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조선에서 신부님께 두 번째 서한을 씁니다.
1850년 5월 10일에 신부纛� 보내 주신 서한을 금년 2월에 받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제 서한을 신부님께서 받으시기를 간절히 희망했었는데,
이제 신부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배달부들이 매달 신부님들께 대한 소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날이 언제쯤이나 올까요?
모든 분들이 지금 편안히 지내고 계시는지요? 신부님들이 무사하신지 궁금합니다.
가련한 우리 조선 포교지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인자로 그럭저럭 잘 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박해에 들볶이지는 아니하고 그런대로 안정을 유지하며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금년에 추천장을 가지지 않은 사람 편에 서한을 보내 드리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이 되겠습니다마는,
한마디도 없이 잠자코 있지는 못하겠고 신부님께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금년에는 지난해보다 일찍 10월부터 공소 순회를 시작하여 저의 관할 구역 전체의 순회를
8개월 안에 끝마쳤습니다.
공소 순회를 하려고 길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마터면
공소 순회 여행을 중단할 뻔하였습니다.
어떤 여관집의 주인 내외가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자기 남편을 골탕먹이려는 증오심에서 그 여관에
12명의 서양 사람들이 유숙하였다고 떠벌렸습니다.
즉시 그 여인과 남편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서양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비밀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혹독한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가 전국적으로 퍼졌고 그래서 저는
공소 순회를 일단 중단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얼마 후 그 소문은 가라앉았고,
그래서 저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무사히 공소 순회를 마쳤습니다.
작년에는 사탄이 너무나 큰 소란을 일으켜서 저는 부득이 교우촌을 두 군데나
순회하지 못하였는데, 금년에는 사탄이 저에게 마주쳐 오지 않았습니다.
다블뤼 신부님은 언제나 신병을 앓아서 여러 교우촌을 순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나 약한 어깨에 힘에 겨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공소를 급하게 순회하느라고 통상적 성무를 너무 서둘러 집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강론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제가 담당하는 그러한 공소 즉 교우촌이 자그만치 127개나 되고,
그러한 촌락에서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 됩니다.
한 공소에 고해자가 40명 내지 50명이 있어도 그들 모든 신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집전해 주어야 합니다.
반면에 고해자가 2명이나 3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하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하여야 하고,
공소 순회가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교우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곳에 단지 두 집이 있었는데,
한 집은 가족 중에 일부만 신자였고, 한 집은 가족 전부가 외교인들이었습니다.
남자는 얼마든지 집을 떠나 멀리 가서 성사를 받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양반 신분이어서 집밖에 나가는 것이 불가하기 때문에
이 두 여교우들은 성사를 받은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가야만 했으나 그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한 가지 계책을 궁리해 냈습니다.
외교인 집의 남편에게 그럴듯하게 어떤 사업을 제안하고서 얼마 동안 외출을 시켰습니다.
그 외교인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저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어 제가 그 여인들에게 갔습니다.
제가 도착하자 신자들이 손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그 외교인 집의
여자들에게 하루 동안만 집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비어 있는 그 외교인 집을 임시 공소집으로 차리고
밤중에 외교인들이 잠든 동안에 신자들이 모여 성사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할 일을 꾸미는 때에는 악의에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하여
비신자들에게 거짓말로 폐를 끼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즉시 천주교를 비난하거나 그 자리에서 순교로 끌고 갈 위협을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전혀 내색을 아니하고 삽니다.
만일 신자임이 발각되면 그 즉시 모두 감옥에 끌려갑니다.
그러기에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비신자에게 직접 교리를 설교함으로써 전교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사제들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신자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비신자들은 천주교의 진리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을 듣거나
또는 신자가 당한 어떤 환난 등의 사건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감동을 받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신앙을 가지게 되며,
신자들 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조씨라는 매우 지체 높은 양반이 입교한 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나,
그때에는 천주교를 한낱 지극히 사악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종교로만 알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을에서 멀지 않은 멍에목이라는 한 산골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양반이 신자들이 사는 근처 골짜기에 살고 싶어서 집을 지으려고 그 산에 왔습니다.
