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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참역사 원문보기 글쓴이: 외로운 짚시
은 나라는 우
(은조선=은왕조)
"은나라 사람들은 모이면 어께춤을 추며 노래부르기를 좋아했고 다정다감하며 덕(인정)이 많았으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고, 욕심이 없었다"
-연사-
세계역사를 상세히 보다보면 금,은,동자는 한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동안 대학에서 평소 세계사를 연구해오며 한민족역사에 있어서 은나라의 관계를 무시할수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금나라,은나라, 동방나라, 동이민족... 이런 단어는 유일하게 우리 한민족만이 쓰는것만은 사실입니다. (온달,반달,배달이란 단어역시 우리 한민족과 같이해온 오랜 언어입니다)
우리 한민족참역사는 역사에 대하여 과학적접근을 중요시합니다. 저는 한민족사를 다년간 연구하면서 은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만 갔고
마침내 이에 대해 삼우선생께 질의를 드린바, 놀라운 회신이 왔습니다. 연사에 은나라를 "은복포족의 나라로써 은조선이다"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쥐나인들은 은나라가 주신 이전의 고대국으로 기록하고 자기민족이라고 표현하나 실제의 은제국은 신나와 같이 주신을 계승한 나라로써 배달족으 로 존속하다가 단조선이후, 은조선과 기자조선으로 분리통치되다가 이후 구려(백제,왜) 돌궐 신나로 계승 유지되었다는 역사입니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은왕조를 쥐나인들의 왕국으로써 고조선 이전의 고대국가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사에는 주신의 후예국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바. 그렇다면 쥐나인들이 주신 이전의 국 가로 조작함으로써 고조선신화 작업이나 고구려자국사조작과같이 한민족과 격리시켜 오도 했다는 것 으 로 이해되는데, 일단은 양쪽의 관련의견을 다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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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大東夷!
그 광대廣大했던 잃어 버린 역사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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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은나라 즉 은왕조에 대한 참고내용으로써 퍼온 글 입니다.
은나라를 건국한 탕왕湯王의 시조인 [설]이 순임금(제순유우)과 하나라의 우禹 임금때 벼슬을 하고 상商이라는 곳의 제후로 봉해진 가계 내력과 도읍의 이름을 따라 상商나라 라고도 하며, 고대 은나라 를 포함하여 현재의 중국 땅에 있던 옛 중원 일부의 역사는 삼황(태호복희. 염제신농.황제헌원), 오 제(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도당. 제순유우), 하夏·은殷·주周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일 설에는 은나라 이전의 삼황오제와 하나라를 전설적인 왕조로 취급하여 신화 정도로만 보는 견해도 있으나 동이족의 뿌리를 찾아보면 이들의 역사는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주나라까지의 중원 왕조의 흐름을 서술식으로 체계화 하면 다음과 같다(중원의 왕조는 하나라 이전까지는 세습 왕 조가 아니라 덕있는 사람이 대통을 이어 받았다).
①배달국倍達國의 5대 환웅 태우의太虞儀(즉위 BC 3512)는 1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다의 발多儀發은 대통을 이어 6대 환웅이 되고 그중 막내인 태호복희는 중원으로 진출, 현 하남성의 진陳에 도읍하여 문명을 개척하였다. ②배달국 8대 환웅 안부련安夫連(즉위 BC 3240)의 신하로서 소전少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강수姜水(섬서성 기산현岐山縣)에서 군軍을 감독하던 직책에 있었다. 소전은 웅씨熊氏족 의 지류로서 배달국에서 대대로 우가牛加의 직책으로 주곡主穀을 관장하던 고시씨의 먼 후손 이라고 한다. 이 소전의 아들이 염제신농이며 중원의 남방으로 진출하여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 게 된다.
③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 헌원黃帝軒轅(BC 2692~2592)이 나왔다. 황제헌원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치우 천왕蚩尤天王 이라고도 함)과의 수차례에 걸쳐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뿌리를 캐보면 결국 같은 동족간의 전쟁이었을 뿐이다. ④삼황三皇이후의 오제五帝는 그 근원이 모두 삼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다. ⑤순임금의 뒤를 이어 순임금때 치수에 공이 큰 우禹가 제위를 이어 받아 하夏나라를 세웠다. 이때부터 하나라(BC 2183 ~ BC 1752)는 왕조를 세습하기 시작하여 17대에 걸쳐 약 400여년 존속하였다. ⑥하나라의 마지막 왕은 폭군으로 이름 높은 걸桀인데, 걸왕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인 물이 성탕成湯이라는 제후였다. 성탕의 조상은 [설]이며 [설]은 황제헌원의 증손자인 [제곡 고신]의 아들이다. [설]은 순임금과 하나라 우임금때 상商이라는 곳의 제후로 봉해졌고 그의 후손인 성탕成湯이 걸왕을 내몰고 단군조선 13대 흘달屹達의 조력을 받아 걸왕을 축출하고 은殷(商)나라를 건국하였다. 은나라는 BC 1600년경에 창건하여 BC 1050년까지 약 600여년 간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實證 한단고기]가 인용한 <단군세기>나 <규원사화>에 의 하면 13대 단군 갑오 16년(BC 1767년)에 은나라 탕왕湯王의 하나라 정벌 기록이 있어 건국연 대 및 멸망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후직后稷이며, 후직의 후손들이 중원의 서쪽으로 진출하여 융적戎狄(견이를 일컫는 말이며 서쪽에 살았다고 하여 서이西夷라고도 함)과 섞여 살았다고 한다. 후직의 후손중에 은나라 말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있었으며 고공단보의 손자가 서백 창이고, 서백 창의 아들이 단군 조선의 조력으로 은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이다. 환국桓國을 계승한 환웅시대의 배달국이 그 뿌리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주나라 무왕 이후 중원 의 동이족이 어떻게 잔존하여 분포되어 왔는지, 쥐나족(차이나China 즉, 화하족,화족華族)과 동이족東夷族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며 인체상의 어떤 요소로 판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서는 본인도 깊은 지식이 없어 고대사와 종족분포에 전문적인 역량이 높은 분들의 참여를 바 라고 있다. 더구나 역사 이래 동이족들중 상당수가 저 넓은 대륙에서 오랜 기간동안 여러 경로 를 거쳐서 지속적으로 혼혈이 되어 왔고 문화적으로 흡수되어 왔다면 무슨 근거로 민족을 구 별해 낼 수 있겠는가. 쓸데 없는 고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요즈음 북한을 탈출하 는 조선족 여인들 중에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중국인과 결혼하거나 몸을 파는 사람들도 있 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이 착잡할 뿐이다.
성탕成湯의 시조는 [설]이라고 한다. 은나라의 시조인 설의 어머니는 간적이다. 그녀는 유융씨 부족의 딸이며 제곡고신(오제五帝중의 한사람)의 둘째 부인이었다. 간적 등 세 사람이 함께 목욕 을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바 로 설이다. 설은 장성하여 하나라 우의 치수산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다. 순이 설에게 "백관이 화 친하지 않고 오품(五品)이 화목하지 못하니, 그대가 사도를 맡아서 오교(五敎)를 정중히 전파하 고, 백성들을 너그럽게 감화시켜주시오"라고 명하였다. 순은 설에게 상(商)을 봉지로 내리고 자 씨(子氏)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설은 요, 순, 우 시기에 등용되어 백관을 위해서 일했으므로, 그의 공적은 백관들 사이에 칭송되었고, 백관들은 안정을 얻게 되었다. 배달국의 고시씨高矢氏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이며 배달국 고시씨의 후손) ---> 공 손씨公孫氏(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공손씨의 후손) ---> 전욱고양(五帝중 한사람. 황제 헌원의 손자) ---> 제곡고신(오제五帝중의한사람.황제헌원의증손자) ---> 설(제곡고신의아들) 설 ---> 소명(昭明) ---> 상토(相土) ---> 창약(昌若) ---> 조어(曹어) ---> 명(冥) ---> 진(振) ---> 미(微) ---> 보정(報丁) ---> 보을(報乙) ---> 보병(報丙) ---> 주임(主壬) ---> 주계(主 癸) ---> 성탕(成湯)
▒ 1대 성탕(成湯) 하나라의 걸왕이 포악한 정치를 하며 주색에 빠져 지내자, 제후국인 곤오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탕이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을 인솔하니 이윤(탕의 신하)도 함께 따라나갔고, 탕은 직접 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하고 나서 걸왕까지 정벌하고자 하였다. 탕은 탕서(湯誓)를 지었는데, 그 때 탕이 "나는 무용(武勇)이 뛰어나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를 무왕(武王)이라고 칭했다.걸왕이 유융의 허(虛)에서 패하여 명조로 달아나자 하군이 지리멸렬해졌다. 탕이 삼종(당시 걸왕에게 충 성하던 제후국)을 정벌하여 많은 보물들을 획득하자 탕의 신하인 의백과 중백이 보전(寶典)편을 지었다. 탕이 하를 정벌한 다음, 하의 신사(神社)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하사(夏社) 편을 지었다. 이윤이 바른 정치를 공포하자 제후들이 모두 복종하였고, 드디어 탕이 천자의 지위에 올라 전국을 평정하였다.탕이 역법을 개정하고, 복색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하였으며 조회를 낮에 하기로 결정하였다. 탕왕이 걸왕을 몰아내고 [은왕조]를 연 것은 고조선 13대 단군 [흘달] 때 였다.
