 고생해가며 짐을 나르는 것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별 수 없이 구경이나 해야 하니 그것 역시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보다도 더욱 힘든 것은 여전히 엉망으로 방치되어 있는 이곳 예수마을 구석 구석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창문을 열면 교실바닥에서 나온 그 좋은 목재들이 아무렇게나 내던져 진 채 비를 맞아 썩어가고 있고, 치워야 할 공사자재들, 공사 쓰레기들이 집 앞뒤에 흉칙스럽게 널려 있는 것이 빤히 보입니다. 기와집은 여전히 흉가입니다. 나머지 옛 사택들도 폐가처럼 내버려져 있습니다. 목사님 혼자서는 비틀거리는 진협이를 데리고선 손도 댈 수 없는 큰 일들이라 아얘 엄두도 내시지 못합니다. 결론은 제가 나아서 밖으로 나가 힘을 합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바로 코앞 손 닿는 곳에 쌓여있는 '두고 못 볼 골칫거리'들을 '두고 보아야'하는 고문은 참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며... 저는 이제서야, 새로운 상황에 대한 조용한 적응훈련을 받다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창문만 열면 널려있는 '골칫거리'들이 보기싫고 골치가 아파 아얘 창문열기를 포기했었습니다. 집안에서 기어다녀야 하는 처지로 보고서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안보는게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갑자기 저는 목발을 짚고 바깥 구경을 나왔다가 달라진 제 눈을 느끼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전히 변함없는 너전분한 환경이지만 그때 다시보니 그런 모습들이 뭐 그리 심각할 만큼은 아니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어지럽고 정돈되지 못한 구석구석이 '차마 보지 못할, 신경질 나는 꼬락서니'들이 아니라 그런대로 '두고 보아도' 큰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었습니다. 근처에 가기도 싫었던 폐가 기왓집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는데 요즘은 목사님댁이나 우리집, 진협이 마저 이쪽 멀리로 이사한 탓에 예전보다 더 흉칙하고 으시 시한 몰골인데도 다시보니 그 집은 그 집의 그런 모습대로 어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환경이 바뀐게 아니라 제 마음과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사실 조금만 신중히 생각해보면 10년동안 방치되어 있던 이 곳 구석구석을 하루아침에 천지개벽하듯이 뜯어 고칠 순 없다는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뿌리를 뽑을 듯이 이를 으깨어 물고는 거품을 흘리며 덤벼들었던 제가 미련한 바보 아니었습니까? 아차피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는 일이라면,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는 만큼만 이루고는 그 나머지는 그 나머지 모습 그대로 '좀 두고 볼 줄도'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룻동안에 겨우 얼마만큼 이루어 놓고는 나무지 '꼬락서니'들을 돌아다 보며 "으이그! 저 꼴보기 싫은 것들! 저런 것들을 내가 보고 있느니 죽지!"하는 자세야 말로 바보짓 아닙니까? 그러느니 차라리 "그래! 저 나머지도 아무래도 손이 가면 좀 낫겠지만 그래도 저 모습 저 대로도 인정해 주고 봐 주는 거야"라는 자세가 훨씬 나은 것입니다. 혼자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혼자 용감한 척 했던 저를 하나님께서 교육시키는 방법은 이 길 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떠드는 목을 치고, 싸돌아 다니는 발목을 후려치는 것. 그리하여 궤변을 못 늘어놓게 하고, 잘난 척 뛰어다니지 못하게 해서, 그리하여 무엇하나 제대로 큰 소리치며 할 것도 없는 '무용지물', '바보'로 만들어 놓으신 것 말입니다. 그것은 참 잘하신 것입니다. 저처럼 혼자 똑똑한 척 나서기 좋아하는 녀석은 그저 좀 두들겨 패는 게 상책입니다. "으이그! 저놈의 교회도 교회냐? 허구헌 날 찌지고 볶고 싸우고...", "저런 집구석도 가정이냐?", "저런 부모도 부모냐?", "저것도 예수쟁이냐? 글쎄, 담배도 못 끊었대. 가끔 술도 한 잔 한대. 교회에선 또 얼마나 설친다구! 아이구, 난 저런 꼬락서니는 못 봐 줘! 그냥 하나님께서 확 한번 안 쓸어 버리시나?", "난 목사님들이 그랜져 타고 다니는 거 보면 눈이 뒤집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 아냐? 자기들이 섬기는 교회가 중소기업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 아닌가? 어이구, 속 터져! 난 저런 꼴들 못봐줘! 그냥 확∼ 까뒤집어 놓을까 보다. 무슨 개벽이 일어나야 돼! 우리 교회에도!"
얼마나 말이 많은 세상입니까? 사실은 위의 얘기들은 툭하면 제가 주먹을 불끈 쥐고 침을 튀기며 떠들어 대던 말입니다. 마치 이 시대의 마지막 의인(義人)이나 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선 오늘 제게 이렇게 타이르십니다.