그때 마침 우연히 멍에목 신자 마을이 몽땅 화재로 타버리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조씨는 즉시 그 마을에 가서 화재를 당한 신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씨가 보기에 신자들은 조금도 근심하거나 마음에 동요하는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서도 신자들이 평온한 낯으로 태연하게 있는 것을 본 조씨는
매우 이상히 여기며 탄복하였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왜 그러한지 이유가 몹시 궁금하여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물었더니 신자들은
(양반이 질문한 까닭에 평민이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여러 가지 말로 대답은 하였으나,
신앙만큼은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조씨는 도무지 납득이 될 수가 없어서 (다시 꼬치꼬치 캐어물었습니다)
그때서야 신자들은 어쩔 수 없이 실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항상 의탁하며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안배를 칭송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조씨는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고 만족하여 곧 천주교를 믿기로 결심하고,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우며 천주교회 법규를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넘어야 할 태산이 너무나 험준했고,
깨뜨려야 할 장벽이 너무나 두터웠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위패를 많이 모시고 있었고 친척들과 친지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최후의 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선 온 집안 식구들은 이런 핑계 저런 구실을 대어 여러 곳에 분산시키고 나서
자기는 산골에 지은 그 집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몇몇 신자들을 데리고 자기가 전에 살던 집에 갔습니다.
또 외교인들이 보기에 우연히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믿게끔 꾸미고
그 집과 우상들을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씨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 사회 생활을 떠나
친척들과 친구들과의 교재를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나 진배없게 되었으니,
여러분들도 모두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 주시오”하고 선언했습니다.
제가 그 교우촌에 가서 조씨에게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나 개종하여
주님의 사도가 되고,
특히 이방인들을 가르친 뛰어난 스승이 되셨습니다.
당신도 온 집안과 친지들 중에 가능한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십시오”
하고 책임지웠습니다.
조씨에게 동생이 있었는데,
세상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학자는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갈 희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조씨는 동생을 신앙의 첫 번째 동참자로 만들고 싶어서 그를 신자들에게 인도하여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동생은 자기의 세속적 지식만을 과신하고서,
진정한 지혜를 듣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또 비록 진리를 인정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갖 오류와 기만의 궤변으로 천주교 교리를 뒤엎으려고 기를 썼고,
오로지 자기 형 바오로를 배교시킬 일에만 골몰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법도에 따라 동생들은 맏형을 아버지 대신으로 공경하여야 합니다.
바오로는 형이기 때문에 동생은 형에게 난폭한 행동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동생은 자리에 누운 후 “나는 형님이 천주교를 배교하겠다는 맹세를 하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습니다”하고 굶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식한 지 8일이 지나자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 바오로가 다급히 달려가서 동생에게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왜 이다지도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 내가 멍에목에 가지 않기를 네가 원하는 것이냐?
그럼 내가 그리로 안갈 터이니 안심하여라.
어서 일어나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 목숨을 회복하여라”고 타일렀습니다.
사악한 동생은 되살아나기는 했으나,
자기의 계략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서 자기 형을 입교시킨
신자들한테로 분노를 돌렸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신자들에게 극단적인 악으로 엄포를 놓았습니다.
“나는 포졸들을 불러 너희를 몽땅 잡아서 결박하여 감옥으로 끌고 가도록 고발하겠다”
고 협박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애써 시작하였던 농사일을 팽개쳐 버리고 공소집을 헐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참혹한 궁핍 속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변변치 않은 사소한 원인이 큰 혼란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큰 걱정거리가 생겨납니다.
비신자들은 신자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을 더 잘 소상히 듣고 알며
신자들을 더욱 쉽게 의심합니다.
그들은 모함과 악의에 찬 중상의 소문만 들을 뿐이고 진실은 한마디도 듣지 못합니다.
비신자들 사이에 돌아가는 이야기들은 신자들은
체포, 투옥, 형벌, 상형 등 처참한 이야기뿐입니다.
또는 (부유하였던) 신자들의 집안이 몰락하여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산다는 것,
사람이 살 수 없는 산 속이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비참하고 치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모든 공적인 사회 생활에서 격리되고 백성으로서의 제사와 가정 생활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잊혀져 산다는 것 등등입니다.
비신자들 사이에 이러한 험담은 날이 갈수록 더 커져서 증오와 멸시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어떤 신자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알려지면 주변 사람들 전체가
온갖 방법으로 신자들을 괴롭히려 달려듭니다.