▒ 2대 외병제(外丙帝) 탕이 붕어했을 때 태자(太子)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서, 태정의 동생인 외병이 즉위하니, 이 이가 바로 외병제이다.
▒ 3대 중임제(中壬帝) 외병제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외병제의 동생 중임이 즉위하여 중임제가 되었다.
▒ 4대 태갑제(太甲帝), 태종(太宗) 중임제가 즉위한 지 4년 만에 붕어하자 이윤(탕의 신하)은 태정의 아들 태갑을 즉위 시켰다. 태갑은 성탕의 직계 장손으로 태갑제가 되었다. 태갑제가 즉위한 지 3년이 되니 포악해져 탕 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도덕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쫒고 3년 동안 섭정 하면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태갑제가 3년 동안 동궁에 머물면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훌륭 한 인물이 되자, 이윤은 태갑제를 영접하여 그에게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태갑제가 덕을 수양하니 제후들이 모두 은에 복종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되었다. 이에 이윤이 태갑제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서 태갑훈 3편을 지었고, 태갑제를 기리어 태종(太宗)이라고 칭했다.
▒ 5대 옥정제(沃丁帝) 태종이 붕어하자 아들 옥정이 즉위하였다.
▒ 6대 태경제(太庚帝) 옥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태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경제이다.
▒ 7대 소갑제(小甲帝) 태경제가 붕어하자 아들 소갑이 즉위하였다.
▒ 8대 옹기제(雍己帝) 소갑제가 붕어하자 동생 옹기가 즉우하니, 그가 바로 옹기제이다. 은 왕조의 국세가 쇠해지자 제후들 가운데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 이가 생겼다.
▒ 9대 태무제(太戊帝), 중종(中宗) 옹기제가 붕어하고 동생 태무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무제이다. 태무제는 즉위하여 이척을 재상으로 삼았다. 박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한아름이 넘 게커지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서, 태무제가 두려워서 이척에게 그 영문을 물어보았다. 이척이 대 답하기를 "신이 듣자니 요사스러움도 덕행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옵니다. 임금께서 행하신 정치에 잘못은 없었는지요? 임금께서는 덕행의 수양에 힘쓰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태무제가 이척의 말 대로 하자 불길한 징조인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이척은 무함에게 모든 공을 돌려서 그럴 칭찬 하였다. 무함은 왕가의 사무를 잘 처리하였으며 함애와 태무를 지었다. 태무제가 태묘(太廟)에서 이척을 칭송하면서 그를 신하 이상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이척이 사양하고 원명을 지었다. 태무제 의 대에 와서 은나라가 다시 흥하게 되어 제후들이 은나라에 복종하게 되었기에 태무제를 중종 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 10대 중정제(中丁帝) 중종이 붕어하자 아들 중정이 즉위하였다. 중정제는 오로 천도하였다. 중정제 이후로 적자계 승제가 폐지되고 형제와 형제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하니, 제위계승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되어 이 후 구세(九世)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에 제후들이 조회하러 오지 않게 되었다.
▒ 11대 외임제(外壬帝) 중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외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외임제이다.
▒ 12대 하단갑제(河亶甲帝) 외임제가 죽자 동생 하단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하단갑제이다. 그는 상(相)으로 천도하였다. 하단갑제 시기에 은의 정치는 다시 쇠락해졌다.
▒ 13대 조을제(祖乙帝) 하단갑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을이 즉위했는데, 조을제가 즉위하자 은 왕조는 다시 부흥하였다. 형(刑)으로 천도하였다.
▒ 14대 조신제(祖辛帝) 조을제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신이 즉위하였다.
▒ 15대 옥갑제(沃甲帝) 조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옥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옥갑제이다.
▒ 16대 조정제(祖丁帝) 옥갑제가 붕어하자 옥갑의 형 조신의 아들이 조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정제이다.
▒ 17대 남경제(南庚帝) 조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옥갑제의 아들인 사촌동생 남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남경제이다.
▒ 18대 양갑제(陽甲帝) 남경제가 붕어하자 조정제의 아들인 양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양갑제이다. 양갑제 때에 이르러 은나라가 다시 쇠퇴하였다.
▒ 19대 반경제(盤庚帝) 양갑제가 붕어하자 동생인 반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반경제이다. 반경제 시기에 은 왕조는 이미 하북에 도읍했는데, 반경제는 다시 하남으로 천도하여 성탕의 옛 도읍에 거주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 나 은 왕조는 이미 다섯 처례나 천도하면서 정해진 거처가 없었기에 은의 백성들은 모두 걱정하고 원 망하며 또다시이동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경제가 제후와 대신들을 타일렀다. "예전 고후이셨 던 성탕과 그대들의 선조들께서 함께 힘을 모아 천하를 평정하셨는데, 그분들이 제정한 법도는 따를 수 있는 것이었소. 그런데 지금 선왕의 법도를 저버리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정을 이룰 수 있겠소?" 이에 하남으로 옮기어 박을 정돈하고 탕의 법령을 시행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은 왕조의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제후들이 모두 입조하게 된 것은 반경제가 성탕의 덕정을 따 랏기 때문이었다.
▒ 20대 소신제(小辛帝) 반경제가 붕어하자 동생 소신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신제이다. 그러나 소신제가 즉위한 후 은나 라가 다시 쇠락해지자 백성들은 반경을 사모하며 반경 3편을 지었다.
▒ 21대 소을제(小乙帝) 소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소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을제이다.
▒ 22대 무정제(武丁帝), 고종(高宗) 소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무정이 즉위했는데, 무정제는 부열을 등용하고, 정사를 바로잡으며 은덕을 베푸니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 하고, 은나라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 23대 조기제(祖己帝) 무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기가 즉위하였다. 조기는 무정제가 꿩이 정(鼎)의 손잡이에 날아들어 울었던 일을 계기로 삼아 덕정을 베푼 일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고종이라고 칭하고 고종융일과 고 종지훈을 지었다.
▒ 24대 조경제(祖庚帝) 조기제가 붕어하자 동생 조경이 즉위하였다.
▒ 25대 갑제(甲帝) 조경제가 붕어하여 동생 조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갑제이다. 갑제는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으 므로 은왕조가 다시 쇠하게 되었다.
▒ 26대 늠신제(凜辛帝) 갑제가 세상을 떠나니 아들 늠신이 즉위하였다.
▒ 27대 경정제(庚丁帝) 늠신제가 붕어하자 동생 경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정제이다.
▒ 28대 무을제(武乙帝) 경정제가 죽자 아들 무을이 즉위했는데, 이때 은은 다시 박을 떠나서 하북으로 천도하였다. 무을제는 무도하여 우상을 만들고 이를 천신(天神)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상과 도박을 하면서 옆 사람에게 심판을 보게 하고는 천신이 지면 천신을 모욕하였다. 또한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 들어 그 속에 피를 가득 채우고 높이 매달아 활로 쏘고서 이를 사천(射天)이라고 명명하였다. 무을제는 황하와 위수 사이를 수렵을 갔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자 그 소리에 놀라서 죽고 말았다.
▒ 29대 태정제(太丁帝) 무을제가 죽자 아들 태정이 즉위하였다.
▒ 30대 을제(乙帝) 태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을이 즉위하였다. 을제가 즉위하자 은 왕조는 더욱 쇠퇴해졌다.
