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1 나해 연중6주일
열왕하 5:1-14 / 1고린 9:24-27 / 마르 1:40-45
반전(反轉)의 비밀
현대 올림픽의 원조인 고대 그리스에서는 4년마다 각 도시국가들이 모여서 올림픽 경기를 했습니다. 오늘 제2독서 고린도 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올림픽 경기 종목 중 달리기와 권투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예를 들어 신앙인들도 믿음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당부하십니다.
최근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축구대회는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의 예상을 깨는 반전의 재미를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한국팀이 4강에서 좌절했지만 재미있는 경기들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경기가 한국 대 호주와의 경기, 그리고 이란 대 일본과의 경기였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16강전에서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승부차기까지 가며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호주는 한국보다 더 쉬어서 체력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었고 체구도 커서 한국팀이 객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기결과 한국은 2대1로 호주를 이겨서 4강에 진출했습니다. 반면에 강력한 우승후보이자 아시아에서 축구실력이 제일 높다고 평가받고 있던 일본은 이란에게 2대1로 져서 4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이에 일본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축구에 관심있는 사람들도 예상을 벗어난 결과에 놀랐습니다.
비록 오늘날에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으로 축구팀들의 실력을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승리에 대한 예측율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종종 예상을 깨는 반전의 묘미에 사람들은 매료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운동경기는 우리의 노력과 땀을 정당하게 평가받는 자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예측을 벗어난 결과로 재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반전이 주는 놀라움은 오늘 제1독서 열왕기 하권에서 나병에 걸린 시리아장군 나아만의 이야기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서로 적대국가인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리아가 이스라엘로 쳐들어 갔다가 거기서 포로로 잡은 어린 소녀를 하녀로 삼았는데, 그 소녀가 나병 걸린 나아만에게 자기나라에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는데 그가 충분히 고쳐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나아만은 시리아왕께 이 사실을 보고하자, 왕은 그가 적대국가에 가서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친서와 선물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이것을 또다시 공격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요구로 여겨 불안해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병은 고치기 불가능한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반전이 일어납니다. 엘리사 예언자가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반드시 낫겠다는 희망를 갖고 예언자가 지시하는 어떤 것도 하겠다는 자세로 엘리사에게 갑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를 만나주기는커녕 사람을 시켜서 개울과 같은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이에 뭔가 크나큰 치료행위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나아만은 뭐 이렇게 무성의한 처방이 있느냐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주변 참모의 만류에 화를 참고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새 살이 돋아 완쾌되었습니다. 이처럼 나아만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役事)하시는 반전의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반전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세상에 일어나는 적대적 관계를 초월하실 뿐만 아니라, 신분과 권력을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이제 나아만은 몸의 치유뿐만 아니라 그동안 강대국 사람이라는 자만심, 그리고 장군이라는 오만함이 야훼 하느님 앞에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나병환자 나아만 이야기에 이어서 신약에서도 나병환자 치유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오만한 나아만 장군과는 달리 예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마르1:40)”라고 애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를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졌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제에게 몸의 상태를 증명해야 격리가 해제되어 공동체에 복귀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특별히 마르코 복음에서는 치유기적을 하신 뒤에 이 말씀이 늘 따라붙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실 거면 기적을 하시지 말던지 기적은 왜 하시는 걸까?”하고 반문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이것을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이라고 부릅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밝히지 않고 숨기셨다는 신학 개념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는 일종의 슈퍼맨과 같은 존재라서 예수께서 지도자들에게 잡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 크게 혼란스러워하거나 반대했을 거라는 겁니다. 또 다른 학자는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를 다윗왕처럼 이민족 지배에서 구해줄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로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메시아 관점하고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해석은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적을 하기 때문이 그를 메시아로 여기는 것을 원하지 않고, 하느님과 진정한 화해를 통해 온전한 존재로 회복되는 그런 구원과 그런 메시아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가장 약한 곳에 임하셔서 거기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는 그런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이 세상의 왕이나 권력자처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와 내부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기적을 하실 때마다 마치 힘있고 능력 있는 자가 힘없고 능력 없는 사람에게 어떤 것을 베푸는 모습이 아니라, 힘없고 능력 없고 불쌍한 존재가 느끼는 감정과 상태를 그대로 느끼고 공감하면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손을 갖다 대셨다 (마르 1:41)”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인생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예측하는 것과는 다른 것들로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 놀람은 때론 기쁨의 놀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실망과 충격의 놀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인생이란 우리가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점차 나를 내려놓고 인생의 신비에 겸허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들에서 우리는 나아만이 완쾌될 때 그 방법이 그가 예상한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병 걸린 사람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며 손을 대시자 전혀 예상치도 못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그 겉모습만 보고 헛된 기대를 가질까 봐 경계하십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구원 그리고 구세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피상적인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말씀과 설교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들이 풀리기를 바랍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께서는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루가 11:1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짧은 식견보다는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의 섭리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아마도 놀라운 ‘반전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반전의 비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