신자들을 불경스럽고 불충한 자들로 여겨 그들한테서 전염되지 않으려고 기를 씁니다.
“신자들은 부모와 친척도 몰라본다.
제사와 위패도 배척한다.
금수만도 못하다. 삼강오륜에서 벗어난 놈들이다”
이렇게 신자들을 욕하고 증오합니다.
이런 공적 박해와 위험 외에도 흉년이 닥치면 신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해집니다.
우리 형제들의 처참한 상태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1839년 박해 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기아와 추위 때문에 죽었는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그 재난의 여파와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이 겪은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천주교 계명의 준수를 저지하고 싶은
고민으로 마음이 갈갈이 찢어집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라고는 오직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부모의 초상부터 탈상까지 입어야 되는 상복의 풍속과
한글이 전교 활동과 교리 공부에 큰 도움을 줍니다.
첫째, 상복이 전교 활동을 도와주는 풍속입니다.
부모와 상을 당하면 자식들은 3년 동안 대죄인으로 자처하고,
최대한으로 죄를 뉘우치는 보속 생활을 합니다.
어느 장소에서든지 상복만 입어야 합니다.
장례식과 제사 외에는 일체 다른 공식적인 예식이나 회합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노래와 춤이나 잔치 등 오락을 즐길 수 없습니다.
방갓을 머리에서부터 어깨까지 덮어써 땅만 내려다볼 수 있게 하고,
또 얼굴 가리개로 입에서부터 코와 눈까지 얼굴 전체를 전부 가리고 다닙니다.
이러한 풍속은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을 위해 발명된 도구라 할 만합니다.
만일 이러한 풍속이 없었더라면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이 전교하기 위해
한발짝도 외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조선에 머물러 있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둘째,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 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10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과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 조정은 신자들에 대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정의 내부 사정과 당파 싸움에 휩쓸려 다른 사안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중국으로 간단없이 사신을 계속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파견한 사신은 중국 황제께 현재의 조선 임금의 누명을 벗겨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려 보낸 사신입니다.
현재의 임금이 천주교 신자 집안 출신이고 역적의 후손이라는 누명을 벗겨 달라는 것입니다.
현재 조선 왕국을 통치하고 있는 임금은 왕족 출신이기는 하지만 매우
불명예스러운 가문에서 태어난 열 아홉 살 된 청년입니다.
1801년 신유년에 전국적인 대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때 천주교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자기들보다 더 지혜롭고 임금님의 총애를 더 받으며,
나날이 더욱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몇몇 유력한 천주교 신자들을 쉽게
파멸시키기 위하여 전혀 터무니없이 날조된 중상모략을 꾸며냈습니다.
천주교의 원수들은 임금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합법적인 금상을 폐위하고 이인이라는 왕족을
새 임금님으로 옹립하여 한다”고 모함하였습니다.
이인은 그 당시 임금(순조)의 형이고 지금 임금(철종)의 조부입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고,
다만 그의 아내(송마리아)와 며느리(신마리아)가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인이라는 사람이 천주교 신자들의 두목이고
반역자들의 주동자라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으며,
그의 아내와 며느리도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전체가 강화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그로부터 그 가족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천대와 터무니없는 중상으로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아들들은 사형을 당하였고, 어떤 자손들은 극단적인 비참 속에 내버려졌습니다.
현재의 임금은 사냥꾼으로 불리었고 자기 친척집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하였고,
인정머리가 털끝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전 임금이 승하함에 따라 군인들 한패거리가 강화도에 몰려가서
그를 현재의 임금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즉, 조선 왕조의 창업이래 5백년 역사상 이와 비슷한 사례가 왕가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족의 공개된 수치와 치욕을 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권위로 그러한 불명예를 척결하고,
조선 임금에게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사신을 중국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 청원서에는 천주교를 허위로 가득 차고 정도와 도의를 전복하려는
극악한 이론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중국 새 왕조(청나라)의 황제는 조선 왕족의 내부 사정을 알 길이 없었으나,
조선 임금의 청원을 윤허하여 황제의 권위로 조선 임금의 모든 불명예를 척결하고
그에게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신부님, 동양의 현인들이라는 자들이 장난치는 꼴 좀 보십시오.
금년에 제가 집행한 성무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사규 고해자가 3,620명이고,
영성체가 2,753명이며,
재고해자가 235명이고,
재영성체자가 220명입니다.