▒ 31대 신제(辛帝), 주제(紂帝) 을제의 큰아들은 계(啓)였으나, 계의 모친이 정후(正后)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자가 되지 못했다. 작은 아들은 이름이 신이었 는데, 그의 모친이 을제의 정후였기 때문에 그가 태자가 되었다. 을제 가 붕어하자 아들 신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신제이고, 세상에서는 그를 '주紂'라고 부른다.
주제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었났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 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하여 천하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 신만 못하다가 여겼다.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여자를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를 총해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사연에게 음탕한 악곡을 작곡 하게 하고, 북리(기녀원)에서 추는 것 같은 저속한 춤과 음탕하고 퇴폐적인 가락을 새로 만들 도록 하였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녹대(조가성에 쌓은 높은 단)를 돈으로 채우고 거교(지명)를 곡식으로 채우게 하였다. 게다가 여기 저기서 개와 말, 기이한 애완무을 수집하여 궁실을 가득 메웠다. 사구(지명)의 원대를 크게 확장하여 여러가지 야수와 새들을 잡아다가 이곳에 풀어놓았다. 주紂는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또한 사구에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들이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처럼 고기를 매달아 놓고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새도록 술을 마시며 놓았다.
주가 포악해지자 제후들이 그를 떠났고, 주(周)의 무왕(武王)에 의해 정벌당하고, 스스로 불 속으로 뒤어들어 자살하였다. 무왕은 달기를 처형하고, 주紂에 의해 갇힌 기자箕子를 풀어줬으며 주의 아들 녹보무경에게 봉토를 나누어주어 주어 은나라의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에 주나라의 무왕이 천자가 되었고, 후세 사람들은 군주를 제(帝)라고 부르지 않고 왕(王)으로 낮추어 불렀다.
▒ 삼황오제의 8대 임금들은 숙신(조선의 옛이름)에서 나왔다. <산해경> ▒ 순임금은 동이족이다. <맹자(孟子) 8편> 또 순임금의 선조인 황제도 동이족이 되는 것이다. ▒ 태호복희의 성은 風이며, 고대 동이족이다. <'98년판 중국상해출판사, 역대제왕록> ▒ 은나라는 이(동이족)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華 : 중국 漢족)의 나라이다. <사마천의 사기> ▒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고사변, 현재 홍콩대학의 임혜상교수, 대만대학의 서량지교수> ▒ 중국 고대사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다. <중국 북경대 고고학과 엄문명 주임고수 증언>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혹자는 치우천왕이 승리했다고 하고 혹자는 황제헌원이 승리했다고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승리했느냐가 아니라 둘다 동이족이었고 치우와 헌원의 싸움도 결국 같은 동이족 간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재 분단되어 있는 한반도의 정세를 보라. 남북이 서로 대치하여 서로가 정통임을 주장하고 있는사실을 감안한다면 배달국의 14대 치우천왕 과 배달국 지류의 후손인 황제 헌원간의 오랜 싸움도 동족간의 주권 다툼이었음을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은왕조가 의심할 바 없는 동이족이었음을 이일봉님의 저서 [實證한단고기]를 통해 부분적 으로 인용해 본다.
▒ 환웅이 신시에 도읍하고 배달국을 세울 무렵, 중국의 시조라 일컫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삼황이란 처음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세명의 제왕을 말하며, 오제란 그 뒤에 일어난 다섯 명의 제왕을 가리킨다. 그런데 뒤에 일어난 오제는 삼황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삼황의 뿌리만 밝히면 중국의 시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 호金天. 전욱고양(전頊高陽). 제곡고신帝곡高辛.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 제순유우帝舜有虞(순 임금) 등을 말하는데, 그마지막 순임금 시대 이후에 차례로 일어난 왕조가 하夏, 은殷, 주周이다. 찾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황오제 가운데 대부분이 동이족이며, 이 사실은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고사변古史辯>은 전7권으로 된 방대한 문헌으로, 현대 중국의 사학자들이 공동으 로 편찬한 책이다. 바로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동이東夷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太호, 제준帝俊, 제곡帝곡, 제순帝舜, 소호少호, 그리고 설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如太호之卽帝俊帝곡帝舜少호之卽설 近人기得明證
▒ 삼황오제 시대가 끝나고 우禹가 세운 하夏나라도 멸망한 뒤 들어선 나라가 은殷이다. 일명 상商나라라고도 하는데 은나라는 저 유명한 갑골문甲骨文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데 <고사변> 은 고대 중국의 문헌과 근래에 발굴된 유물등에 근거하여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의 예에서 보듯이 난생설화는 동이족의 공통된 특징이다. 중국의 정사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사마천의 <史記>도 삼황오제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달랐을 뿐이다.』 自黃帝至舜禹 皆同姓而其國號
▒ 이와같은 기록들을 종합하면 결국 고대 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들어가 큰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 에서 중국의 역사도 시작되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그 뒤의 단군조선에서 갈 려져 나간 구환족九桓族, 즉 구이九夷들은 중원 대륙의 대부분을 활동무대로 하였는데, 이와 관련 하여 중국의 학자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부터 은나라와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동이족의 활동 범위는 실로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의 산동성 전부와 하북성의 발해연안, 하남성의 서북, 안휘성의 중북부 지역, 호북성의동쪽, 그 리고 요동반도(요녕성)와 조선반도 등 광대한 구역이며 산동반도(산동성)가 그 중심지역이다.』 ▒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동이족이 차지하고 살았으며 중국인들이 시조인 삼황오제가 동이족이었 다는 것은 중국의 학자들 스스로 수많은 자료와 문헌, 유물 등을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며, 저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들의 뿌리를 뒤엎는 혁명적인 주장을 할 리는 만무하다. 과정에서 성립된 왕조들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도 넓은 대륙에 산재한 56개의 소수민족은 그 잔영임에 틀림없다.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저들의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한 발버둥에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식민사관.반도사관.사대사관.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의 사학자들이다. 남의 것을 떠받 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역사의 전부인양 착각하고 있는 중국의 여러사서에는 비록 왜곡된 형태로나마 엄연히 동이족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음에도, 환단桓檀의 역사는 물론 그 이후 고조선의 역사조차 철저히 무시되어 고대 동이족의 역사는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공중에 붕 떠있는 실정이다. 하다 못해 고구려의 역사만 제대로 파고 들어가 보아도 한국 사학계의역사 인식이 어느정도로 한심한 수준인 가를 알 수 있다.
▒ 현조玄鳥의 알에서 태어난 [설]의 후손인 성탕, 즉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몰아내고 은나라를 세운 탕왕은 성씨를 자子라고 하는데, 자子는 12간지 중에서 북방北方을 의미하고 북방은 검정색을 의미 하니 이또한 현조玄鳥와 동일한 의미이다. <고사변古史辯>에서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현조는 은나 라 사람과 동일한 조상신이다'라고 하였고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라고 하였다. 文과 유사한 글자가 상당수 있어서 당시 은나라가 동이족의 문화권 내에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특히 발견된 갑골문에는 주변의 다른 나라를 길방吉方, 토방土方, 인방人方, 귀방鬼方 등으로 표기하 고 있는데, 이가운데 인방은 조선을 가리키는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 발행한 [역사지도집] 에도 고조선의 핵심 강역이었던 산동성에 인방人方을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갑골문은 은나 라가 귀방鬼方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후한서>뿐만 아니라 <단군세기>에도 기록되어 있어 두 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은나라에서 사용한 갑골문자는 후에 漢字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한자 역시 동이족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 다. 이는 갑골문을 연구한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삼황三皇이 동이족이었음을 이일봉님의 [實證한단고기]내용을 요약하여 아래에 수록한다. 삼황이후 에 등장하는 오제五帝는 그 근원을 모두 삼황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태호복희
▣배달국 5대 태우의太虞儀환웅은 아들을 12명 두었는데 장자는 다의발多儀發환웅(6대 환웅)이며 태호복희는 막내 아들로 태어나 배달국에서 우사雨師라는 관직에 있다가 중원으로 들어 갔다. 우사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역易을 만 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환역桓易 이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를 복희팔괘伏羲八卦 혹은 선천팔괘先天八卦라 한다. 결국 고대 동양의 음양오행설은 환단의 문화에서 발생한 것이다. ▣복희의 성은 풍風씨이다. 이것은 당시 동이족의 아홉갈래인 견이, 방이, 적이, 백이, 우이, 황이, 현이, 양이, 풍이風 夷중 풍족風族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복희의 탄생에 관해서 <사기>와 <중국고대신화>는 다음과같이 말하고 있다. ▣복희의 어머니 화서씨華胥氏가 어느 날 동쪽에 있는 울창한 숲속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그녀는 뇌택雷澤이라는 연 못가에서 노닐다가 우연히 대인大人의 발자국을 밟게 되었는데, 그후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면서 아이를갖게 되었 으니 이가 곧 복희이다. ▣여기서 뇌택이라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뇌雷는 팔괘중에서 진괘震卦를 말하며 진괘는 팔괘중 동방과 동 북방에 배치된 괘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은 복희가 배달국에서 출생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뇌택에서 대 인大人의 발자국을 밟고 난뒤 복희를 낳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大人은 환웅을 의미한다.
