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은 왜 시인이 되는가. 대관절 시에 뭐가 들어 있기에 생계유지의 고단함을 무릅쓰고 시인이 되고자 하는가. 오규원이 다시 답한다.
시(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시(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환상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의지와 이상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사기도 사기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시(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시(詩)에는
남아있는 우리의 생(生)밖에.
남아있는 우리의 생(生 )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 오규원, 〈용산에서〉 전문
시인들은 낡은 사람들이다. 시를 ‘공부’하겠다는 것은 미친 일이다. 무슨 근사한 이야기가 있답시고 시를 사랑하는, 시를 잊지 않은 그대와 나, 우리 모두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生)밖에.
그래서 이 시는 반어(反語)가 된다. 확실히 시는 근사하지 않고, 우리 생 또한 근사하지 않다. 근사한 시, 근사한 인생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이때 ‘근사하다’라고 함은 값이 나가는, 교환 가치가 높은 구매력을 끌 만한 매력의 대상을 의미하리라. 시에는 그런 근사한 가치가 없다. 교환 가치가 없다. 오죽하면 고작 800원짜리 메뉴이겠는가. 시에 왜 근사한 가치가 없을까. 그건 우리 생을 담기 때문이다. 우리 생이 교환 가치의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살 가치가 없다. 정말 시간이 돈이라면, 시간이 금이라면, 부자는 영생할지 모른다. 우리의 생을 다 사 모을 테니 말이다.
영화 〈인 타임〉을 보라. 인류의 가까운 미래를 그린 이 영화에서 모든 인간은 25세가 되면 노화가 멈추는 대신,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1년의 유예 시간을 무상으로 제공받고, 이후 수명을 연장하려면 시간을 구입해야만 한다. 시간은 화폐처럼 거래된다. 일을 하면 시간을 벌고 물건을 사면 시간을 지불한다. 커피는 4분, 버스 요금은 2시간, 스포츠카는 59년…. 시간은 팔뚝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에 저장된다. 시간을 모두 소진하고 시계의 13자리 숫자가 0이 되는 순간, 그 즉시 인간은 사망한다. 그러니 부자들은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 반면, 가난한 자들은 시간을 노동으로 사거나 빌리거나 훔쳐야만 한다. 생이 교환 가지가 크면 클수록 근사하면 근사할수록 우리는 죽은 것이다.
다행히도 생은 재화가 아니고 물질적 시간인 것만도 아니다. 생은 환산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는, 근사하지 않지만 가장 소중한 것이다. 시 〈용산에서〉의 2연을 보라. 시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근사하지 않다. 근사함이 알려지는 순간, 골드러시처럼 사방에서 소나 개나 몰려든다. 그래서 2연의 멋진 마무리를 보라.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만 자랄 뿐이다. 정말 다행히도 시는, 그리고 우리 인생은, 역설적이게도 근사하지 않기에 잡초가 자리지 않는다.
그곳이 바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 말을 못해 복두쟁이가 찾아간 대나무 숲이다. 목숨 건 사연 정도를 가진 이가 말 안 하고 감추면 속 터져 죽을까 봐, 마침내 찾아와 통곡하는 자리다. 근사하지 않기에 아무도 찾지 않는 곳. 그래서 비로소 다시 살게 되는 곳. 그곳이 쓸모가 없다고 숲을 허물고 공장만 지어 대면 잡초만 살게 되고 우리는 죽는다.
그러기에 이 시에서 유독 한자로 빛을 발하는 두 시어를 보라. 시(詩)와 생(生), 시는 생이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 생.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같은 생. 그래서 기꺼이 시인이 되고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스승이 되는 게다. < ‘시를 잊은 그대에게, 그 두 번째 이야기 그대를 듣는다(정재찬, Humanist, 2018)’에서 옮겨 적음. (2019.11.05.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