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에서 뒤늦게 ‘글맛’을 깨우치다,
부천 원미2동에는 늦깎이에 글맛을 깨우친 올해 72살인 남자가 있다. 원미동 주민자치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의 시(詩)에는 진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그가 어떻게 이런 시인이 되었을까?
앵 두
류인록
유월의 태양아래 앵두가 익어간다.
누가 더 붉을까? 그 여인의 입술과 앵두
누가 더 달콤할까? 그 여인의 입술과 앵두
누가 더 붉고 더 달콤해도 앵두는 해마다
붉겠지만 그 입술은 해마다 바래지겠지
색이 바래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일 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다
앵두같이 붉지는 안했지만
그 여인의 그 입술이 그리워진다.
중동건설 현장에서 보낸 8년 2개월
류인록 작가는 전북 김제 출신이다. 19살에 돈 벌러 부산으로 간 그는 수년 동안 공사장 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군대에 갔다. 그가 결혼하던 시절에는 연애결혼보다 중매결혼이 많았다. 그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나이 28살에 선을 보고, 고향 옆 마을에 네 살 차이의 ‘정경순’이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달콤한 신혼의 꿈도 잠시. 74년에 결혼한 ‘류인록’ 에게 75년 봄, 중동 건설현장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류 작가는 고민에 잠겼다. 당시는 중동 취업이 까다롭던 시기였다. 지금처럼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연좌제가 남아 있었고, 6‧25 때 좌‧우익을 따져서 집안에 좌익에 복역한 사람이 있으면 신원 조회에 걸려서 못 가기도 했다.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취업이 된다고 하더라도, 왕복 항공료는 회사에서 지불해주지만 1년의 기간을 못 채우고 그만 두면 왕복 항공료를 변상해야 하는 조건도 있었다.
75년, 그는 두 손을 불끈 쥐고 떠나기로 결심 했다. 결혼을 했으니 전세방이라도 하나 구해야겠다는 일념이었다. 그렇게 중동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딱 1년만 하자고 간 거였는데, 중동에서 지내다 보니 현지의 언어에 익숙해졌다. 말이 익숙해지고 나니 일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결국 5차례 총 8년2개월을 중동에서 지냈다. 당시에는 고정 환율이 적용됐는데, 483:1 이었다. 1달러 가격이 483원이었던 것이다.
중동 생활을 오래 했어도 현지인들과 분리되어 집단 캠프 생활을 했기 때문에 현지어를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류 작가는 함께 생활했던 직원 중에 아랍어를 전공했던 사람이 있어서 그의 도움으로 아랍어를 익힐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그는 지금도 간단한 일상적인 용어에서 부터 ‘모스크’에서 이슬람교 사람들이 외운다는 주기도문까지 아랍어로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현지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앞뒤 잴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러는 사이에 딸이 생겼지만, 아내도 딸도 제대로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일에 쫓겨만 살았다.
부천과의 인연
“부천에는 79년도에 왔어요. 제 성이 류(柳)가인데, 지명에 ‘川’자 ‘浦’자 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곳으로 가서 살아야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부천을 택했지요. 류 작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천에 온 동기를 설명한다. 부천에는 아는 사람이 있기도 했고, 비행기를 탈 일이 잦았던 그에게는 김포공항이 가까운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래서 부천에 지금까지 살게 된 것이다.
춘의동에 내집 마련을 해 이사와 딸! 을 낳았다. 2년 전에 문화방송 “여성시대에 딸! 시집 좀 갔으면 좋겠다. 라는 글을 올려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고 상품으로 공기청정기를 받기도 했지만 실은 착하게 자라준 것만 해도 감사하죠.” 류 작가는 80년생인 딸과 함께 산다. 류 작가는 당신은 중동을 오가며 힘겹게 그 시대를 버텨냈지만, 딸은 셋방살이를 한 번 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부인과 사별한 류 작가에게 딸은 하나뿐인 자랑거리다.
중동을 다녀온 뒤에도 국내 건설현장을 전전하며 쉴 틈 없이 일했다. 지금은 다 기계화되어서 집 짓는 일도 힘이 덜 들지만 당시에는 모두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환갑이 넘을 때까지 하다가 부인이 암 판정을 받고 부인과 함께하기 위해서 일을그만두었다.