"용덕아! 오냐 그래! 네 눈엔 차마 눈뜨고 못 볼 일이지? 하지만 어쩌면 좋겠느냐? 하나님인 나는 그런 모습들 그대로 놔두고도 잘 봐주고 있으니 말이다. 네 말을 들으니 마치 내가 머리가 어떻게 된, 판단력도 없고 둔한 신(神)같이 느껴지는 구나. 그렇니? 어디 똑똑한 네가 나에 대해서도 한번 말해 보렴. 나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날이면 날마다 졸고 앉아 있는 하나님 같으냐? 네 이녀석아! 나도 다 두고 보고 있는데 네가 왜 내 앞에 나서서 저건 어떻게 이건 어떻고 하며 내게 보고하는 거냐? 내가 네게 그걸 부탁했었어? 아니잖니! 물론 네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일, 자행되고 있는 모든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사건들, 온갖 더러운 모습들.... 난들 보기좋고 아름다와서 감상하고 있는 줄 아느냐? 내가 그런 죄악들과 쓰레기같은 인간들의 삶에 대해 징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두고 보는 줄 아느냐? 얘야! 성경을 그렇게 읽었어도 아직도 나에 대해서 그렇게 모르느냐? 그게 아니란다. 내가 왜 이런 온갖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을 모른체 하며 허용해 두는지 아느냐? 그것이 바로 너희에겐 '은혜'가 되기 때문이란다. 나는 너희 인간들에게 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려고 한다. 너희가 그 지경으로 살고 있는데도 내가 너희를 나의 자녀, 나의 백성이라 부르고, 나의 일을 맡기고 있다는 거...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느냐? 그게 내가 너희들을 향해 가지고 잇는 '사랑'이라는 것이란다. 내가 너희에 대해 얼마나 오래 참고 견디는지 알고는 있느냐? 내가 정말 또 다시 한번 이 땅에 대해 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랴? 나는 너희가 내 앞에서 죽어 마땅한 짓을 했어도 관용과 이해심과 사랑을 가지고 너희를 지켜보아 주는 나의 모습을 통해 너희 인간들도 서로 너그럽게 보아주고 이해해 주고 참고 견뎌 줄 수 있기를 참으로 원하고 기대한단다. 너희 인간들은 끝없는 자기의(自己義) 의식이 있어 조금만 남보다 더 우월하고 더 배우고 더 가지고 더 깨끗하기만 하면 스스로를 남들과는 다른 차원의 거룩한 존재로 끌어 올리려 들지! 내가 보기엔 얼마나 우스운 모습들이겠느냐? 때문에 나는 너희 인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끊임없이 실수와 잘못들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도 이해하겠니?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가운데는 자신의 부족과 허물은 보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남을 향해 판단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쑥덕거리는 자들이 많으니... 누구긴 누구냐? 바로 최용덕이 너 아니냐? 나는 나의 자녀들인 크리스챤들이 불신자들 앞에서 스스로 대단히 거룩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럽단다. 그건 내가 바라고 원했던 반응이 아니란다. 너희가 특별나고 대단해서 내 백성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않겠니? 왜들 그걸 모른는지 모르겠구나.
용덕이 너, [문화선교]가 어떻느니 사명이니 하며 한참이나 떠들었지? 그래, 네 생각엔 도대체 뭐가, 어떤 것이 기독교 문화이고 예수 문화인 것 같으냐? 음악팀을 만들고 연극팀을 만들어, 콘서트를 열고 집회를 하러 다니고 연주를 세련되게 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잘 하고, 압도적인 연출과 세상팀에 못지않은 조명과 기획, 홍보, 세련된 악보집, 음반 자켓 디자인, 예쁜 기독교 엽서와 성구가 새겨진 옷이나 악세서리... 그런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네가 그런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넌 껍데기밖에 모르는 녀석이다. 물론 내겐 나의 이름을 위해, 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할 많은 일꾼들(작곡.작사가, 가수, 연주인, 연극인, 영화인, 문학가, 기획가, 디자이너...)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껍데기를 원하는 게 아니란다. 그런 타이틀을 원하는 게 아니다. 예수의 노래를 부르고 예수를 연극하고 예수 영화를 만든다고 그게 곧 '예수문화'인 줄 아느냐? 용덕아! 내가 원하고 바라는 예수 문화는, 그 껍데기 속에 '예수의 정신과 삶'이 흐르고 있는 문화를 말한단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섬김'의 문화이다. '겸손'의 문화이다. '용서와 화해'의 문화이다. 번지르르한 껍데기가 아닌 게야.예수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무대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환호와 박수를 당연한 듯이 받는 기독교식 '스타'문화가 예수 문화인 줄 아느냐? 무슨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 처럼 걸맞는 대우나 대접을 요구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르면 '너 혼자 잘났니?'라며 서로 물고 뜯고 하는게 예수문화인 줄 알았니? 그게 아니란다. 예수문화란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문화'를 말하며, '어떻게 하면 내 이름, 우리 이름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고 높아질까 애쓰는 문화'를 말하는 게야. 나는 오늘 네가 '좀 두고 보아 줄 줄도 아는 마음'에 대해 가르쳐야 겠다고 작정했다. 