그리고 어른 영세자가 197명이고,
예비자로 등록된 이가 229명이며,
아기 영세자가 54명입니다.
또한 대세받은 아기 293명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고,
대세받은 어른 28명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죽을 위험 중에 있는 비신자 아기 255명에게 대세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중국인들이 누리는 만큼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집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있으면서도 이 진리를 추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여
자기들의 가엾은 처지에서 한숨 짓고 있는 지극히 가련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에 관한 한 가지 실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상도 안강이라는 고을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오씨라는 관원이 있었습니다.
그의 동생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안드레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씨는 동생이 영세한 것을 알고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단숨에 한 손에 칼을 잡고 한 손으로는 동생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당장 목을 자르겠다고 위협하면서 천주교를 배교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목을 내밀고 어서 치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생의 굳센 태도에 흉악한 형이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 잔인한 오씨의 아내는 이런 용감한 힘을 주는 천주교 진리에 탄복하여
자기도 전심 전력으로 천주교를 믿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키고 신자 생활을 실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전혀 불가능하였고, 그렇다고 하여 그 집을 빠져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노심 초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틀림없이 기뻐 용약하면서
그리스도의 양 무리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싹 말라버린 우리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낙비를 퍼부어 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목이 타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해주소서.
조선 정부가 세실 함장의 편지에 대한 회답을 라피에르 함장에게 보낸 것을
신부님들에게 소개합니다.
이것이 원문과 똑같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조정이 다음과 같이 발표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난해(1846), 조선 왕국의 영토인 외연도에서 어떤 주민이 외국 함선에서
건네준 편지라고 말하면서 우리 조정에 전해 왔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편지를 펼쳐 보니까
당신들 왕국의 세실 함장이 우리 대신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왕국의 고귀한 인물인 앵베르, 샤스탕, 모방 등 어른 세 분이 불행하게도
당신들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그분들을 죽였는지를 묻고자 하여 온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마 당신 나라의 법률이 외국인의 무단 입국을 금하는데,
그 세 분들이 이 법률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만약에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조선에 입국하는 일이 있으면,
당신들은 감히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각기 그들을 자기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나라 사람 그 세 분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처럼 대우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분들이 살인이나 방화나 그와 비슷한 다른 죄악을 범했다면
당신들이 그분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죄가 없었는데 당신들이 부당하게 사형에 처하였으니,
프랑스 국가에 대하여 중대한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세실 함장이 보내왔는데)
이 편지에 대하여 우리 조선 정부는 다음과 같이 분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기해년(1839)에, 어떤 외국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느 때에 조선에 몰래 잠입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며,
밤에만 나다니고 낮에는 집안에서 꼼짝 않고 지내며,
얼굴을 변장하고 흔적을 감추면서 국가 반역자들과 불충한 자들과
흉악무도한 불량배들과 사귀고 어울려 다니므로 우리가 체포하여 문초하였습니다.
그들이 관가에 끌려와서 심문을 받을 때 자기들의 이름이 한 사람은 나(羅) 베드로이고,
또 한 사람은 정(鄭) 야고보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당신들의 함장의 편지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혹시 이 사람들입니까?
심문을 받을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프랑스인들이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들 왕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자백했더라도 우리는 아무도 당신들 나라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으니 우리가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 즉 우리가 어찌 비밀 입국을 금하는 우리 법을 적용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그들이 옷도 갈아입고 이름도 바꾸는 등 변장하면서 흉악한 무리와 어울려 다닌
행동은 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이 악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연히 파선을 당하여 우리 왕국에 상륙하게 된 자들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왕국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가끔 외국인들이 풍랑으로 파선하여
우리 해안에 표류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들이 낯선 사람이라도 죄가 없고 긴급한 사정이 있으면
우리는 그들을 구조해 주고 입히고 먹이고 보호하며,
또 할 수 있으면 각기 자기 나라로 돌려보냅니다.
이것이 우리 왕국의 법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말하는 저 세 사람들도 파선을 당해서 우리 왕국에 상륙했다면
왜 우리가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과 달리 대우하였겠습니까?
