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3일차(2022.11.4)
8. 초남이 성지
초남이성지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가 나고 자란 곳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박해의 위협 속에서 복음을 몸소 실천한 삶의 현장이다.
신학문을 하는 이들과의 접촉으로 진리에 눈을 뜬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었다.
숙식을 제공하면서까지 정성껏 교리를 가르쳤으며,
멀리 금구와 고창과 영광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초남이에 초대하여 성사를 집행하도록 하였고,
장남 유중철 요한이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고자 하는
지향을 발하였을 때 이를 지켜주기로 결심하였으며,
같은 뜻을 지닌 한양의 이순이 루갈다와 혼례를 추진하였다.
동정부부는 바로 이곳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면서
4년 동안 함께 동정을 지켰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은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며,
대역부도죄인으로 여겨진 유항검의 가족은 연좌형에 따라,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전주옥에서,
이순이 루갈다, 유중성 마태오, 신희와 이육희는 숲정이에서 처형되었다.
유항검의 어린 자녀들은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특히 유항검의 막내딸 유섬이는 9살의 나이에 거제도로 유배 가,
그곳에서 71세가 될 때까지 거룩한 삶을 살았던 것이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초남이의 궁궐 같은 집은 파가저택형을 받아
집을 부수고 땅을 파 웅덩이로 만드는 바람에 집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늦게까지 남은 일부 웅덩이 자리 위에 지금의 성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여 거행한 시복식에서
유항검과 장남 부부인 동정부부 유중철과 이순이,
차남인 유문석, 조카인 유중성이 복자로 선포되었다.
9. 전주 숲정이 성지
“이곳은 천주교인이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한 거룩한 땅이다!”
숲정이는 조선시대에 군사훈련 지휘소가 있던 곳으로,
천주교도들의 목을 베던 처형장이었다.
당시엔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숲머리" 혹은 "숲정이"라 불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라도의 첫 천주교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아내와 제수,
맏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신태보(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 등이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경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등이 순교했다.
1867년에는 김사집(필립보) 등 여러 사람이 순교했다.
이곳은 유항검이 처형된 풍남문 밖의 전동성당,
유항검과 그 가족이 묻힌 치명자산과 함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이다.
10. 전주 옥 터
조선 시대 전주는 전라도 중심지여서 신자들이 각지에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혀 심문,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동정 부부인 유중철과 그의 동생 유문석이 교살되었고,
이순이 루갈다는 옥중 편지를 작성하였다.
정해박해(1827년)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도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기해박해(1839년) 때는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 심조이 바르바라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 때 생긴 상처로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며,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이봉금 아나스타시아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는 만으로 12세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박해 시기에 옥은 고통스러운 곳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기도처였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곳이었다.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김대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는
기해박해(1839년)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들은 정해박해(1827년) 때 잡혀와 만 12년 동안 옥중에서 긴긴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옥중에서도 밤마다 등불을 켜 놓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고 한다.
11. 초록바위. 서천교
초록바위는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1817-1866년)의 14세 된 아들 명희(明熙)와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의 아들이 수장된 곳이다.
이 두 가정은 온 가족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아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이를 채워 전주천에 밀어 넣어 죽였다.
전주교구에서는 두 소년 순교자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자
2006년 5월 싸전다리 부근 전주천변 도로 옆에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서천교
이곳은 성 조윤호 요셉(趙~, 1848-1866년)이 1866년 12월 23일 치명한 곳이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나
돈독한 신앙 생활을 어려서부터 익혔다.
1864년 부친을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이 루치아와 결혼한 그는 1866년 12월 5일 부친 조화서 베드로(趙~, 1815-1866년),
정원지 베드로(鄭~, 1846-1866년), 이명서 베드로(李~, 1821-1866년) 등과 함께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12. 전동 순교 성지
전동성당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가 1791년 12월 8일에
참수되어 순교한 곳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첫순교터이다.
1801년 10월 24일에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관검이 이곳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고,
이어 김유산 토마스와 이우집은 참수로 순교하였다.
1989년 봄, 전동 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파리외방전교회 보두네신부가 임명되고 본당이 설립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치명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지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했다.
오늘 전동성당에서는 행사가 있어서 차량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왔다고 사정을 하여 30분 시간을 얻었다.
근처는 전주한옥마을로 주차를 할 수 없었기에 특혜를 받은 것이지요.