부인의 투병
류 작가의 부인은 난소암을 앓았다. 첫 번째 수술은 잘되어서 제법 괜찮아 함께 산행도 다녔는데, 일 년 있다가 재발했다. 두 번째 수술 후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니 “그때 담당의사는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은 다 썼습니다.” 라고 하더군요. 물에 빠진 사람이 짚프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좋다는 약을 찾기 위해 멀리는 ‘통영’ 까지 약을 구하러 가기도 했다.
“정리할 건 정리하고, 글도 써 보고 싶으면 써 보고.” 그의 한숨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의 아내는 꼭 3년을 투병하고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음에 품은 아쉬움과 그리움을모두 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덜 외롭고 힘이 났다고 한다. 그게 그가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아니었을까.
원미2동 주민자치 글쓰기 프로그램
원미동 주민자치 프로그램 중에 글쓰기 교실이 있다. ‘박창수’작가가 강의를 맡고 있는 8년차가 된 장수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여섯 차례의 책을 냈으며 그 중 <글 바람 난 여자들> <엄마의 손가락>, <수다쟁이들의 다락방>, 등은 전국유명 서점에서 찾을 수 있고 잡지사 ‘브라보라이트’에도 소개가 되었고, 건강보험공단 ‘웹진’에도 소개되었다. 류 작가가 주민자치 프로그램 글쓰기 교실에 들어온 지는 이제 7년차, 회장 직을 맡은 지는 3년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 글을 배우고 쓰고 있노라면 과거를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회원들은 방송국이나 각종 공모전에 참여해 심심찮게 입상을 하고 상품 및 상금을 받아 오기도 한다고 한다.
동네신문「원미마루」의 기자생활
동네신문인 「원미마루」도 창간 6주년이 지났다. 원미마루는 3개월에 한 번씩 발행되는 계간지이다. 한 번 찍을 때마다 7,000부를 찍는다. 각자 맡은 파트가 나눠져 있어, 자신이 맡은 부분은 책임지고 채워 넣는 방식이다. 그동안 기사 쓰는 솜씨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동네를 위한 무료 봉사 직 이다. 지난 1월 7일에는 원미2동 글쓰기교실이 KBS 라디오 FM 104.9MK '이지연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출발 멋진 인생 에 소개되기도 했다고 하며 시도쓰고 책도 내며 라디오 방송출연도 했다고 자랑을 보탰다.
Kbs 출발멋진인생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수도권에 살면서도 안 가본 곳이 많다는 류 작가는 고궁과 미술관을 세밀하게 둘러보는 게 꿈이다. 그리고 그간 모아왔던 시(詩)들을 모아 시집을 하나 내는 것도 그의 바램 이다. 부천에 있는 시인 ‘주병율’ 선생의 강의실에서 배운 습작들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젊은이들과잘 어울리는 삶을 살며 여건이 되는 날에는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는 꿈도 키워가고 있다고한다.
원미동에서 살기
류 작가는 이곳에서 40년을 살았고 원미동의 인프라 때문에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고 말한다. 종합 병원, 보건소, 지하철역도 가깝고 인정이 넘치는 재래시장도 있다. 이곳 재래시장 물가는 어느 곳보다 저렴하다. 멀리 가지 않아도 해발 167m 나지막한 ‘원미산’과 지난해에 복원된 심곡 ‘시민의강’ 등은 걸어서 갈 수 있어 등산과 산책하기도 좋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교통이 좋은 곳에 살아야 해요. ‘원미동’ 만한 좋은 교통도 없죠.” 그의 말대로 ‘지하철 1호선은 물론 7호선 조만간에 개통될 ‘원시선’이 소사역에 들어오고 ‘일산’까지의 대곡선도 착공되었다. 지하철 4거리가 되는 셈이다.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양귀자 소설도 있잖아요.(웃음) 원도심의 인정이 넘치고, 아는 사람 많고, 막걸리도 한 잔씩하고. 어쩌면 나는 자칭 ‘원미동’ 예찬론자지요.” 정감 있는 ‘원미동’ 골목 어느 포장마차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글을 쓰는 류 작가의 환한 웃음을 마주 할 것 같은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