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중간, 배실재를 끼고 침곡산이 조용히 누워 있다.
그 산발치에 조상의 얼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훌륭한 터가 있으니 포항 기북면 오덕1리 ‘덕동 문화마을’이 그곳이다.
옛시조에 초동의 접낫에게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무나 들이지 않는 은밀함을 헤치고 겨우 이곳을 찾을 수 있었으니 덕동과의 만남은 그만큼 신선했다.
용이 머물렀다는 용계천, 그 계곡을 흐르는 물이 한껏 멋진 가락을 퉁기는 거문고 소리처럼 청아하다.
길 아래 세덕사지 옆에는 세월에 지친 와향나무가 지그시 눈을 감고 거문고 소리에 어울리는 풍류시조라도 읊고 있는 듯, 세월의 관록으로 베개를 베고 누워 길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용계정 출입문을 들어선다.
단아한 팔작지붕에 익공계 기둥 장식의 격조 있는 정자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모양새가 범상치 않다.
퇴색된 단청과 수백 년에 걸쳐 벌어진 기둥 틈새에서 옛 선조의 풍류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난간 건너 암벽에는 ‘연어대’란 글자를 새겼으니 금방이라도 솔개가 푸드덕 날갯짓하면 물고기가 화답하고 튀어 오를 것 같다.
좌측 후원 문을 나서자 펼쳐지는 호산지당의 풍광은 새삼 나그네의 발길을 움츠리게 한다.
무성한 어리연이 그 옆, 도송숲과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고 있다.
멋진 한 폭의 산수화다.
마을 입구의 ‘지정문화 마을’, ‘환경친화 마을’, ‘기록사랑 마을’, ‘포항명승 5경’ 등의 안내표지판에서 갖던 의아심이 사라지고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ㆍ지ㆍ인이 하나 되어 조화롭게 사는 것이 자연의 질서라고 했던가. 자연, 문화, 이들도 모두 사람들이 만들고 또 그들이 지켜간다.
덕동에 가면 한 어른을 만날 수 있다.
덕동 민속전시관을 운영하는 여강 이씨 10세손 이동진 관장이다.
여든넷 연세가 믿기지 않는다.
반백 년 동안 덕동 지키는 것을 오로지 소명으로 하는 분이시다.
그와의 인연은 풍수지리학에 심취하다가 덕동의 ‘수구막이’를 알게 되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 몇 번 찾아가 만나게 되면서이다.
덕동은 조선 중기의 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의 동생, 농재 이언괄의 4대손 사의당 이강이 안강 양동에서 옮겨오면서 비롯되었다.
인조 말, 그는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남루해진 국가 위세를 크게 한탄했다.
결국 벼슬에의 뜻을 접고 은둔하여 풍수 좋은 덕동에 터를 잡으니 골짜기가 깊고 세속의 발자취가 드물었다.
풍수란 음양오행의 뿌리에서 하늘과 땅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며 인간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이에 근거하면, 덕동은 침곡산 산세는 강하나 수세가 약했다.
산세는 인물의 운이고 수세는 재물의 운이니 결국, 호산지당을 만들어 이를 보완했다.
또한, 묘지에서 물이 흘러나가는 것이 보이면 역시 재운이 빠져나가니 이를 막기 위해 물길에 ‘수구막이’를 해야 한다.
용계천에 솔로 그를 조성하니 훌륭한 삶의 터가 되었다.
선비들은 그 후, 마을 풍경을 이렇게 읊었다.
‘산강수약축사지 산이 강하고 물이 적어 못을 만드니 동학풍광부유기 동리의 경치가 다시 또 기이하구나’
도송숲이 곧 그 수구막이다.
돌아가는 용계천 굽이마다 흘러가는 물길을 적당하게 감추고 있는 절묘한 숲의 모양이다.
또한 덕동에는 마을 재산의 효시가 된 송계가 있다.
송계숲의 나무를 베어다 팔아 마을 잔치 비용을 충당하던 것으로 지금까지도 잘 운영되고 있다.
또한 정계숲이 있으니 이는 송계정의 멋진 풍치를 위해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다.
덕동은 풍수와 솔의 조화로 잘 어우러진 마을이다.