그것은, 제 스스로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이며 앞에 나설 자격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존재인가를 깨닫는데서부터 시작된단다. (물론 이것이 끊임없는 자기분석, 자기비하, 자학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에 얘기해 주마) 자신의 죄와 허물과 부족함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이들에 대해 어떤 종류의 우월감도 가지지 않게 되지. 그들보다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자신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크리스챤이 되면, 진정한 크리스챤이 되면, 남들에 대해 쑥덕거리고 비난하는 짓을 그만두게 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내가 그 자신의 '실체'에 대해 낱낱이 가르쳐 주게 되거든. 죄악의 덩어리... 지금도 끊임없이 죄와 타협해 가고 죄를 범하는 연약한 존재... 이대로는 영원히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도무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하나님인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아 죽여서까지 건져내었다는 사실을...! 자신을 제대로 알고나면 더이상 다른 이들의 부족함과 허물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난도질 할 수 없게 되는 거... 어떠냐? 그게 상식이지 않니? 그래! '두고 볼 줄도 안다'라는 말은 체념이나 자포자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란 사실 또한 명심하렴. 네가 운동장과 예수마을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이제는 두고 볼 수도 있게 되었다'라고 고백한 건 환경 그 자체에 대해 '낸들 어쩌랴. 까짓거 내버려두자!'라는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 폐허는 폐허대로, 널려있는 쓰레기는 쓰레기대로, 우거져 엉망인 나무는 나무대로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나는 네가 그런 황폐해진 환경을 통해 오히려 교훈을 얻기를 원한다. 돌보지 않는 영혼은 얼마나 쉬 황폐해 지게 되며 또 보기 흉해 지는가를 말이다. 나는 네가 이 산골짜기 자연속에서 '너그러움(관용)', '보다 넓은 이해심', '자제력', 그리고 '온갖 허물과 부족함과 보기흉한 것들까지도 있는 그래도 인정해주고 기다려 주고 보아주는 진정한 따뜻한 마음'을 배워서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정말 원한단다. 이제는 부탁이다. 어찌 하든지 '좀 덜 똑똑해 지는 법'을 배우렴. 몸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제 혼자 부지런하고 제 혼자 잘난 척 하고, 너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요란을 떠는 것도, 그리고 "내 몸은 내가 압니다"라는 식으로, 만사는 밀어 붙이면 되게 되어있다는 사고방식으로 내가 세워둔 자연법칙과 나의 경고를 무시하는 방자한 행위도 이제는 좀 수그러뜨릴 때도 되지 않았니? 물론 게으름보다야 '부지런'이 백배 좋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곧 자신의 의(義)가 되면 그건 더 심각하고 나쁜 문제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부탁이다. 용덕아."바깥에 눈이 무척 많이 왔습니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였습니다. 제가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으이그 으이그 하며 꼴보기 싫어했던 모든 것이 흰 눈으로 감싸였습니다. 크나 큰 하나님의 은혜(눈)아래에선 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문득 어느 소녀가 보내온 편지가 생각납니다. "눈같은 사람이 있어요. 허물은 덮어주고, 아름다운 것은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김제시. 장윤경) 달리 표현하면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기 좋아하고 그것으로 대화거리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꼭 제 얘기를 하는 기분입니다.
엊그제, 월간 신앙잡지 [빛과 소금] 이번 달 호를 넘기다가 지난 달에 뵈었던 리차드.범브란트 목사님 기사가 실려 있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한국에 머무시는 동안 일행들과 함께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되셨는데 마침 옆자리에 있는 다른 한 외국인과 동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범브란트 목사님과 그 외국인 남자와의 대화입니다. 목사님: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외국인: "아,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크라이스트 처치에 살고 있는데, 지금은 부산에 에스컬레이트 기사로 와 있습니다" "오호!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라는 곳에 사신다구요? 교인이십니까?" "나는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내 아내는 영국 성공회 교인으로 태어났지만, 우리는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왜요?" "교회에는 위선자들이 꽉 찼기 때문입니다. 전 그런 사람들이 싫습니다" "그래요? 나는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좋던데요. 나도 위선자 중의 한 사람인데, 교회에 좋은 사람들만 있으면 내가 불편해서 좋겠습니까? 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서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하고 좋습니다."
