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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출생하였다. 공증인 세르 피에로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카타리나(Catarina)라는 이름을 가진 농사꾼의 딸이며 신분의 차이로 아버지와 결혼을 하지 못했으며 그가 태어날때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1466년 피렌체로 가서 부친의 친구인 베로키오에게서 도제수업을 받았다. 이곳에서 인체의 해부학을 비롯하여 자연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사실상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사실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에 성공하였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회화론·과학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기체역학·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연구결과는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을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이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최후의 만찬〉·〈모나리자〉·〈동굴의 성모〉·〈동방박사의 예배〉 등이 그러하다.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 중 하나다. 1519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이렇게 그는 조각·건축·토목·수학·과학·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생애를 대개 5시기, 즉 제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제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제2차 피렌체 시대(1500~1506), 제2차 밀라노 시대(1506~1513), 로마·앙부아즈 시대(1513~1519)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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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제1밀라노시대(1482∼1499년)에 그린 그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날, 열두 제자와 함께 만찬을 나누었다(마태 26:20, 마르 14:17, 루가 22:14)는 매우 낯익은 주제를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이 작품의 장대한 구도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15세기 피렌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전의 작가인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나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 의해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는 거듭 그려졌는데, 이들 작품의 구도에서는 유다 한 사람이 식탁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최후의 만찬’을 시도하였다. 즉 유다까지 열두 제자의 무리 속에 포함시켜서 그 열두 제자를 세 명씩 작은 무리를 짓도록 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작가들이 ‘최후의 만찬’과 유다의 배반이라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면의 조형성에 역점을 두었다.
화면의 구도는 대단히 수학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3개의 창문, 4개의 무리를 이룬 12제자 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네 복음서,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 등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화면 한 가운데 위치한 예수의 몸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정확한 원근법으로 작품이 짜여져 있지만 감상자의 입장에 그 원근법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없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그림이 일상의 차원이 아니라 이상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기획되었음을 의미한다.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뛰어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독창성, 그리고 예리하면서도 정확한 형식미,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뛰어난 방식 등 이 작품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평가된다.
세계의 역대 대작으로 꼽히는 그림중 의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꼽는데 의이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중의 모델로 예수의 모델과 가롯유다 의 모델이 동일 인물이라 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11명의 제자들은 그렸으나 인자한 모습의 예수님과 정반대의 가롯유다를 그려 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골의 한 성당예배 에 참석한 다빈치는 무릎을 탁 하고 쳤다. 성가대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성가를 부르고 있는 한 소년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다웠고 정이넘치는 표정과성령이 넘쳐 흐르는 그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델로 부족함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최후의 만찬에서의 예수님인 피에트로 반디네리이다
다빈치는 예수님을 그린후에 가롯유다의 모델을 찾아서 헤메이게 되었다. 마지막 한사람의 모델때문에 10여년을 헤메였다면 또한 놀라운 일이긴 하나 역시 사실이다 . 그러던 어느날 술에 찌들리고 타락한 한 청년을 허름하고 불결한 구석진 거리에서 만났다. 그 청년을 바라보는 순간 다빈치는 무릎을 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모습은 어디로 보아도 사악하고 욕심많은 가롯유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다 빈치는 정중하고도 조심스럽게 그림에대한 설명과 가롯유다의 모델 제의를 하였다. 물론 유다는 예수를 판 나쁜 이미지의 인물 이라는점도 함께 설명 하면서 말이다. 거절하면 어쩌나하는 조바심을 하기도 전에 그는 그러지요 하며 순순히 모델에 응하였다.
드디어 세계적인 최후의 만찬이 완성될수 있게 된것이다. 그림을 다그리고 일어나면서 그 청년은 말하였다. 선생님! 저를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저는 지금부터 10 여년전에 선생님의 제의로 예수님의 모델이 되었던 피에트로 반디네리입니다. 그렇다 그는 예수님의 모델이었던 장본인 이었다 그러나 10 여년이 지나는동안 사악하고도 탐욕스러운 가롯유다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음악에 천부적이었던 그는 로마의 음악학교에 진학하고 거기서 사귀어서는 않될 친구들을 사귀었던 것이다. 그들과 함께 방탕의 길로 들어서서 10여년동안 술에 찌들리고 방탕한 결과는 예수님의 인자하고도 온유한 모습에서 사악하고도 탐욕스러운 가롯유다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한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180도의 모습으로 바뀔수 있는것은 우리인간에게는 양면의 모습이 있다는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가꾸고 사랑할때에는 얼마든지 예수님같은 성자의 모습으로 이 사회의 일원으로 아름다운 삶을 영위해 갈수도 있으며 내가 나를 학대하고 방치하며 타락할라치면 얼마든지 유다처럼 사악하고 탐욕의 나래로 떨어질수 있슴을 알수 있는것이다 .
우리는 어느길을 갈련지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다빈치 코드' 속 최후의 만찬을 둘러싼 논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소설 ‘다빈치 코드’는 이 그림에 예수의 결혼이라는, 금기시됐던 소재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오늘날 통념적인 르네상스 미술의 시기는 피렌체대성당의 돔(dome)을 착공한 1420년을 상한(上限)으로 하고, 하한(下限)은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로 옮겨가는 1525∼30년경으로 잡고 있다.
19세기 이후, 15∼16세기에 유럽의 문화현상을 널리 파악하는 개념이 된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을 뜻하는데, 이 말의 어원은 역사적으로 보면 이탈리아에서 미술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미 14세기의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및 역사가 빌라니 등이 잃어버린 고대의 문예 및 예술을 새시대에 재현한다는 뜻으로 이탈리아어(語)의 ‘재생 ·부활’을 의미하는 리나시타(rin scita)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다시 15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 기베르티와 알베르티, 필라레테 등의 저술에도 그러한 사관(史觀)이 계승되어 있었으나, 특히 16세기의 미술가 바사리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美術家列傳)》(1550년 초판)에서 고대미술이 야만족의 침입과 중세의 우상파괴운동으로 멸망하고, 그 후 거친 고트인(人)에 의하여 ‘독일양식’, 즉 고딕이나 딱딱한 비잔틴양식이 풍미한 뒤, 13세기 후반 이후 화가 치마부에·조토 및 조각가 피사노와 디 캄비오 등이 나와 토스카나 지방에서 뛰어난 고대미술의 전통을 부활시킨 사실을 리나시타라는 말로써 파악하였다.
이 말이 19세기 초엽, 프랑스 학자의 주목을 받아 르네상스라고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이어서 영어·독일어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탈리아어로는 리나시멘토(rinascimento)가 되었다. 따라서 르네상스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어이며, 더욱이 그 개념이 형성된 단서는 그 시기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역사적 자각과 의욕을 보여준 미술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 모나리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 1503~06년 제작 나무판 위에 유채 77×53cm.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유채(油彩) 패널화. 77×53cm. 루브르미술관 소장.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한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콘다의 부인 이름이다. 조 콘다부인은 G.포지의 조사에서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임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본명은 리사 레라르디니(Lisa Gherardini)이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이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城)에 수장되었다. 때때로 세정(洗淨)도 하고, 광택용 니스를 바르기도 한 관계로 전체에 균열이 생겨 제작 당시의 시원스럽고 여유 있는 필치는 볼 수 없다.
이 초상에는 처음부터 눈썹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典型)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心氣)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神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傳記)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일찍이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미술관에서 도난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