▣복희에게는 부인 혹은 누이동생이라고 하는 여와女와가 있었다. 여와는 황토를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 하는데, 이름이나 행적이 이스라엘의 민족신인 여호와와 매우 유사하다. 복희는 동방을 상징하는 나무(木)의 덕 으로 제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동방의 제왕이라고 한다.
염제신농炎帝神農
▣염제신농의 아버지는 소전少典이라고 하며 배달국의 8대 안부련 환웅의 명으로 강수姜水라는 곳에서 군사를 감 독하는 직책에 있었다. 신농의 아버지 소전은 소호금천(5제중의 한사람)과 함께 고시씨(고시례)의 방계 지류이다. 씨로부터 내려 온 농사와 관련된 집안의 내력으로 인해 농사에 능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이러 한 신농이 아버지 소전을 따라 중원으로 들어가 농사를 가르치고 의약을 만들어 의농醫農의 시조 로 불리게 되었다. ▣<사기> 삼황본기三皇本紀에『염제炎帝는 인신우수人神牛首의 형상으로 강수姜水근처에서 성장했 으므로 강씨 라 했다.』는 기록에서 신농이 소의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뿌리가 배달국의 우 가牛加, 즉 고시씨에 있음 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황제헌원黃帝軒轅
▣황제黃帝는 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少典의 자손이고 성은 공손公孫이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즉,소전은 배달 국에서 갈려져 나간 사람으로서 염제신농의 아버지이고, 그러한 소전에서 다시 갈 라져 나간 후손중의 한 사람이 공 손이며, 그 공손씨의 후손이 바로 황제헌원이다. ▣황제헌원과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왕간에는 수차례의 전쟁이 있었으며 <사기>를 비롯한 중 국의 문헌에는 황 제헌원이 치우천왕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이 자신들의 뿌리와 관련하여 황제헌 원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어서이며 이는 왜곡된 주장이다. 사실은 전쟁에서 패하여 치우천왕에게 귀의한 뒤 청구 국(배달국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에 이르러 중원을 개척하며 옮겨와 나라이름을 청구국이라 함) 고유의 천부인 3개 에서 유래한 신선도의 길을 걸었다. 이로부터 헌원에서 노자로 이어지는 도교의 근원이 배달국에서 유래되었다.
▣<사기>는 헌원의 호가 유웅씨有熊氏라 하여 그가 웅씨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먼 조상인 소전이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헌원이 자신의 군대를 '운사雲師'라고 부른 것은 그가 배달국 의 후손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그리고 그를 '황제黃帝'라 일걷는 것은 그가 오행五行에서 중앙에 해당하 는 흙(土)의 기운으로 제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제五帝중 전욱고양(BC 2513~2436)은 황제헌원의 손자이며, 제곡고신(BC 2435~2365)은 증손 자이다. 제곡고 신의 여러 부인중에 간적簡狄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간적이 [설]을 낳고 설은 순. 우 임금때 벼슬을 하고 상商이라 는 곳의 제후로 봉해졌다.[설]의 후손인 성탕成湯은 하나라 말기 에 폭군 걸왕을 몰아내고 상商(殷)나라를 세웠다.
은나라 말 사치와 향락에 빠진 폭군 주왕紂王은 바른 말로 간하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죽였다.한 때는 '포락'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뜨거운 숯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둥근 구리기둥을 걸쳐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걷게 하는 형벌이었다. 이러한 형벌을 받은 신하들은 미끄러운 구리기둥을 걸어가다가 숯불 구덩이에 떨어져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며 주왕과 달기는 이를 보면서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은나라 왕실에는 주왕의 숙부인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그리고 주왕의 이복 형제인 미자微子가 있었다(공자는 이 세 사람을 '은殷 3인仁'이라 하였다). 미자가 숙부인 비간과 기자를 찾아와 나라의 장래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의논을 하자 비간과 기자는 우선 다른 곳으로 가서 당분간 피신해 있 도록 권고하였다. 그런 뒤 비간比干은 주왕 앞에 나아가 간언을 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
주왕은 비간의 간언을 듣고 '내 들으니 성인聖人은 심장에 구멍이 일곱 개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 지 확인해 보겠다.'하고는 비간을 죽여서 그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기자箕子는 머 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며 남이 종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주왕이 이를 알고는 기자를 잡아다가 옥 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렇듯 포악했던 주왕도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불에 타 죽는 최 후를 맞이하게 된다.
비간比干
문헌과 표현방법에 따라 비간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자 또는 폭군 주왕紂王의 숙부라고 되어있다. 왕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마지막'이라는 표현이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주왕의 숙부라는 표현 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간]은 29대 태정제(太丁帝)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태정제의 맏아들은 30대 을제(乙帝)가 되었다. 아마도 [林氏先祖寶鑑]에서 비간을 '마지막 왕자'라고 표현한 것은 을제(乙帝)를 이어 받은 마지막 주왕紂王이 하나라의 걸왕傑王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으며 나라를 망치고 무수한 충신들을 참살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왕통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숨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은나라 '마지막 왕자 비간'이 순국하자 비간의 부인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 으로 장림산長林山 석실에 피신하여 그 후에 아들을 낳으니 처음 이름을 泉이라고 지었는데 泉의 나이 3세때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가 건국되자, 주의 무왕武王이 그 혈통을 찾아 장림산의 '림'을 따서 林 氏를 사성賜姓하였고 굳굳하게 성장할 것을 뜻하여 '견堅'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고 있다고 한다. 비간의 후손에 대한 상세 내용은 아래 [비간의 후손] 내용을 참조하시라.
▒ 기자箕子 기자箕子는 비간比干의 친 동생이다.기자에 관한 내용은 이일봉님의 [實證 한단고기]을 인용해보 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뒤에 은나라의 폭군 주왕에 의해 투옥되어 있던 기자를 석방하고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정황으 로 미루어 실로 공상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 다는 기록은 후대에 왜곡.날조된 기사가 분명하다. 둔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제 갓 태어난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막강 한 조선의 왕으로 봉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결국 기자조선설은 후대에 조선이 쇠락하면 서 중원의 세력이 커지자 당시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독자적으로 은나라 를 물리칠 능력도 없어서 여러 동이東夷들의 도움으로 거사를 성사시켰던 무왕이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단 말인가. 주지하다시피 <서경>은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공자(BC 552~479)가 말년에 편찬했다는 문헌이고, <사기>는 한나라 때 사마천司馬遷(BC 145~86)이 저술한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이다. 이 두 문헌은 아무런 근거나 출처도 밝히지 않고 기자와 관련된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자와 사마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기보다는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서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한 가운데 진한이 북부여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중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번한(번조선 : 이 무렵 에는 한나라에서 도망해온 위만이 차지하고 있었음)도 엄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문헌에 기록 된 내용은 후대에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공자와 사마천이 직접 기록했다면 의도적인 곡필임 이 분명하다.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이 된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나라나 주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며 기자조선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 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학자들도 집해集解.정의正義.색은索隱에서 한결같이 기자의 무덤이 황하 남쪽의 하남성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양국梁國의 몽현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梁國蒙縣 有箕子塚 양국의 몽 현은 현 하남성 상구商丘시 일대를 말하는 것을, 상구는 옛 은나라를 일명 상商이라고 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그곳에 기자의 무덤이 있으며, 그곳에서 서남쪽에는 <단군세기>에서 기자가 말년에 살았다고 한 서화西華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은 기자와 마찬가지로 은나라의 왕족이 었던 미자微子가 다스리던 송宋나라 지역이다. 기자가 이곳 서화에서 두문불출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쳤기 때문에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고 중국의 학자들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훗날 이곳은 기자가 살았다 하여 지명이 기성箕城으로 바뀌기도 했다. 중국의 문헌인 <수경주水經注>는 기성箕城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안에 은나라 탕왕湯王의 무덤이 있고, 그 서쪽에는 기자의 무덤이 있다.』 城內有成湯塚 其西有箕子塚
양국 몽현에 기자의 무덤뿐만 아니라 은나라를 세운 탕왕의 무덤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기자가 옛 은나 라 땅인 송나라에서 은거하다가 탕왕의 무덤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는 말이 된다.』 ▒ 미자微子 미자微子는 폭군 주왕紂王의 이복형제이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아들 인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해서 옛 은나라 백성들의 동요와 반란을 막고 은나라의 제사가 끊기지 않도 록 배려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무경은 무왕의 다른 형제들과 공모하 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무경이 죽자 미자微子가 제후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이를 송宋나 라라 하였다. 송나라는 옛 은나라 땅에 있었다.