"최용덕간사, 당신은 위선자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가는 거품을 물고 대들었을 게 뻔한 저는 범브란트 목사님께 케이.오(K.O) 어퍼컷을 한 방 후들겨 맞았습니다. -나도 위선자 중의 한 사람인데 교회에 가면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아 편하고 좋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독선을 무섭게 질타하는 한 노인의 겸허한 대답 한 마디. 그 한마디가 더욱 무섭게 다가오는 것은, 그 노인이 바로 온 세계인의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위대한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향한, 그리고 속한 교회와 공동체를 향한 그 너그러움과 겸허함은 오늘 제게 큰 충격을, 동시에 큰 위로와 격려와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앞으로 이 산골짜기에서 공부해야 할 과목들이 꽤 많을 것 같습니다. 이거 하나씩 하나씩 제대로 못 배워 나가면 맞아도 또 얼마나 맞아야 할까요? 그래도 하나님께 얻어 터지는 것은 저에게 감사제목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가 회초리를 때려가면서까지 훈련시키고 연단시켜야 할 만큼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목발없인 제대로 걸을 수도 없어 기우뚱거리면서도 히히덕 거리며 신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최용덕 간사의 목과 발목을 치신 주님을 찬양하라! (아니? 자기가 잘못해서 다쳐놓고는 그걸 주님께 뒤집어 씌우다니... 나쁜 녀석!) †
말을 아껴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교수에게 한 학생이 『교수님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교수는 『입을 적게 움직이고 머리를 많이 움직이게』라고 대답했다.자신의 일에 골몰 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일에 골몰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타인들의 흠만 보인다.그리고 타인들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다.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는 60년이 걸린다.지혜로운 사람은 말하기 전에 반드시 두번 생각한다.
모함과 용서 AD300년쯤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였던 안토니오의 제자 마카리우스는 성인의 칭송을 받았다. 그가 있던 수도원 근처 마을에서 한 여인이 부정한 임신사실이 드러나자 『아기의 아버지는 마카리우스』라고 거짓말을 했다. 마카리우스는 마을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배척받았으나 웃으며 침묵을 지켰고 노동으로 번 돈을 그 여인에게 주었다. 이런 사랑으로 결국 여인은 사실을 말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또 조용히 웃으며 사막의 동굴로 들어가 수도했다.
무덤을 파는 사람 겔 37:2; 눅 17:12; 마 8:2; 막 5:2; 16:5
32세에 모르카이 고도에 건너가 나병환자를 위해 의사, 교사, 간호사,목수, 관(관) 취급인, 장의사, 고아의 아버지 등 무엇이든 혼자서 떠맡아 봉사한 다미안은 심지어 무덤을 파는 인부도 되었다. 섬에 상륙한 이후 그가 49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 동안 그가 만든 관의수가 무려 1,200개나 되었다고 하니 그가 판 무덤 숫자도 아마 그 정도될 것이다. 1880년 봄 벨기에에 사는 형에게 보낸 그의 편지내용을 보면 그 주변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제가 여기에 온 이후 매년 190명 내지 200명 정도를 매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700명의 나환자가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특히 신자를 많이 매장하여 교회에는 빈자리가 많이 생겼으며 묘지에는 팔 수 있는 빈터를 겨우 찾아내 띵 정도입니다...형님, 빈사의 병자가 누워 있는 병원과 죽은 사람이 잠자는 묘지는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묵상 장소 입니다."
부부 싸움
부부가 드러내 놓고 싸움을 하는 방법과 서로 말을 안하고 침묵상태에 있는 것 중 어느 것이 건강한 싸움이 될까? 심리학자들의 진단에 의하면 부부사이에 생긴 문제로 인하여 침묵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코피가 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하는 싸움이 건강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싸움은 적어도 대화의 한 수단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음놓고 싸우라는 것은 아니다. 싸우기 전에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부부를 잇는 「침묵의 말」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중 한 토막.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긴 남편이 랍비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부부사이가 원만해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랍비는 『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람은 랍비의 충고대로 했고 한달후 다시 랍비를 찾아가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랍비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젠 부인이 말하지 않는 침묵의 「모든 말」까지도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불평 15년 동안 세 마디 말 거기에 감사가 빠져 있다면, 몹시 불행한 인생일 것입니다. ♥
소리치지 않는 가지장수 롬1:16,17; 고전9:16; 마25:26-30; 계14:6;
일본의 가쿠(가래국생) 목사는 어렸을 때 동네에서 유명한왈패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의 뒷처리에 바빴으나 별다른별은 내리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그를 불러 벌을 내렸다. 그것은 가지를 내다가 팔아 오라는 것이었다. 싸움질하는 그 기운으로 건너편동네에 가서 가지를 팔아오라는 것이었다. 싸움질엔자신이 있으나 물건을 파는 것은 경험도 없거니와 창피한 생각이 들어 우물 쭈물하는데 아버지의 호령이 떨어졌다. "빨리 가거라. 이것 모두 팔아오지 않으면 아침밥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을테니.' 그는 큰 가지 광주리를 걸머지고 거리로 나갔다.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부끄러워 숨이 막힐 정도였다. 걸음을 빨리하여 거리를 돌았으나 가지는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그는 길가에 쌓아둔 나뭇단 위에 앉아 곰곰히 생각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는 다리 위로 올라가 "가지요!"하고 소리쳤다. 그러고는냅다 도망쳤다. 그런데 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가지 장수 꼬마야!"하고 불렀다. 창피한 마음에 도망을 치다가 막다른 골목이 되어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꼬마야, 이거 얼마나?"하고 묻는데 얼마에 팔 것이지 생각도 안한 상태였다. "얼마에든지 가져가세요."하였더니 부인이 가지 광주리를 낚아채듯 하고는"그럴 수는 없지."하며 임의대로 가격을 정하여 광주리 속의가지를 모두 팔아주었다. 의기양양하여 집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알 수 없는 미소를 교환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복음 전하는 일을 주저하고 침묵한다. 인류를 위해 피 흘리신 그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보물을 당에 숨겨 놓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시끄러운 예배 때문에 사 30:15; 시 46:10; 77:6,12; 합 2:20
미국의 한 오순절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 너무 소음을 많이 일으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교회의 신도들이 그 도시의 소음 방지법에는 `소음이 크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법이 자신들의 헌법상에 규정된 종교적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법원의 올바른 판정을 호소 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해도 성격이나 기질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차이들이 있는가! 어떤 이들은 행복할 때 소리를 지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그 행복감에 젖는다. 요란스럽고 복잡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너희가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며",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하는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완전한 침묵 ?
