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이 전주 이씨다. 성종의 아들인 경명군의 아주 먼 후손으로, 1865년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며 초명은 근용(根湧)이다. 무신 집안이었지만 출사의 계기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 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고 병조 참판 등을 역임 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듬해 돌아와 한성 판윤·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1905년 법부 대신과 군부 대신을 역임하였는데 이완용이 주도한 을사 조약 체결에서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힘으로서 을사오적이 되었다. 결국 다른 방식으로 정부를 전복시켰다. 그 전복 아니다. 그 이후로 조선 민중들과 의사의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거나 위협을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이후로는 일본군을 호위 대동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19년 자연사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한규설의 딸이 이근택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사돈 관계였다고 한다. 그런데 한규설은 을사 조약을 반대한 애국자이다. 그래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이근택에게 딸을 따라온 교전비(여종)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꾸짖기를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가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라고 말하고 옛 주인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그의 고기 베던 머슴과 침모가 집을 나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걸 보니 자기 집 머슴, 노비들에게도 경멸받으며 주인 대접을 받지 못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