특히 주말을 맞아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활보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성탄 구유만들 때 사용할 한지구입과
상점을 아이쇼핑한다고 하여 한옥마을에서 내리고
혼자서 치명자산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여러 번 치명자산 성지를 다녀왔기에
다음 코스에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13. 치명자산성지
이 산은 옛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산으로 더많이 불려지고 있다.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돼 있는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두 아들 유문석·유중성, 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등
7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4. 되재성당지(升峙聖堂址, 승치성당터)
되재성당은 1895년에 세워진 최초의 한옥 성당으로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서울 약현동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단층 한식 목구조 건물로 기와를 얹은 팔작집이었으며,
평면은 정방형인데 제단과 출입구를 나란히 배치하여
제단을 향하는 공간의 깊이를 확보하였다.
또한 남녀를 구분하는 당시 풍습에 따라 출입문을 따로 내고
내부 중앙에 가림막을 설치하였다.
'되재'라는 말은 고개가 되다(=매우 힘들다)라는 뜻이라는 설과
고개가 꼭 됫박을 엎어 놓은 것 같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성당 문고리에 숟가락으로 끼워놓아 그냥 지나치는 순례객이 많음.
우리도 순례도장을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관할본당인 고산성당에 전화했으나
전화를 받지않아(점심시간이라 사무장 부재) 직접성당을 방문(16.8km)
마침 여성교우 한 분이 성체조배하고 있어 되재성당지에 순례도장이 없다고 말하자,
문고리에 끼워진 숟가락을 빼고 열면 안에 있다고 해서 다시 방문함.
1시간 지체했지만 고산성당(지도 1번 경유지)을 방문할 수 있었다.
고산성당은 1958년에 성모영보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설립되었으며
1894~1895년에 걸쳐 설립된 되재성당(화산면 승치리)을 그 모태로 한다.
고산 본당은 2016년 현재 1900여명의 신자와 관할 공소인 되재공소, 수청공소,
넓은바위공소, 비봉공소, 우월공소, 미남공소 등 13개의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17. 나바위성지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금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야 한가운데 사발을 엎어놓은 듯 작은 산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華山)’이라 이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가 펼쳐진다.
이름하여 ‘나바위’.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이곳이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얹고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김대건 신부로서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다.
그 때는 나바위 바로 발끝까지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하구로부터 거슬러 올라오자면 황산포(지금의 강경)가 가장 큰 포구였고
나바위는 황산포를 3km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이다.
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독특하게 혼합된 나바위 성당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7월 18일 ‘화산 천주교회’라는 명칭으로
사제관과 함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성당 내부에는 전통 관습에 따라 남녀 자리를 구분한
칸막이 기둥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 때는 화산 성당이라 불렀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을 따라
나바위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18. 진산성지
충청남도 금산군에 속해있는 진산(珍山)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참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와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년)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발생한 곳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 이후 그들이 나고 자란 진산군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저버린 강상죄(綱常罪)에 해당되어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아 5년간 현으로 강등되었다.
진산성지는 1791년 제사 문제로 촉발된 진산사건(신해박해)으로
한국 최초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거행된 124위 시복식에서
윤지충은 대표 순교자가 되었으며, 권상연 역시 복자품에 올랐다.
두 분 복자 외에도 진산 성지는 같은 동네에서 거주하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순교한
김영오 아오스딩, 김영삼, 김요한 세 분의 순교자들도 함께 기리고 있다.
진산성지 성당은 2017년 5월 29일부로
국가 지정 등록 문화재(682호)로 등록 되었다.(대전교구홈피)
오늘도 아내가 갖고있는 책자에만 있는 되재성당지를 추가로 순례.
전주에서 숙박하려고 했으나 대부분의 숙소들이 만실(금요일)이었기에
2일 일정으로 잡았던 전주지역 성지를 하루에 끝내고 김천으로 향했다.
어제 부랴부랴 예약했던 전주시에 있는 호텔(130,000원)은 취소했고
김천의 Q1모텔(50,000원)에서 숙박했다.
전주지역에 있는 성지는 대부분 가깝게 위치하고 있어 1일로 가능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 하이패스 차량이 아니어서
차별대우를 받는 것 같았고 불편했다.
어느 곳에서는 하이패스차량만 나가는 출구로 잘못 나가 미납으로 처리되어
고속도로 사무실에서 정산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는 하이패스가 필요없었지만 육지에 나오니
계속 고속도로로 연결되기에 하이패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여러번의 시행착오와 바쁜 일정이었던 3일차 여정도 끝났다.
전주에서의 일정을 하루 단축했기에 김천에 있는 큐1모텔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쉬면서 그 동안의 순례를 정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