어떤 우화가 있다. 어느 굴에 들어가면 절대적인 침묵을 요구하는데 만약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것이다. 하루는 바보 삼형제가 그 굴을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면서 그 중 제일 큰 형이 말했다. "너희들 이곳에서 말하면 죽는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둘째 형이 " 것 봐, 말하면 죽지," 그러면서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셋째가 자신있게 말합니다. " 나는 절대 말 안할 거야" 결국 셋째도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외계인」에 대한 성경의 답변 성경은 외계인에 대해 뭐라 말하는가.
침묵하고 있다. 지구 외 다른 행성에서의 생명체 존재에 대해 성경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첫째 날 지구를 창조하셨으며 지구를 무대로 살 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창조과학자들은 강조한다. 지구가 우주의 물리적 중심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지구에 있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기(시편 115편 16절)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행성의 생명체 존재는 희박할 것이라고 조심스런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먼 훗날 다른 행성에 사람보다 더 고등한 생명체 혹은 기타 생명체가 살고 있음이 밝혀진다손 치더라도 성경의 권위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침묵해 왔기 때문이다.
한편 UFO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성경 속에 UFO가 묘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봉자들은 △불이 번쩍 번쩍하여 단쇠 같이 나타나고(에스겔 1장4절∼28절)의 단쇠와 노아의 방주 등은 성경기자가 당시 나타난 UFO를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신학자들은 이 같은 성경구절을 UFO로 단정, 해석하는 것은 성경원문에 충실치 못한 해석이라며 실존했던 노아의 방주조차 UFO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봉자들이 얼마나 성경을 왜곡시키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지적한다.<坤>
욕설에 침묵하는 까닭 「우신예찬」을 지은 에라스무스는 교부들의 신앙을 탐구하고 성경번역에 몰두한 종교개혁시대의 인문주의자였다.
한번은 그가 지독한 욕설을 듣고 있을 때 친구가 『아니 어째서 저런 욕설을 듣고도 침묵을 지키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에라스무스는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바보가 현명함을 알리 없지. 그러니까 바보에게 욕설을 많이 받을수록 그만큼 현명하다는 증거지. 성내기는 커녕 명예라고 생각해야지』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곧 배우나, 입을 댜무는 것은 어지간해서 배우기 힘들다.
유태인은 의논이나 논쟁을 좋아하여 수다를 잘 떤다. 그래서 한 마디로 할 수 있는 것도 열 마디로 늘여서 하게된다. 그러므로 수다에 대한 많은 경구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태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이 가진 약점이다.
'지혜를 둘러싸는 담은 침묵이다'라는 말은 모두에게 교훈이 되는 세상을살아가는 원칙이다.
자신의 지나간 생을 돌이켜 볼 때 ,입을 잘못 놀리거나 말을 덧붙여 후회한 일은 있어도, 침묵하고 있었던 것을 후회한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듣는 것은 지혜를, 말하는 것은 후회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침묵도 일종의 언어이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면 어휘가 풍부해진다. 많은 어휘를 알더라도 침묵하는 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예' 또는 '아니오','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기본적인 말은 모르는 것과 같다.
종교의 침묵
지난달중순 AFP통신과 로이터통신, 영국의 인디펜던트지와 가디언지는 한 프랑스성직자의 동정을 실었다. 파리 대주교인 장-마리 루스티제추기경(69)이 [프랑스언어와 문화의 수호자]라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정회원이 됐다는 것이었다. 입회식은 파리 센강 서안 아카데미 프랑세즈본부에서 3월14일 목요일 오후 3시에 있었다.