▒ 기자箕子의 후손과 폭군 주왕紂王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아래 자료는 왕족중 장자였던 비간比干의 후손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 것인데, 이 기록은 특정 성씨를 선전 하거나 광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은왕조 멸망시의 왕족의 신분으로 주왕紂王의 폭정을 바로 잡기 위 하여 간언하다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후대를 추적해봄으로서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발굴에 일익이 되기 위함이며, 한편으로는 비간 이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대손]으로 아래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황제헌원과 비간, 황제헌원과 동이 족의 연계성을 수립하기 위해 부득이 林氏先祖寶鑑중의 일부를 수록하였으니 양지하시고 이 자료를 보시는분들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족보라는 것은 만드신 분들이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통해, 심지어는 해외출장 조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집념과 노력의 결실임을 생각할 때 충분히 역사연구의 한 근거가 될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다만, 본 林氏先祖寶鑑상에는 헌원황제가 동이족이었음을 주장 하거나 그러하리라고 예상한 언급이 전혀 없어 섭섭하던터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역사 연구가이 신 이일봉님의 저서 [實證 한단고기]를 발견하고 읽어본즉 은나라에 대한 언급이 상상외로 많이 수록 되어 있어 그 내용을 위에 서술한 [은왕조가 동이족이었다는 고증 및 사례]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하 였다.
▒ 다음은 수풀림林 한국종친대종회에서 발간한 임씨선조보감林氏先祖寶鑑에 수록되어 있는 '林氏의 源流를 찾아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땅의 임씨林氏는 득성得姓 이후 3천 백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고대 중국땅에서 2천년을, 그 리고 한국에서 천 백여년 동안 조상님들의 맥이 이어져 왔다고 하겠다. 중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은殷나라 마지막 왕자王子이신 비간(比干 : 3090년전)공을 꼽을 것이다. 이분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세 후손이시며 그당시 은나라 3인(비간比干, 기자箕子, 미자微子)중 한분이시다. 중국 정부에서 옛날부터 이분을 추앙하기 위하여 비간능比干陵을 위시하여 삼인사 三仁祠등 여러 곳에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득성임씨得姓林氏는 비간공의 아드님 이신 임견林堅공이신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임견공이 장림산長林山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장림산 중 림林자를 따서 임씨林氏라 사성賜姓하였고, 견고하게 자랄 것을 뜻하여 견堅자로 이름을 지어 임견林堅으로 호칭하니 바로 이분이 득성시조得姓始祖이다. 그리고 이분의 아버님이신 비간공을 태시조太始祖라 칭한다. 득성시조 임견공으로부터 우리나라 임씨를 살펴보자. 득성조로부터 중국땅에서 2천년을 이어왔고, 그간에 많은 선조님들이 중국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중 몇 분을 소개하면 성인聖人 공자孔子 의 큰손 역할을 하신 득성조 23세인 임방林放공이 계시고 득성조 64세인 진안군왕晋安君王 임록林祿 공이 계시다. 이어 득성조 80세인 임온林蘊공이 계신데 이분의 9형제가 모두 자사刺史를 지내어 9목 사九牧詞라 칭하였고, 이분의 고손高孫인 임팔급 林八及공께서 당나라 말 한림학사병부시랑翰林學 士兵部侍郞의 벼슬을 하던중 변방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동료 7학사學士와 함께 고향 중국의 팽성 으로부터 배를 타고 당시 통일신라의 아산만 상류로 동도東渡하여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하 시니 이분이 우리나라 林氏의 시조가 되었다(···) -중략- 』
▒ 아래는 임씨한국종친회 각 본관 대표들이 선조 제향참례를 위해 중국에 직접 방문하여 중국, 대만 등 세계의 종친회원들을 만났을 때의 기행문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 지난 1995년에 중국의 제향참례 및 조상순례를 인도하여 춘추春秋로 2회 다녀올 수 있었다. 춘계제향春季祭享은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의 태시조 비간릉比干陵에서 행사 하였는데 대규 모의 태시조 릉과 많은 사당, 제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비간공을 비롯하여 이분의 비碑 와 적자 득성원조 임견공과 손자 두분의 상像을 배향하여 모셔 놓았고 오래된 수많은 비석과 넓은 광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에 참여한 각 국의 종친 대표들이 각 나라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질서있게 입장하여 제향참배를 하게 되니 3천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조상이 얼이 새로웠다. 특히 중국 정부기관에서 우리 일행을 특별히 보살피기를 호텔에서부터 호위가 삼엄하였고 차편으로 갈 때 는 앞뒤로 경찰이 에스코트를, 연도沿道에는 교통결찰이 거수경례를, 행사장에는 당비서.시장.서장 등 관리들이 환영하였으며 악대까지 동원하여 환영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또한 위휘시 목야 牧野에 장림산長林山이 있는데 이곳은 임견공 출생지로서 석굴에는 출생한 견堅공을 안고 있는 어머니 진씨陳氏의 상이 있고, 큰 글씨로[林堅出生地]란 안내석이 있었으며, 큰 비碑에는 황제黃帝 (황제헌원)로부터 내려온 내력과 득성得姓하게된 내용이 담겨져 있어 옛일을 한 눈에 회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다음으로 하남성 안양에 있는 은허지殷墟趾를 찾았는데 은나라 왕궁으로서 비간공 이 전에 계셨던 조상님들의 왕궁인 것이며 고색이 짙은 상형문자와 갑골문자로 치장해 놓았는데 보존이 잘되어 있었고 조상님들이 나라를 통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태시조 비간공으로부터 현존하고 있는 상고대 조상님들과 팔급八及공이 사시던 집까지 찾았으니 팔급공의 계대 연결은 적중한 것이다. 우리 임씨는 황제헌원으로부터 32대 은나라 마지막 왕자인 비간比干공을 태시조太始祖로, 이분의 아들인 임견공(BC 1121)을 원시조로, 동도東渡하신 임 팔급공을 시조로 하여 뿌리가 확실하게 어어진 것이다.(…) 팔급공과 그 일행이 신라국 아산만에 정착하 면서 토성을 쌓고 뗏집을 지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팽성彭城이란 팔급공의 고향 지명을 불러 팽 성이 생겼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겠으며, 또한 중국 당나라 성주의 고관 후손이요, 한림학사 병부 시랑이란 막중한 벼슬이었던 팔급공이 토성에 사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최근 1988년 수원대학에 의해 팽성에 있는 농성濃城에 대한 학술발표회가 있었던 바 팽성임씨彭城 林氏(본관 평택임씨를 말함) 시조 팔급공이 축성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발표를 하였고, 현재 평 택시에서 이 농성의 복원사업을 마쳤다. 또한 이 곳 지명을 팔급공의 고향故鄕 지명인 팽성彭城으 로 지어 불러온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현재 평택시 팽성읍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팔급공은 이곳 에서도 외침을 막는데 분투하였고, 이에 신라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셨으니(…) 우리 한국에 있 는 임씨는 기원전 1121년에 득성하여 중국에서 2000년을, 그리고 대개가 1100여년 전에 동도하신 임팔급공의 후손들이다. 관향을 달리하고 있으나 우리 林氏는 한 할아버지(비간)의 자손임이 분명하다...』
▒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1999년 현재 세계에 퍼진 임씨종친의 인구수가 약 7천만명인데 중국대륙에 6천만명정도가 살고 있으며 중국외의 전 세계 곳곳에 1천만명이 살고 있고 그 1천만명 중에서 우리 나라에 약 1백만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林氏先祖寶鑑의 내용대로라면 전 세계의 수풀林을 쓰는 사람 들은 시조가 한분이며 그분은 고대 은나라 말 三仁중 한 사람인 비간比干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 다음은 저 유명한 기자箕子의 조선朝鮮 망명설과 관련, 비교 연구의 여지가 있을듯하여 임윤화 林允華 대법사의 축간사祝刊辭를 인용해 본다.