또 당신들 편지에 보면 왜 우리가 그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죽였는지 문책하고
또 당신들 나라에 중대한 모욕을 끼쳤다고 항의하는데,
그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의외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서양과 조선이 수만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모르고,
편지로나 차편으로나 내왕과 상종이 없습니다.
그런즉 무슨 이유로 원수가 될 짓을 할 것이며,
또 무슨 까닭으로 당신들에게 모욕을 끼치겠습니까?
헤아려 보십시오.
만일 우리 나라 사람이 당신 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변장을 하고 악행을 하면
당신들은 그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겠습니까?
만일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당신들 나라 사람들처럼
우리 법을 거슬러 범행하였다면,
그들도 우리 법에 따라 처벌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어떤 중국인이 변복하고 몰래 우리 왕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법대로 잡아서 사형에 처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항의도 없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 국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살인자나
방화자들의 행동보다도 더 큰 죄가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국적을 모르므로 극형에 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정은 극히 분명하여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에 보낸 당신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으러 당신들이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편지는 필요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요식 절차 없이 전달된 것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대한 답장을 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개 도의 관찰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왕국은 중국 황제에게 종속되어 있으므로 다른 왕국에 관한 문제는
중국 황제께 품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의 동의 없이 당신들이 어찌 회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이 당신들에게 대답하더라도 그 내용은 이상에 말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당신 나라 상관에게 보고하십시오”
1847년에 페레올 주교님께서 1839년 박해 때에 순교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작은 책 한 권을 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 책은 신자들이,
특히 앵베르 주교님의 명을 받은 현석문 가롤로가 수집한 것을 벨린 명의의 주교님
(페레올 주교님)이 (프랑스어로) 저술한 것입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현석문에게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확히 수집하도록 특별히 분부하신 다음
당신도 순교하였습니다.
이 책은 여러 신자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수집하여
그 중에 진실로 여겨지는 것만 추려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대체로 목격자들이나 증인들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작은 책의 끝쯤에 가서는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이 간략하게 기록되거나
어떤 것은 아예 몽땅 빠졌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완전한 역사를 위해서나 신자들의 교화를 위하여
재미있고 중요한 것이 적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밖의 것에 대하여는 아직 모든 증인들을 통하여 조사하거나
더 정확히 심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의 자비로 오랫동안 서원으로 맹세했던 대로
저의 동료들에게 대하여 더욱 주의 깊게 고찰하고,
저의 조상들의 순교 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위에 언급한 순교록에 보면 저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매우 정신차려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순교록을 중국에서 읽었을 때,
조국에 돌아가면 신부님들에게 그 보고서에 관하여 더 정확히 써드려야겠다고 벼른 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온 저는 우선 명확한 개념을 정립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성무를 집행하느라고 항상 바빠서 조용한 짬을 낼 수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에게 아무 것도 써보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금년에는 하느님의 허락하심으로 다행히 연례 공소 순회를 일찍 마쳐서
잠시 동안 휴가를 얻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렵니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러 증인들의 말을 토대로 하여 정확히 기록하려 합니다.
저의 형제들과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제공한 증언들도 포함하여,
순교자들과 함께 살았던 증인들, 또한 순교자들과 함께 감옥에서나 형벌을 당할 때
함께 했던 동료들로부터 들은 증언들,
그리고 순교자들이 순교하기 전에 살았던 생활에 관한 증언들을 가능한 대로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충실하게 서술하도록 제 능력껏 힘쓸 작정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이고 저의 어머니는 이성례 마리아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고결하고 부유한 신자 부모한테서 출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최인주)는 첫 번째 박해(1791년의 신해박해) 때
많은 고초를 받은 후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순박함과 신심이 뛰어났습니다.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미리 알아서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자세도 유별났습니다.
자기 집 종들에게 자기들을 영감님이나 마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세 아들에게 세 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서로 무엇을 줄 때 거저 주어라.
보증을 서거나 혼인 중매를 절대로 서지 말아라.
이웃들과는 항상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이었습니다.