인구의 83%가 가톨릭으로 분류되는 점을 고려,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40명정원중 한 자리를 가톨릭성직자에게 배려한다. 언론들은 새 회원의 신상명세를 전한다. 폴란드 유태인후손, 아우슈비츠가스실에서 사망한어머니, 프랑수아 미테랑전프랑스대통령의 장례미사집전, 와병설이 심심찮게 도는 요한 바오로2세의 후계자중 1명.
보통이라면 아마 이 정도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지식인사회에 새로운 불씨를 던지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입회식 다음날 르몽드신문에 실린 글때문이었다. 제목은 [가톨릭지성인들의 침묵].70년대이후 계속된 가톨릭지성인들의 침묵을 준엄하게 비판한 글이었다. [68년 프랑스학생운동의 가장 큰 피해자는 대학, 공산당, 그리고 교회였다. 루스티제는 가톨릭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발언권을 회복해야한다.]애정어린 질책이 담긴 이 비판은 가톨릭지성인들의 폭넓은 반향을 불렀다.
4월9일 르몽드지에는 반박하는 글3편이 한꺼번에 실렸다. 가톨릭 잡지편집인, 천문학자, 파리가톨릭대 철학과장 등이 쓴 것이다. [요즘엔종교란 이름으로 말하지 않을 뿐이다.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청취하고있다]는 요지였다.
이 논쟁에 시비를 가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네들의 공방은 한국종교의 치명적인 약점을 돌아보게 해준다. 종교적인 열정에서 한국인은 어느 민족보다 뒤지지 않을 것이다. 식민시대의 울분, 전쟁후의 빈곤, 독재정권의 억압을 겪으면서 이 열정은 기독교를 통해 불이 붙었다. 전래된 지 2백년이 조금 넘지만, 신-구교신자는 전체인구의 24.1%(94년 통계청발표)를 차지한다.
외적 장애가 많이 사라진 요즈음, 이 열정은 무언가 단단한 껍질 속에서 신음한다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다. 종교내부간, 종교와 세속, 종교와 지성, 종교와 종교간의 간격이 너무 넓다. 진지한 대화, 상호비판,열띤 논쟁, 그리고 시련을 거친 뒤 여명처럼 스며드는 관용과 상호이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신과 인간의 접촉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목숨 걸고 구각을 깨는 지성인들이 있었기에 보편적인 고등종교로 발전했다. 그중 가장 파격적인 예언자는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종교는 금기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금기의 외부 증상은 불통이다. 종교는 세상과 신자들을 향해 전하는 입은 가졌지만, 밖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 적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종교가 금기의 울타리속에서 자폐증에 빠지면, 지성은 울타리밖에서길을 잃고 난폭해진다. 양자간에는 보이지 않는 손가락질과 냉소가 오갈 뿐이다.
챔피언의 자기 증명
헤비급 챔피언 [죠.루이스]가 군에 입대했을 때 흑인을 몹시 싫어하는 백인 상사가 죠.루이스를 보자 조롱하며 이렇게 빈정댔다. "그래, 네가 챔피언이란 말이지? 깜둥이 주제에?.... 우리 한번 뛰어 볼까? 넌 제대로 펀치도 휘두르지 못할 거야.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이길 걸! 어디 네가 챔피언이란 걸 증명해 보시지. 날 다운시켜 보란 말야. 이 깜둥아!" 루이스는 화가 치밀어 상사의 멱살을 잡아 채고는 한방 내 갈겼다.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루이스는 나가 떨어진 상사의 얼굴을 흔들며 고함을 쳤다. "이봐 상사! 내가 링에서 한번 넉다운 시키는데 2만달러를 받는단 말이야. 내가 공짜로 다운시키는 걸 볼려고 그래?" 우리는 때로 그 백인상사와도 같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신이신지 알면서도 조롱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란 말이요. 순식간에 나를 때려눕혀 보란 말이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런 '소원'을 들어 주셨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하고 조롱하며 빈정대는 짓만은 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즉시 그 응답으로 벼락이라도 내려 우리를 짓이겨 버리지 않으시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가? 그건 하나님이 그럴 만한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자하고 철모르는 우리가 불쌍해서이다. 그분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는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해서 그렇게 기고만장하지 말라. †
친구 정의 침묵 고통 '런던 타임즈'가 친구하고 하는 말의 정의를 현상모집해서 여기에 많은사람들이 참가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 셋을 뽑아서 상을 주었다고 한다. 친구란 무엇인가? - 그 첫번째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그 때에 찾아와주는 사람이다." 두번째는 "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에 그 말없는 말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세 번째는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쁜 마음이 배가되고 더해지며 내가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친구이다."
