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4대사화 중 마지막 사화가 명종 즉위년에 일어 난 을사사화다.
이 을사사화는 다른 사화에 비해 복합적으로 일어난 사화라 설명하기가 복잡하다.
우선 을사사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조선국왕 중 가장 존재감이 없는 인종과 명종을 설명해야한다.
인종은 거의 처음 듣는 친구들도 있을걸
그런데 실록을 보면 이 두 왕은 참 선한 왕이었다. 조선의 국왕들은 선하면 빨리 죽거나 존재감이 별로 없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왕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는 나온 적이 없다.
단지 그 당시에도 이 두 왕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종의 계모이자
명종의 친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영화, 드라마가 각광을 받았다.
전에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여인천하'의
전인화가 바로 문정왕후 역할을 했다.
또 그 유명한 '대장금'에서도 박정숙이란 탤랜트가 중종의 왕비로 나와 문정왕후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 일반 여성들은 유교의 남존여비라는 불평등의 그늘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정치는 왕비 또는 왕대비 나아가서는 후궁, 상궁들 여인들의 치마 폭에서 국정이 좌지우지 되고 농락당하기도 하였다.
살펴보면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
태종의 원경왕후,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
세조의 며느리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
중종의 비 문정왕후,
광해군 때의 김개시 상궁,
숙종 비 장희빈,
정조의 젊은 할머니 정순왕후
고종 황제의 명성황후 등이다.
그리고 궁궐여인이 아닌 일반인으로서 이들 못지 않게 정치적 영향력을 뽑낸 여인이 있는데 드라마 '여인천하' 진짜 주인공이었던 정난정이 있다.
이러한 점은 조선의 유교정치의 역설적인 면 중 가장 큰 예들이다.
이중 가장 강력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한 대표적인 조선의 한 여인을 꼽는다면 단연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이다.
문정왕후 하면 먼저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수렴청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드라마 ' 여인천하 '에서 나오듯이 크고 작은 수없는 악행을 저지른 여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오죽하면 문정왕후가 죽자 사관은 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윤비(문정왕후)는 사직의 죄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관의 기록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성리학을 국정이념으로 삼고 있는 조선에서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 직에 제수하는 등 지나친 불교치중 정책을 펴 나가자
거기에 반발한 성리학자 사관들이 문정왕후 사후 그녀에 대한 악평의 요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 한 중심에도 문정왕후가 있었다.
을사사회가 대윤과 소윤의 정치투쟁의 결과로 알려져있지만
소윤의 핵이 문정왕후가 그 배후에 있었다.
우선 을사사화 배경을 살펴보자!
인종의 친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반정이후 중종 비 단경왕후 신씨(치마바위)가 폐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515년 세자(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꽃다운 나이 25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러나 중종시절에는 장경왕후 윤씨가 남겨놓은 세자가 남아있었기에 장경왕후 오빠 윤임등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이들을 대윤이라고 부른다.
장경왕후 사후 중종은 다시 계비를 들이는데
그녀가 앞서 말한 문정왕후이다. 문정왕후 또한 윤씨였다.
문정왕후에게도 윤원로, 윤원형 두 동생이 있었는데 이들은 세자(인종 )을 폐하고 문정왕후 친아들인 경원대군(명종 )을 세자로 만들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들을 소윤이라고 한다.
또 이들 사이에 왕비는 되지 못하고 후궁으로 남아 있었던 '여인천하'에서 "메야?"로 유명한 경빈박씨가 있었다.
경빈 박씨에게도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중종의 실질적인 장남인 복성군이다.
복성군은 중종의 장남이었지만 경빈박씨 후궁의 아들이라 인종이나 명종에게 세자 자리 다툼에서 밀렸다.
여인천하의 많은 비극은 여기서 부터 시작 된다.
세자 외숙인
대윤 윤임(尹任)은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소윤 윤원형은 세자를 교체하려는 두 외척간에 왕위승계를 둘러 싸고 큰 싸움이 벌어진다.
그 사이에 경빈박씨와 복성군도 행여나 하면서 발버둥을 쳐보지만 힘에 딸리고 이 두 외척 싸움에 처절한 희생양이 되어 비참하게 죽고만다.
소윤 윤원로.윤원형 형제의 세자교체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중종이 죽자 인종이 즉위한다.
하지만 대윤과 소윤의 추악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소윤은 인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라고 여겼다.
소윤은 문정왕후 윤씨가 정실 왕비이니 그녀의 소생인 경원대군이 세자가 되고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비해 인종은 마음이 너무 선하고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계모였지만 문정왕후를 깍듯이 어머니로 모셨으며 그녀의 동생이자 인종의 정적인 윤원형을 공조참판으로 임명까지 했다.
인종은 그때까지 후사가 없다면서 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물론 당시 실권을 가진 문정왕후와 소윤들에게 눈치보기를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인종의 후하고 이런 선함이 인종의 목숨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인종이 왕이 되고 즉각적으로 문정왕후의 정치개입을 거두게 하고 소윤일파를 강력하게 견제했었더라면 인종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갑자기 죽는다.
원래 인종이 몸이 쇄약하기는 했지만 28살의 너무 젊은 나이에 급사하자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문정왕후 세력에의한 독살설이 나돈다.
인종 독살설은 그 당시 일반 백성이나 야사에는 기정 사실화 되어 있다.
인종이 급사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측근이었던 윤원형 등 소윤파가 득세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윤파가 숙청되었으며,
이 때 대윤파에 속해 있던 사림들 또한 화를 크게 입었다.
바로 을사사화의 시작이었다.
인종이 비록 8개월만 재위했지만
그 기간동안 사림을 우대하는 정치를 폈기 때문에 대윤파 중에는 사림이 많았다.
을사사회가 표면적으로는 대윤, 소윤 외척 간 싸움이었으나 내면적으로 깊게 살펴보면 사림 세력에 대한 훈구 세력의 공격인 성격도 있다고 하여 을사사화도 조선 4대사화 중 하나로 부르게 된다.
문정왕후는 1545년 자신의 소생인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로서 8년간 수렴청정했다.
그동안 을사사화를 일으켜 동생인 윤원형의 권력기반을 단단하게 만들어 놓고 수렴청정을 끝낸 후에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윤원형과 협력하여
근 20년 동안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 한다.
문정왕후 사후에 논쟁이 가장 치열한 부분이 문정왕후에 의한 불교 부흥이다. 문정왕후에 의한 불교 부흥은 숭유억불을 국정이념으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보기에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나라 전체 역사적으로 보면 커다란 치적이 될 수도 있다.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신임해
1550년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는 등
불교 부흥을 꾀했다.
문정왕후가 도첩제를 다시 시행하여
2년 여 년 동안 5000여 명의 승려를 뽑고
폐지 됐던 승과시를 부활시켜 훌륭한 승려를 배출했다.
그 대표적 역사적 인물이 바로 휴정 서산대사 이고, 유정 사명대사 이다.
이때의 승려들은 명종이후 선조 대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서 위기의 나라를 구하는 주체가 됐으니
문정왕후와 보우의 불교 중흥 정책은 우리 역사의 치적으로 남아야 한다.
문정왕후는 후대에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는
정권을 휘두른 악후로 평가 절하 하지만
남성중심, 성리학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여자의 몸으로 정권을 잡고
불교를 중흥 시키는 등을 보면 탁월한 전략가이자 정치가임에는 틀림없는듯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