『…우리 林氏 조상의 원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林氏 太始祖 비간공은 순국하시고, 그 동생 기자箕子 는 해동 단군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건국, 태조대왕이 되시고, 미자微子왕자는 국외로 추방되 었던 것입니다. 비간공의 부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 석실에 피난하여 아들을 낳으니 子 천泉 이었던 것입니다. 3세시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의 무왕武王이 長林山의 林을따서 임씨로 사성 賜姓하고 원래의 이름인 천泉을 견堅으로 하여 임견공이 수풀림의 득성시조가 되셨습니다…』
기자의 조선 망명설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도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으며, 기자는 조선 으로 오지 않았다는 [實證 한단고기]를 쓴 이일봉님과 [古記로 본 古代韓國史]의 한순근님의 말씀에 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역사가 왜 5천년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나 뚜렷한 논리가 없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근원인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이어지는 상고시대의 계보를 모두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뿌리인 환단桓檀의 역사를 잡초밭에 묻어두고서 역사를 논한다 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고대 환단시대로부터 우리 민족은 고도의 정신적 이념과 철학을 갖추고 문무를 겸비한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는 '군자국君子國'이라 불렀으며, 큰 활 (大 + 弓 = 夷)을 잘 다루는 민족이라 하여 여러 사서와 문헌에서 동이東夷, 구이九夷, 이적夷狄 등 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한민족의 장려했던 고대 역사를 잃어 버린 것은 우리민족의 혼을 잃어 버린 것이나 진배없다. 그결과 오늘날 한국의 사학계는 중국의 사서에서 왜곡되고 날조된 부분만을 취 하고, 진실로 취해야 할 부분은 반도사관半島史觀에 에 물든 자신들의 모순된 역사관점으로 하여 모두 부정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 역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 일반 국민들도 역사에 관한 한 왜곡된 진실을 알고 있는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국민들 일부중에는 유태인들의 족 보는 훤하게 꿰고 있으면서 본인 가문의 뿌리 ,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의 근원에 관해서는 도외시 하 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심지어는 우리 민족의 뿌리가 유태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비롯되었 다던지, 현세의 세계인들은 모두 대홍수 이후 노아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것은 거창하게 민족 운운 할 것도 없이 자신들의 부모, 조부, 그리고 그 윗대를 조금만 살펴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닌가. 일가一家의 계보를 사다리 타듯이 타고 올라 가 보면 분명히 그 정점에는 필연적으로 도달 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중국과 일 본학자들, 사서와 문헌까지도 우리의 잃어 버린 역사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 을 벌인 것이다. 漢나라의 漢이라는 국호자체도 옛날 삼한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했다. 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이는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라고 하 였다. 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한다. 양운국養雲國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한다. 구막한국寇莫汗國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며, 일군국一群國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 하는데, 이를 계산해 보니 숙신에서 5만여 리를 가야 한다" 라고 하였다. 만물이 생生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근본은 땅에서 나온다. 때문에 천성이 유순하며 도로써 제어하 며,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에 이르렀다." 라고 하였다. 데 어떡하시겠습니까?" 공자 왈 "군자가 거처하는 곳인데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에게서 구하였다." 라고 하였다.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제준(은나라에서 섬기던 동방의 상제), 제곡(제곡고신. 五帝의 한사람), 제순(순임금), 소호(소호금천.五帝의 한사람), 그리고 설(은나라 탕왕의 조상) 등 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라고 하였다. 이 세운 나라의 호칭만 달랐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소호(소호금천. 五帝중의 한사람)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라고 하였다. 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三皇중의 한사람) 등의 본래 종족이 있 던 곳이다." 라고 하였다. 있다" 라고 하였다. <사기>의 집해集解에는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함향성 안에 있다. 그 높이는 7장丈으로 백성들이 늘 10월에 제를 올린다." 라고 하였다. 靑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 자부紫府선생을 만나 뵙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으며 이로써 만신萬神과 어울렸다." 라고 하였다. 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기 때문에 천자라고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①"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조선인 후손들에 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들을 경시하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 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 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을 <반일본 인>으로 만드는 요건인 것이다." 일제는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악랄한 정책을 이행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전통 문화와 역사의 말살을 꼽을 수 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민속 조사를 실시하고 우리의 민속 신앙들을 미신으로 몰아세웠다. ②우리의 민속 신앙은 일제의 조선에 대한 반일본화 작업에 있어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다각적 인 탄압을 진행하는 한편, 학무국에서는 신사. 신도 정책을 펴 나가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 참배 를 의무화했으며, 사회과에서는 우리의 민속 신앙을 미신(迷信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함) 으로 간주하는 사회 교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③일제의 사서 20 여만 권 소각과 더불어 시작된 조선사의 편찬은 '공명. 정확'한 사서의 편찬을 위해 사료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감행하였는데 1차로 1910년 11월부 터 다음해 12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37년까지 이루어졌고 압수 대상 서적은 단군 관계 조선 고사서, 조선 지리, 애국 충정을 고취하는 위인 전기. 열전류 및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조선 세종 때부터 단군 관계 사서를 수집하여 장서각 및 규장각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들 사서 가운데는 귀중한 단군 관계 고사서가 많았으리라 추측된다. ※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 태웠다. ④또한, 일제는 삼국유사 대목을 조작해서 고대 한국이란 나라의 실제를 슬그머니 한 개인의 이야기 로 만들어 버렸다. 즉, 환국-배달국-단군조선 7천년의 역사를 환인→환웅→단군 3대의 이야기로 축 소해 버렸다. 예를 들면 ▷ 원본 : 今有桓國(옛날에 환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 조작 : 今有桓因(옛날에 환인이란 사람이 있었다) ⑤일본이 단군을 없애기 위해 내세운 이론적인 이유로 첫 번째는 신화라는 이유, 두 번째는 고증(유물) 이 없다는 이유, 세 번째는 문헌(사료)가 없다는 이유를 들고 있으나, 사실 신화라는 말이 붙는 것은 전부 실존인물이다. ※ 김해김씨 시조 수로왕의 난생신화, 박혁거세의 난생신화, 고주몽 신화, 석가는 어머니 옆구리에서 탄생, 노자(老子)는 80년만에 탄생,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 ⑥물증문제에 대해서 고고학은 부재료일 뿐이다. 역사학자가 못 밝혀 낸 부분에 대해 유물로서 보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고사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 또는 신화를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단군릉이 평양에 있다는 것은 역사에 나와있는 사실이다. 