침묵
침묵은 또 하나의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침묵하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때때로 배에서 울려오는 무적(霧笛)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그 무적 소리를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듣게 된다. 그 이유는 무적 소리가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만 울리기 때문이 아니라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만 조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소음 가은데서 산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고요히 침묵속에 기도하는 그 시간에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이 때에 침묵의 기도가 아니고는 놓치게 되었을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분간할 수 있게 된다. 젖뗀 아이는 어머니의 품에서 만족한 휴식을 취할 때에어머니에게 말없는 찬양을 돌린다. 다윗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하였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다"(시13:12). 우리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우리의 사랑하는 하나님을 숙고하도록 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고요한 가운데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것을 발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최상의 선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서 쉼을 얻고 고요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를 그 자녀로 삼아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말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침묵으로 인한 결과
법률용어에는 '묵비권'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소송 절차 중에 피고나 피의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고 침묵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묵비권은 피고나 피의자에게 유리하게 제정되어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전에 피고를 변호해야 할 변호사가 침묵을 지킴으로 재판에서 진 사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변호사 사무엘 호아씨는 한 피고인을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맡은 사건에 대하여 설명할 때 그는 배심원들에게 "피고는 무죄인 것이 너무나 명백합니다. 이런 사건을 가지고 변론을 하고 증거를 제시한다면 배심원들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씨름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변론해야 할 때에도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반면 검사는 자신의 논거를 증명하기 위하여 열심히 설명하였습니다. 배심원들은 심사숙고 한 후에 유죄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까?"라고 그는 물었습니다. 배심원
장은 유죄 판결을 내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만약 이 사건에 대하여 무죄를 증명할 뚜렷한 증거가 있었다면 당신은 그 증거를 내어 놓았을 것이라는 점에 우리의 뜻이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런 증거도 보이지 않았고 더군다나 아무런 변론도 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당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침묵 때문에 이 사건은 소송에서 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주 침묵을 지킴으로써 주님을 증거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복음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려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구원'이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결정해 버릴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웃이나 동료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할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주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었다면, 당신은 무엇인가를 말했을 것이라는 점에 우리의 뜻이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런 말도, 증거도 내놓지 않았기에 우리는 주님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에게도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침묵은 금 감리교의 위대한 전도자 죤 웨슬레는 두 여인에 대한 관찰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한 여인은 열정적으로 손짓 발짓 다해 가며 거칠게 지껄여 댔다. 그러는 동안 다른 여인은 한 마디도 없이 평온하게 그 옆에 서 있었다. 결국에는 첫번째 여인은 침묵을 지키는 여인 때문에 지치게 되어 고함을 질렀다. "말 좀 해요. 그래야 내가 말을 만들어 할게 아니요"
웨슬레는 이 장면으로 "침묵은 욕설에 대한 최선의 답변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침묵의 기도 깊은 침묵에로 이끄는 기도는 우선 수락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향해 마음(손)을 열고 서 있는 사람이다. 그의 주위의 자연,만나는 사람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세상이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 비밀이 자기에게 밝혀지기를 바라며 그는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내어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신을 내어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계속 두드리신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성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정된 존재이며 종속되어 있고 약하며 죄인이라고 하는 우리의 고백이 요청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이것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또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도 않음을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아직 이루지 못했고 이것은 현세에서 이룰 수도 없음을 항구하게 마음을 열고 새 생명을 주는 은총을 계속 기다리고 있음을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침묵의 석달 열흘 살전 4:4; 딛 1:7 신석구목사는 고집이 세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종종 농담 삼아 이런 말을했다. "내 고집이 얼마나 세는가 하면 부인과 싸워 냉전이 시작되면 석달 열흘동안 말을 하지 않고 지내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고집을 꺾으시려고 나보다 더 고집이 센 아내를 주셔서 목사인 내고집을 꺾으셨다. 왜냐하면 석 달 열흘 후에 내가 먼저 아내에게 말을 붙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싸웠다고 평생 말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침묵의 설교 중세의 어떤 유명한 수도사가 아침 예배를 마치고 말하기를 오늘 저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날저녁에 이 설교를 들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들었다.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졌다. 이 늙은 수도사는 촛불을 들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상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발에 찍힌 못자 국에 그 촛불을 비추어 보였다. 그 다음은 옆구리, 손의 순서로 그는 촛불을 비추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는 마지막으로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의 이마에 불빛을 비추었다. 이것이 그의 설교의 전부이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신도들은 말없이 침묵 가운데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보여준 하나님의 사람의 깊이에 눈물이 앞 을 가렸던 것이다.