1801년 박해와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의 순교 후,
최 프란치스코의 집안은 재물과 비신자 친척들과의 상종으로 말미암아
점차 천주교 계율 준수의 열심이 식어 갔고 쾌락과 악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천주교 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가족의 신앙심이 냉담해진 상태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부모들과 형제들을 권고하여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고향 마을을 떠나서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자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자 혼자 집을 떠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집에는 모친과 세 형제와 네 누이들과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긴 편지를 내보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형제들이 그 편지를 읽자 온 집안 식구가 대성통곡하였고,
대책을 세울 수가 없어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프란치스코를 찾아 나서서 그를 데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족 전체가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모두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가족 전부가 왕도(서울)로 이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3년이 지나자 이웃 사람들한테
신자집이라는 것이 탄로되어 관가에 붙잡혀 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친지 중에 세력 있는 고관들이 프란치스코 집안을 외교인들의 술책으로부터 구출하려고
세도와 압력으로 그들의 주동자를 중하게 처벌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악을 악으로 갚거나 박해자들을 폭력으로 격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합치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여
친지의 도움을 사양하고 산 속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 다니면서
그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돌자갈 밭을 개간하여 연명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서원으로 나날이 더욱 열심하여졌습니다.
그는 비록 한문 교육을 별로 받은 바가 없었으나,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열변과 달변으로 천주교 진리를 강론하거나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강론을 들으러 왔고,
매우 까다롭게 꼬치꼬치 따지는 비신자들까지도 그의 변론에 설복되어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밭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일할 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를 할 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심신 사정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가꾸는 일이나,
세속적인 평판이나,
세속적 관심이나,
현세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을 보러 갈 때에는 물건 중에서 제일 나쁜 것이나 흠있는 것을 골라서 사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해 추수할 무렵,
농작물에 굉장한 폭우가 쏟아져서 곡식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그러한 재난을 당하여 눈물로 탄식하며 실망하고 있을 때에
프란치스코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을 보여 주었고,
오히려 평소보다 더 명랑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기는 교우들에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절망에 빠져 있고 이처럼 비탄에 잠겨 있습니까?
모든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일이 다 하느님의 안배대로 되는 것임을 왜 믿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탓과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면 모르거니와
하느님의 섭리로 추수를 망친 것인데 슬퍼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을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으며,
아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매일 규칙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아니하였고,
아침 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안양의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서울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가 유기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인근 지방에 살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피신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박해와 기근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지쳐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습하여 매장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자기 마을에서 신자들을 권고하여 의연금을 거두고,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찾아 매장하였으며,
또한 불쌍한 교우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자기 마을 신자들에게
순교를 준비시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날마다 자기 마을의 신자들을 모아 놓고 열성적인 말로 격려하면서
용감히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거룩한 의무에 전심하고 있던 어느 날,
아직 날이 밝기 훨씬 전에 포졸들이 문밖에서 와서 주인을 찾으므로
프란치스코가 그들 앞으로 마중나가며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포졸들은 “서울서 왔소”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어째서 이리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오래 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으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잠시 좀 쉬시고 새벽에 식사를 해서 기운도 돋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질서 정연하게 떠나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말을 들은 포졸들은 감탄하여
“이 사람과 이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다.
이런 사람들이 달아날 염려는 조금도 없다.
우리는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겠다”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포졸들은 교우들을 묶지 않고 풀어놓은 채 모두가 한적한 곳에 가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 동안 신자들은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고,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들을 권면하여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렸습니다.
포졸들이 잠에서 깨어나서 식사를 마치자,
프란치스코는 장롱에서 옷을 꺼내 포졸들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입혀 주었습니다.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40명이 넘논 남녀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다음
오랏줄에 묶이지 아니한 채 길을 떠났습니다.
앞에는 남자들이 큰 아이들을 데리고 걷고,
그 뒤에는 여자들이 젖먹이들을 등에 업고 걸었습니다.
때는 마침 7월이라 찜통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작렬하는 뙤약볕 아래서 걸어가자니 이내 모두가 지쳐버려
일행은 노인이거나 젊은이거나 터벅터벅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었고,
지쳐 빠진 어린이들은 울음보를 터뜨렸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앞장섰고 그 다음에 일행이 뒤따랐으며,
포졸들은 맨 뒤에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았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 내내 구경꾼들이 이 기이한 무리의 행진을 보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불쌍하다고 혀를 차며 한숨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열 맨 앞에 서서 가던 프란치스코의 목소리는 어떤 요란스러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그 마음에 용솟음치는 용맹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사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
라고 격려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줄곧 일행을 뒤돌아보면서
더욱 열렬한 목소리로 격려하기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열렬한 애덕에서 나온 격려의 소리를 들으며 교우들은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가까이에 이르자 포졸들이 신자들을 5명씩 오랏줄로 묶었습니다.