마을 재정을 확충하고 유교적 전통을 잇기 위한 모든 것이 동양철학과 풍수지리학에 밝은 이 관장의 주도로 이루어진 사실을 곳곳의 많은 사료에서 알 수 있다.
덕동 수구막이를 더듬고 있노라니 내 고향 풍수 사건이 떠오른다.
그 마을 역시 덕동처럼 낙동강을 낀 배산임수의 경관이 좋고 문중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다.
문중 일을 보시던 백부가 돌아가시자 대신 그 일을 맡게 되었다.
문중 재산은 대대로 종손 명의로 내려왔다.
그러던 중, 그곳에 뜻하지 않은 개발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조용하던 마을의 산과 논, 밭을 뒤집고 아파트며 상가에다 학교까지 들어서니 마을이 상전벽해가 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땅값이 치솟자 종손이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중 산을 마치 자기의 것인 양, 몰래 팔아 버린 것이다.
조상을 외면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되고 말았다.
문중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민·형사 소송에 이어 족보에서 그의 제명까지 거론되자 그는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요절하고 말았다.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서 물욕의 허황된 꿈이 남겨준 씻을 수 없는 오욕이었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듬해 묘사 때였다.
개발계획에 따라 마구 파헤쳐진 산모퉁이를 통해, 선영에서 낙동강의 흘러나가는 물길이 훤히 내다보이지 않는가. 산모퉁이 수구막이가 잘려나간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문중의 선산을 잃게 되었다는 풍수 해석이었다.
뒤늦게 학교를 높이 지어 수구막이를 만들어, 사후 약방문이나마 풍수 액을 막을 도리밖에 없었다.
덕동은 달랐다.
마을주민의 역풍을 뚫고 수구막이와 호산지당을 만들며, 문화유적의 보고인 민속전시관 운영과 *1성법부곡의 발견 등은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이들 덕동비사는 그의 저서 ‘덕동 사백 년 선비의 덕’에서 술회하고 있다.
동장에 새마을지도자며, 마을금고 이사장직까지 맡아 덕동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열정과 짙은 삶의 모습은 너무나 의연하다.
하지만 누구나 삶의 애환은 찾아오는 것인가. 그의 부인을 만나 뜻밖에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난해, 이 관장은 식도암 수술과 위급하게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또다시 전립선암이 발병했다.
투병의 시련은 가혹했다.
그 이후, 그는 더 이상 암 수술은 불응하고 만다.
그의 부인은 안타까웠다.
수술을 거절하는 그의 고집을 누군가 꺾어 주길 바랐다.
노부인의 소원에 따라 수술을 적극 권했으나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뜬 해는 져야 하고, 산에 오르면 내려와야 합니다.
언젠가 내려놓아야 하는 삶이지요” 그에게 두 번의 큰 수술은 큰 비용부담이었고, 또 다른 추가 수술은 그것을 가중시킬 뿐이다.
수술을 포기함으로써 후일,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한 수구막이가 되고자 한 그의 처연한 결정이었다.
마지막, 용계정 풍광을 읊은 여운을 들려준다.
자연과 선조가 베푼 문화예술의 정취를 사랑하는 그의 소박한 심경이다.
말에 습기가 젖은 듯했다.
‘여름날/ 등불을 끄고/ 용계정 대청에서 누워 듣는다/ 스쳐 가는 바람소리, 물소리/ 밝은 달빛과 어우러져/ 선조의 숨결과 함께/ 나는 한 신선이 된다’
역사에는 큰 획을 긋는 사람이 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문자인 한글과 왜적을 물리친 거북선 뒤에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훌륭한 나라 사랑의 정신과 열정이 숨어 있다.
마을유적을 관리하며 유교의 정신문화를 잇고, 송계의 전통으로 마을 화합을 다진 덕동의 ‘인간 수구막이’, 그의 모습에서 역사의 짙은 훈향을 느낀다.
<끝>
*1성법부곡: 동국여지승람에 포항 기북면 성법리가 공업단지였다는 기록이 있음. 비격진천뢰도 여기서 만들어졌다고 하며 이 관장 등이 사적을 발견함. 포항종합제철의 근원을 여기서 찾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