침묵의 소리 경청 결혼생활에 큰 문제가 생긴 사람이 스승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게]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한달후 이 사람은 자신의 아내가 하는 모든말에 귀를 기울일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승이 이번에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집에 가서 부인이 말하고 있지 않은 모든 말에 귀를 기울여 보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또 침묵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갈등과 분열이 생긱는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모든 비극이 야기된다.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잠 2:2)
침묵의 신비 어떤 수도사에게 여인이 찾아와 『남편과의 다툼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수도사는 물이 담긴 병을 하나 주면서 『남편과 다투기 직전 이물 한 모금을 입 안에 물고 삼키지 말라』라고 말했다.여인은 남편이 시비를 걸 때마다 그렇게 했다.그러자 가정이 조용해지고 부부가 화목하게 됐다. 후에 여인이 수도사를 찾아 『신기한 물』이라고 감탄하자 수도사가 말했다. 『그 물은 평범한 물입니다.다만 침묵이 신비로울 뿐입니다』
침묵의 언어 어떤 분들이 수양을 하는 방법으로서 한 시간 이상 나무와 대화하는 훈련을 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나무 앞에서 침묵하며 동산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표현되지 않은 언어, 즉인간이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원색의 언어를 날마다 새롭게 들을수 있고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상이고 이것이 영감이고 이것이 진짜 시인입니다. 그 말은 구태여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은 시로 표현할 수 조차도 없는 줄로 압니다. 그 말은 일종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누구나 종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연에는 엄청난 침묵의 언어가 있습니다. 생명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신실한 것입니다.
침묵(沈默)
1.침묵의 유형
어떤 침묵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때로운 강하게 요청되기도 한다. 자기 성찰을 위한 침묵이라든지, 영혼에 평정을 얻기위한 침묵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해로운 침묵도 있다. 이것은 문제나 갈등이 생겼을 때 상대방을 골탕먹이기 위해 혹은 자존심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 경우도 있다. 침묵은 상대방의 분노를 진정시키기도 하고 상대방을 분노하게도 한다. 혹은 싸우는 것 보다 침묵이 나으리라는 생각때문에 침묵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서 도피하기 위한 침묵도 있다. 그러나 사실 상 이런 유형의 침묵들은 문제를 악화시키기 쉬울 뿐 문제의 해결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늘 날 현대인들은 침묵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든지 간에 대화를 시도한다. 이런 대화는 어쩌면 결국은 완전히 침묵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 일 수도 있다. 인간이 침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도 침묵하지 못한다. 잠시는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루에 한 시간 시 49:3; 104:34; 119:97; 전 12:9; 수 1:8
덴마크의 농부가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며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기 아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줄 것을 요구했는데,그것은아들이 그 집의 가장 좋은 방에서 매일 한 시간 동안 홀로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그렇게 했으며, 곧 그 일은 하나의 모범이 되어 그 지역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버지의 명령에는아들의 영혼에 유익한 모든 것이 고려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글라스 스티어)
혀 밑에 든 도끼 "혀 밑에 도끼가 있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옛날에 참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빨래를 삶고 있었고. 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갔고, 큰 아이와 작은 동생은 방에서 놀고 있겄다. 동생이 자꾸 우니까 듣기 싫었던 어머니는 부엌에서 외쳤다. "저놈이 왜 저리 울까! 가위로 잠지를 뚝따놓을까보다" 얼마후에 정말로 아이가 죽는 소리가 나서 어머니는 깜짝 놀라 방에 들어가 보니 아! 큰 아이가 가위로 동생 잠지를 진짜로 잘라버렸던 것이다. 앞이 캄캄한 어머니는 그만 옆에 있던 다듬이 방망이로 큰 아들을 때렸다. 너무 심하게 때린 나머지 큰 아들도 죽었다. 두 아들을 잃는 비극에 놀라 어머니는 미쳐서 목매달아 죽고 말았다. 얼마후, 산에서 나무를 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너무나 엄청난 비극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만 낫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자 부엌에서는 불이 나서는 집이 다 타버리고 말았다. 부모가 무심코 한 말이 온 가족을 죽게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혀밑에 도끼 한 자루가 들어있다"라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관리집사님의 침묵의 설교
어느 관리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나도 설교 한번 시켜주세요 그 때 목사님은 그러지요 다음 남전도회 헌신 예배때 한번 설교하시요 그렇게 알고 준비하세요 관리집사님은 성경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려고 하면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알지 못하고 설교준비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은 돌아왔는데 오후 에배 남전도회 헌신 에배입니다.
오늘 저녁에 강사는 우리교회 관리집사님이십니다. 많이들 오셔서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녁 에배에 관리집사님이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회장이 소개합니다. 오늘 밤에 많은 은혜를 받으십시요 하고 집사님을 강단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잡사님께서 무엇이라고 설교를 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분동안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20분 30분 40분 50분 1시간 만에야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고 그만 울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밑에서 듣던 모든 성도들이 울기를 시작하는데 청중들은 생각하기를 주님의 은혜를 얼마나 받았으면 주님은 나위하여 십자가 지고 돌라가셨다는 말 한 마디하기 그렇게 어려워서 자헐게 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에수를 수 십년 믿어도 십자가에 대하여 저렇게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고 모두가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주님이 함께 하셔야만 은헤가 되는 것입니다. 말잘한다고 설교 잘하는 거이 아닙니다. 음혜를 끼치는 설교가 진정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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