단군릉에서 출토된 왕관을 감정(56회) 결과, 5,011년으로 결론이 나왔다. ※ 1926년 동아일보기사 : 모금운동하여 제사를 지냈다 ⑦그리고 문헌문제에 대해서 정사(正史)는 국가가 만든 것으로 오히려 권력에 의한 조작의 가능성이 높다. 야사(野史)는 개인이 만든 것이지만 예를 들어 족보를 개인이 만든 것이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위서라고 판명 나기 전까지는 과감하게 인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우리민족의 시조는 단군 한분 이 아니라 환국의 1대환인 [안파견] -배달국의 1대 환웅 [거발환]-단군조선의 1대 단군 [왕검]의 계보로 이어져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직책이름이 대통령이지 사실은 초대 이승만으로 부터 여러분이 지금까지 이끌어 오지 않았는가! ⑧일본인 학자들이 최태영박사(올해 100세가 된 원로 법학자이자 역사연구가이며 독실한 기독교신 자임)에게 한 충격적인 고백이다. "우리도 다 안다. 우리가 조선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였다는 것을. 일본이 이렇게 빨리 문명화된 것은 다 역사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알렸다가는 자부심이 없어지고 기가 죽어 안되니까 거꾸로 해 서 용기를 내게 했다. 기를 살려서 청일, 러일전쟁 이겼다. " <일본인 학자들 고백> "일본 사람들은 다 알고 속이는데 우리는 모르고 속고 있다. 우리만 모르고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 일본인들이 왜곡해 놓은대로 속고 있다" "일본땅에서 직접 일본인들의 역사기록을 숨겨놓은 현장을 목격했다. 우리의 잃어버린 사서의 대부분이 일본 황실도서관(정창원)에 주로 있을 것이다" <최태영 박사 증언> ①고구려 동천왕 18년(224)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 환도성을 공략하여 사서 소각
어디에다 두어야 할 것인가. 이제는 한분의 단군 할아버지로 묘사되던 시조 개념, 그런 교육의 우는 범하지 말아야겠다. 본인도 어릴 때 "단군 다음은 누구지?"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 학생들을 가르친 선생이나 그 선생을 가르친 선생이나 모두 혼돈의 시대와 잃어 버린 공간을 살아온 사람들이니 만치 그들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환국 3301년-배달국 1565년-단군조선 2096년- 그리고 고구 려로부터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유구하고도 찬란했던 역사. 이제부터라도 왜곡된 역사를 바로 알고 또 후손들에게 전하면 되지 않겠는가. 삼성기(三聖記) 하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고 한다. 나반이 처음 아만(阿曼)을 만난곳은 아이사타(阿耳斯陀 )였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九桓)의 무리는 모두 그들의 후손이다.』 後也 *구환(九桓) : 중국의 수많은 문헌들은 우리 민족을 가리켜 동이(東夷), 구이(九夷), 구려(九黎)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동이가 아홉종류이기 때문이다. 구환(九桓) 역시 동일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삼성기]에는 구환(九桓)이라는 말이 있고 [태백일사]에는 구황(九皇)이라는 말이 나온다. 두 문헌 에서 말하고 있는 9환과 9황은 동일한 뜻, 모두 환국(桓國)에서 갈라져나간 우리 민족을 일컫는다. 즉, 본국에서 갈려져 나간 지류가 아홉종족이라는 의미이다. [삼성기]상편에 의하면 '우리 환(桓)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에 있었다. 한 神이 사백력(斯白力 ; 지금의 시베리아)의 하늘에 있어 홀로 화하여 신이 되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어느날 동녀동남(童女童男) 800 명이 흑수(黑水 ; 흑룡강 혹은 바이칼 호수를 가리킴)와 백산(白山 ; 중앙아시아 일대의 천산 산맥과 알타이 산맥으로 추정)의 땅에 내려왔다.(.....)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천제 환인(天帝桓因)이라 했으며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불렀다. 1대환인 안파견으로부터 7대환인 지위리(智爲利)까지 존속했으나 각 환인의 연대는 알 수 없다.' 吾桓建國最古 有一神在斯白力之天 爲獨化之神 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 日降童女童男八 百 於黑水白山之地(....) 謂之桓國 是謂天帝桓因 亦稱安巴堅也 傳七世 年代不可考也 [삼국유사]에서는 환인을 가리켜 제석(帝釋)이라 하여 하느님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했는데,[삼성기] 본문에서도 같은 의미인 천제환인이라 하여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또한 桓國을 다스린 환인도 한명이 아니라 역시 7대까지 전해졌으며 그 시조를 안파견이라고 호칭했음을 말하고 있는데 안파견 이란 '아버지'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삼성기]나 [태백일사]에 의하면 환국의 역대 환인은 7세를 전했으며 그 전체 역년은 3,301년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실재로는 7세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7세에 3,301년이라면 1세에 평균 450 년이 되는데, 이것은 7세의 역년이라기 보다 환국이 당시의 여러사정 으로 인해 안정되지 못하다가 나라가 자리를 잡고 난뒤에 7세를 전했으며 그 이전의 역년까지를 합 해서 3,301년이라고 말한 것으로 사료된다. 혹 그렇지 않다면 7세이외에는 기록이 소실되었거나, 아 니면 7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에 의한 환 국시대의 연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역대 재위연수 환인명 서력 1대 미상 안파견(安巴堅) BC 7197 2대 미상 혁서(赫胥) 3대 미상 고시리(古是利) 4대 미상 주우양(朱于襄) 5대 미상 석제임(釋提壬) 6대 미상 구을리(邱乙利) 7대 미상 지위리(智爲利) BC 3898 [삼성기]에는 환국(桓國)이 12개의 연방, 즉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 필나국畢那國이라고도 한다),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 직구다국 이라고도 한다),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이국(鮮 裨爾國 : 시위국 혹은 통고사국이라고도 한다), 수밀이국(須密爾國) 인데, 그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시 2만여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강역을 살펴보면 현재의 러시아 일부와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몽고, 중국, 일본, 서아시아에 이르 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러한 대제국이 사방으로 쪼개져 지금도 북으로는 시베리아 일대와 남으 로는 중국남부와 미얀마, 태국 일대까지도 우리민족과 비슷한 외모와 풍습을 지닌 민족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이며,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 알래스카의 에스키모족 까지도 동이 계통이 인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12연방가운데서 수밀이국(須密爾國)은 고대 슈메르(sumer)인들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환인]이라는 최고직책이 다스리던 환국의 역사가 7대 3,301년으로 막을 내리고 환웅이 통치하는 시대가 열렸다.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세 개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으 로 내려와 신시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삼성기>상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뒤에 환웅씨桓雄氏가 계승하여 일어났다. 天神의 뜻을 받들어 白山과 黑水사이에 내려왔다.(.....) 천부인天符印을 지니고 다섯가지 일을 주관하였으며, 세상에 머무르며 인간을 교화하고 크게 이롭게 하였다.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배달(倍達)이라고 하였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지 상 최고이 신으로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신시말기에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의 14대 환웅을 말함)이 있었으니 청구靑邱를 개척하여 18세를 전했으며 그 역년은 1565년에 이르렀다』 이것은 1대환웅인 거발환 환웅이, 말기 환국에서 분가하여 백두산과 흑룡강사이에 나라를 세우고 정착을 했다는 내용인데, 거발환 환웅이 나라를 세우게 된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삼국유사> 는 서자庶子 환웅이 자주 인간세계에 뜻을 두었으므로 환인은 그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면서 인간을 교화하고 넓게 인간을 이롭게 하라(홍익인간弘益人間)면서 내려보낸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태백일사>의 신시본기神市本紀는 1대환웅 거발환이 환국에서 분가하여 지상세계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이 정황을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대기>에 이르기를, 당시 사람은 많고 생산은 궁핍하니 살아갈 방법이 없어 근심거리였다. 서자 부庶子部의 대인 桓雄이 있어 여러 사정을 깊이 있게 듣고 살핀 뒤 하늘에서 내려가 지상에 광명세 계를 열고자 하였다. 그때 안파견(여기서는 1대 환인이 아니라 7대 지위리 환인을 말함)이 지상세계 의 금악金岳, 삼위三危, 태백太伯을 두루 살핀 뒤에 태백은 가히 홍익인간 할 만하므로 환웅에게 명 하여 가로되, '이제 사람.물건.