5명씩 한 무리가 되어 서울 한복판 큰길을 지나 감옥으로 향해 갔습니다.
이렇게 오랏줄에 묶인 여인들은 어린애들을 업거나 팔에 안고
갓난아기들에게는 젖꼭지를 물린 채 끌려갔습니다.
이처럼 처절한 광경을 보는 구경꾼들은 증거자들에게 악담을 퍼부으면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졌습니다.
외교인들 중에는 너무나 끔찍하게 여겨
“이 몹쓸 모진 년들아, 이 인정사정 없는 독한 년들아,
그 연약하고 애처롭고 귀여운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죽음을 자청하러 간단 말이냐?”
하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내 마리아와 다섯 아들들과 함께 갔는데,
그 중에서 큰아들인 (최의정) 야고보가 열네 살이요 막내가 겨우 두살이었습니다.
감옥으로 인도된 그들은 도둑들의 감방에 투옥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 프란치스코는 맨 먼저 법정으로 끌려나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판관들이 그에게 배교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심문하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
하물며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대주재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저는 결단코 배교는 못하겠습니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대답하고 팔주뢰와 다라주뢰의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팔과 다리뼈가 어그러졌고, 곤장을 110대나 맞아 온 몸의 살이 한치도 성한 데가 없이
뭉그러지고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은 채 감방으로 운반되어 갔습니다.
이처럼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40명이 모두 고문을 받았는데,
모두가 끝까지 항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편태와 곤장의 고문을 받아 정신과 의식을 잃은 상태와 신자들에게
천주교를 안 믿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옆에 서 있던 고문자들이 을러댔습니다.
그러면 초죽음이 되어 배교의 말을 중얼거린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즉시 자유로운 몸으로 석방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최의정) 야고보도 곤장 3대를 맞을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고문에 못 이겨 정신을 완전히 잃고 아무 의식이 없을 때
배교의 말이 나왔습니다.
고문자들은 야고보가 죽음에서 깨어나도록 약을 주고서 풀어주었습니다.
첫 번째 심문이 다 끝나자,
관원들과 포졸들은 관청에 모여서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서 프란치스코를 감옥에서 불러내어 천주교 책 한 권을 내밀면서
“여기 네가 믿는 천주교 책이 한 권 있는데,
네가 읽는 것을 우리가 듣고 싶어서 이렇게 모였으니 한번 읽어 봐라”하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마치 잘 차린 훌륭한 잔치에 초청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웃으며 책을 펴들고 목청을 가다듬어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가 하도 열심으로, 하도 감격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가 읽는 것을 듣던 외교인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그 처참하고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조차 그렇게도 자유롭게
깨끗한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극구 찬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읽기를 끝마친 다음에 포졸들이 마리아에게 책을 주면서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핑계로 읽기를 거절하자 관원들은
“아니 저렇게 훌륭한 회장의 부인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
고 빈정거렸습니다.
프란치스코는 40일 이상 참혹하고 지극히 혹독한 고문을 헤아릴 수 없이
여러 차례 당하였으나 끝까지 요지부동한 항구심으로 견디어냈습니다.
그래서 고문자들은 그에게 ‘바윗덩어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 박해 중에 이러한 별명이 붙여진 찬란히 빛나는 순교자가 두 분이 있었습니다.
즉 프란치스코와 조신철 가롤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함께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자기가 죽을 시간을 미리 예언한 대로,
1839년 9월 12일에 감옥에서 영광스럽게 순교하여 서른 여섯의 나이로 운명하였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조선의 저명한 이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가문에서 유명한 인사들이 여러 명 배출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이 단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었습니다.
그는 첫 선교사 신부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조선에 오기 전에
시골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제의 직분을 집행했던 분입니다.
1784년의 일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나온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하여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터득한 이벽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 가서 그곳 주교님을 찾아갔습니다.
북경 주교님은 이승훈을 반갑게 맞이하고
그에게 주요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천주교 서적도 주면서
조선에 돌아가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북경에서 조국에 돌아온 이승훈은 열성은 뻗쳤으나 교리에 대하여는 무지한 탓으로
조선에서 천주교회를 잘못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을 사제로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이존창이었습니다.