업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군君은 무리를 거느리고 하계에 내려가 하 늘을 열고 가르침을 배풀어 천신에게 제를 올리는 것을 주관하며. 천부天父의 권위를 세우고(.........) 사도師道를 세워 세상을 이치대로 교화하며, 자손만대로 큰 모범이 되게 하라' 하시며 마침내 천부인 3개를 주면서 하계로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 오니 이를 신시神市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 0여 가지 일을 주관하였다.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교화하고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였으니 이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上 時安巴堅遍視金岳三危太伯 而太白可以弘益人間 乃命雄曰 如今人物業己造完矣 君勿惜勞苦 率衆 人躬自降往下界 開天施敎主祭天神 以立父權(....) 以立師道 在世理化 爲子孫萬世之洪範也 乃授天 符印三個遣往理之 雄率徒三千 初降于太白山神檀樹下 謂之神市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刑主 病主善惡 凡主人間三白六十餘事 在世理化 弘益人間 是爲桓雄天王也 庶子部의 대인大人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庶子'는 '여러아들'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왕실의 여러 왕자를 일컫는 말이며, <조대기>의 내용처럼 환웅은 이러한 여러 왕자들을 관장하는 부서인 庶子部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서자부의 大人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가 나라를 세운 뒤에는 환웅 천왕이라 불렀으며, 또 대인 환웅이라고도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5事(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 악)중 곡식을 주관하는 업무(농.축업)를 분담하여 관장하던 직책의 명칭을 5가家라 하여 우가牛 加, 구가拘加, 저가楮加, 마가馬加, 양가羊加를 두었는데, 곡식을 주관하는 업무는 우가가 맡았으 니 <태백일사>나 <규원사화>에 의하면 고시례高矢禮에게 이일을 맡겼다고 한다. 고시례는 고시 씨高矢氏라고도 하는데 오늘날 고사를 지낸후 또는 농사철에 들이나 야외에서 음식을 먹기 전 에 '고수레' 또는 '고시례' 라고 외치는 풍속은 원래 먹여살리는 일을 담당했던 고시씨에 대한 예 의를 표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삼성기>의 신시역대기가 전하고 있는 배달국 시대의 연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8대 1565년간 존속). 왕대 환웅명 즉위년수 즉위년도 수명 비고 1대 환웅천황(桓雄天皇) 94 BC 3898 120세 일명 거발환(居發桓) 2대 거불리(居佛理) 86 BC 3804 102세 3대 우야고(右耶古) 99 BC 3718 135세 4대 모사라(慕士羅) 107 BC 3619 129세 5대 태우의(太虞儀) 93 BC 3512 115세 6대 다의발(多儀發) 98 BC 3419 110세 7대 거련(居連) 81 BC 3321 140세 8대 안부련(安夫連) 73 BC 3240 94세 9대 양운(養雲) 96 BC 3167 139세 10대 갈고(葛古) 100 BC 3071 125세 독로환이라고도 하였슴 11대 거야발(居耶發) 92 BC 2971 149세 12대 주무신(州武愼) 105 BC 2879 123세 13대 사와라(斯瓦羅) 67 BC 2774 100세 14대 자오지(慈烏支) 109 BC 2707 151세 치우천왕蚩尤天王 이라고도 함 15대 치액특(蚩額特) 89 BC 2598 118세 16대 축다리(祝多利) 56 BC 2509 99세 17대 혁다세(赫多世) 72 BC 2453 97세 18대 거불단(居弗檀) 48 BC 2381 82세 일명 단웅(檀雄)이라고도 함.이른바 고조선 1대 단군 왕검의 父. ※ 역년 계산법 1대 거발환 환웅 즉위년도 BC 3898년 18대 거불단 환웅 즉위년도 BC 2381년 3898-2381=1517년 1517년 + 48년(18대 거불단 환웅재위년수)=1565년 ① 개요 의 왕녀이다. 신묘년(기원전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檀樹)아래서 태어났다.(…) (왕검이 14세 되던 해인) 갑진년(기원전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삼아 대읍大邑의 국사를 섭정하게 하였다. 무진년(기원전 2333년) 요임금 때 단국檀國에서 아사달 단목檀木의 터에 이르니 나라사람들이 천제天帝의 아들로 추대하였다. 이에 구환九桓은 하나로 통일 되었고 신과같은 교화는 멀리까지 미치게 되었다.(…) 무진원년(기원전 2333년) 개천한 지 1565년 되 는 해 10월 3일에 신인神人 왕검은 오가五加의우두머리로서 무리 800을 이끌고 단목檀木의 터에 정 착했다.(…) 신시神市의 옛 법규를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우니 이를 조선朝鮮이라 한다. 古記云 王儉父檀雄 母熊氏王女 辛卯五月二日寅時生于檀樹下(…) 甲辰熊氏王聞其神聖 擧爲裨王 攝行 大邑國事 戊辰唐堯時 來自檀國至阿斯達檀木之墟 國人推爲天帝子 混一九桓 神化遠(…) 戊辰元年 開天一千五百六十午年上月三日 有神人王儉者 五加之魁 率徒八白 來御于檀木之墟(…) 復神市舊規 立都阿斯達 建邦號朝鮮 본문에서는 단군왕검이 14세때 왕을 보필하는 비왕裨王(卑王)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였는데 그후 단군조선에서는 우현왕右賢王 , 좌현왕左賢王이라 하여 계속해서 비왕제도를 두었고 이러한 제도 는 동이족이 한 갈래인 흉노족도 그대로 답습하였다. 檀國이란 당시 배달국에 속해 있던 여러 소국 중 하나였는데, 이에 대해 <태백일사>는 "熊族중에서 단국檀國이 가장 강성했다(熊族之中 有檀 國最盛)"고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웅족熊族이란 雄族의 다른표현으로 생각된다. ② 건국배경 로이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태백일사>에 의하면 『웅씨熊氏의 왕이 전쟁중에 붕어 하니 왕검은 마침내 그 자리를 이어받아 九桓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熊氏王崩御戰 王儉授代其位 統九桓爲一 여기서 말하는 '웅씨熊氏의 왕'이 왕검의 아버지 거불단 환웅인지 아니면 熊族웅족의 왕인지는 알수 없으나 보통 환웅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웅족은 이미 환웅의 배달국에 귀속했으므로 『雄』과 『 熊』을 동일한 뜻으로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다음과 같은 설명도 가능하다. 즉, 웅족熊族이 다스리던 단국檀國을 이미 비왕裨王으로 있던 왕검王儉이 섭정하다가. 웅족의 왕이 전사한 뒤 아버지인 거불단 환웅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아사달에 이르러 새로이 건국했을 가능 성이 있다. ③ 단군조선 역년 왕대 단군명 즉위년도 왕통 재위년수 1대 왕검(王儉) B.C 2333년 시조 93년 2대 부루(扶婁) B.C 2240년 태자 58년 3대 가륵(嘉勒) B.C 2182년 태자 45년 4대 오사구(烏斯丘) B.C 2138년 태자 38년 5대 구을(丘乙) B.C 2100년 양가 54년 6대 달문(達門) B.C 2084년 우가 36년 7대 한율(翰栗) B.C 2047년 양가 54년 8대 우서한(于西翰) B.C 1993년 ? 8년 9대 아술(阿述) B.C 1985년 태자 35년 10대 노을(魯乙) B.C 1950년 우가 59년 11대 도해(道奚) B.C 1891년 태자 57년 12대 아한(阿漢) B.C 1834년 우가 52년 13대 흘달(屹達) B.C 1782년 우가 61년 14대 고불(古弗) B.C 1721년 우가 60년 15대 대음(代音) B.C 1661년 ? 51년 16대 위나(尉那) B.C 1611년 우가 58년 17대 여을(余乙) B.C 1552년 태자 68년 18대 동엄(冬奄) B.C 1484년 태자 49년 19대 구모소(牟蘇) B.C 1435년 태자 55년 20대 고홀(固忽) B.C 1380년 우가 43년 21대 소태(蘇台) B.C 1337년 태자 52년 22대 색불루(索弗婁) B.C 1285년 탈취 48년 23대 아홀(阿忽) B.C 1237년 태자 76년 24대 연나(延那) B.C 1162년 태자 11년 25대 솔나(率那) B.C 1150년 태자 88년 26대 추로(鄒魯) B.C 1062년 태자 65년 27대 두밀(豆密) B.C 997년 태자 26년 28대 해모(奚牟) B.C 971년 ? 28년 29대 마휴(摩休) B.C 943년 ? 34년 30대 내휴(柰休) B.C 910년 태자 35년 31대 등올(登 ) B.C 874년 태자 25년 32대 추밀(鄒密) B.C 849년 태자 30년 33대 감물(甘勿) B.C 819년 태자 24년 34대 오루문(奧婁門) B.C 795년 태자 23년 35대 사벌(沙伐) B.C 772년 태자 68년 36대 매륵(買勒) B.C 704년 태자 58년 37대 마물(麻勿) B.C 646년 태자 56년 38대 다물(多勿) B.C 590년 태자 45년 39대 두홀(豆忽) B.C 545년 태자 36년 40대 달음(達音) B.C 509년 태자 18년 41대 음차(音次) B.C 491년 태자 태자 42대 을우지(乙于支) B.C 471년 태자 10년 43대 물리(勿理) B.C 461년 태자 36년 44대 구물(丘勿) B.C 425년 추대 29년 45대 여루(余婁) B.C 396년 태자 55년 46대 보을(普乙) B.C 341년 태자 46년 47대 고열가(古列加) B.C 295년 대장군 58년 단군조선 이후의 북부여, 고구려, 삼한(진한·변한·마한), 신라, 백제, 발해(대진국)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우리가 기존에 알아왔던 우리민족사의 오류들은 단군조선 까지에만 그치지 않고 그 후에 이어졌던 한반도와 중원지역에 있었던 우리의 뿌리 곳곳에 상처가 되어 심어져 있 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정신세계사에서 발행한 [實證 한단고기, 이일봉 著, 1998. 7. 20] 및 새 암출판사 발행 [古記로 본 韓國古代史, 한순근 著, 1997. 9]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일봉님 의 저서는 2002. 6월현재 서점에서 구입이 가능하나 한순근님의 저서가 초판이후 절판 되었다면 인터넷상의 http://home.megapass.co.kr/~hsg1000/index.htm로 접속하여 우리 뿌리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참고문헌』사이트로 이동하시면 정보 획득에 필요한 많은 추천도서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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