이존창은 후에 이와 같은 일이 잘못임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영화로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존창의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그 집안의 딸들에게서 두 명의 사제들이 탄생된 것입니다.
그의 딸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모이고,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이 마리아는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는데,
열 여덟 살 때에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집안 일을 지혜롭게 꾸려나갔으며 식구들 간에 불화 없이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 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하였는데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습니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갈 때나 먼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리면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주었습니다.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남편을 공경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부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집을 덮쳤을 때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남은 물건들 중에
무엇이든지 좀 좋은 것들을 모아서 쌌습니다.
그리고 포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먹였습니다.
포도청으로 출발하던 날 일행은 벌써 떠났는데,
마리아는 어린것들을 데리고 먼길을 걸어가야 하므로
그 준비를 위해 집안에서 물건을 조금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포졸 하나가 마리아에게 접근하여 점잖지 못하게 치근거리며
“다른 이들은 다 떠났는데, 너는 왜 꾸물거리고 서 있느냐? 가기 싫은 것이 아니냐?”
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관원이 여자에게 짓궂게 구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겨 엄중한 소리로
“당신은 누구를 망측한 사람으로 여기십니까?
내가 가거나 말거나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것이 내 자유인데,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남편과 내 자식들이 갔는데 내가 왜 안 간단 말입니까?
당신은 상관 말고 당신 갈 길이나 가십시오”
하고 그의 야비한 행동을 나무랐습니다.
포졸이 떠나가자 마리아는 아기를 팔에 안고 일행을 뒤쫓아갔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마리아는 남편과 큰자식들과 격리되어
여인들 감방에서 갓난 아들과 함께 수감되었습니다.
다음날 다른 이들과 더불어 법정에 섰습니다.
온갖 고문을 다 받아서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고 팔과 다리가 부어서
유혈이 낭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언하였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문 외에도 가장 큰마음의 고통은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였습니다.
갓난아이가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은 안 나오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데 먹일 것이 없어서 엄마의 눈 앞에서 굶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줄곧 꿋꿋이 버티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극도의 고문을 받은 끝에 마침내 죽고,
또 어린것이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운 것을 볼 때,
자식에 대한 그릇된 자비심에 의하여 마리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하였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살덩이와 핏덩어리들이 더럽게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배교하는 말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배교하여 자유로 풀려나 집에 가 있는 동안에
그의 맏아들 최(양업) 토마스가 모방 신부님의 주선으로
마카오에 보내져 라틴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 즉 형조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에 갇혀 있던 용감한 신자들이 마리아에게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 말에 감동되어 마리아는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불충실한 배교를 용감히 취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내고
또 모정에서 오는 모든 나약한 생각을 끝까지 물리쳤습니다.
이 재판소에서 마리아는 자기의 갓난아기가 기아와 비참으로 말미암아 눈앞에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두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습니다.
야고보는 한 달 이상 감옥에 줄곧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갇혀 있는 그리스도 포로들을 위하여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지켜보면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형조에서 관례대로 세 차례의 고문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의 날이 가까워오자 평온한 모습으로 야고보를 불러 마지막 훈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 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습니다.
사형집행인들이 십자가 형틀을 만들고 감옥 전체가 형구들로 가득 찼습니다.
마리아는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 야고보에게 어머니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함께 감옥에 갇혀있는 증거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나가라고 명했습니다.
마리아는 야고보에게 최후의 형벌을 행하는 형장에 따라오지 말도록 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나이 어린 야고보는 아무 보호자도 없고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고아로 남겨질 아주 어린 세 동생들을 거느리고 살아야 될 처지에 있었는데,
마리아가 형장에서 그 어린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서 그 순간에 모정에 끌려
허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려 최후의 전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덜된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모정에 눈물짓는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야고보는 최후의 형벌을 받고 순교하는 현장에 있어야하는 감옥의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지켜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다른 6명의 증거자들과 함께 순교로 개선할 십자가 형틀에 올라갔고,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형장에 이끌려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휘광이의 칼을 받고
1840년 1월 31일에 서른 아홉 살의 나이로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이제 편지를 마치면서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에게
지극히 겸손되고 정에 넘치는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와 저의 가련한 신자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 중에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극히 미약한, 조선 대목구의 교황 파견 선교사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