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고아원 외 1편
연명지
말의 좁은 산도를 지나가요 조심스럽게
초원을 뛰어다니던 목소리들이 담장을 넘고 남 이야기 하듯 가볍게
말을 좋아한 사람들이 말을 모아 집을 짓고
출산을 했다고 축하를 받아요
읽는 사람의 심장을 다치게 하는 살아있는 말들이 좋다고, 말은 당근을 먹으며 오물거려요
엄마 손을 놓친 불안전한 말들이 쌓여가는 식탁에서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의 말을 발라먹고 있어요
가시가 눈을 찌르기도 해요
빛바랜 사진 속에 웅크린 문장을 만나면 슬픔은 먼지처럼 날아가요
우기에 젖어있던 지난날을 스윽 열고 들어와 이마를 짚어주는 문장이 나를 살게 해요
말이 잘 자라도록 정성을 다해 물을 주고
가만가만 쓸어주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고요
일상과 나의 몽상 사이에서 즐겁게 거닐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시집 갈피마다 지문들이
울컥울컥, 고여있어요 버려진 시집들
잊혀진 것들을 다시 부르는 밤이 제일 무서워요
머릿속에 가끔 에러 창이 뜨는 날은 허리를 비틀며 나아갔어요
시집 속에 잠시 앉아있다 일어나면 말들이 장난치듯 새벽을 만나는 날이 있어요
시집을 벗어난 새들은 모두 고아가 되지요
구출나무
발목 위로 빗물이 차오르는 칠월
넘치는 슬픔이 버거워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진다
다리 밑에 서서 강으로 뛰어드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빗소리를 피해 새들이 다리 밑으로 날아들고
비와 우산 사이는 멀기만 하다
어디서부터 걸어온 청년일까
판교역까지 가는데 우산 같이 쓰고 가실래요
고맙다는 말을 들고 우산속으로 뛰어들었다
닿기 힘든 사람을 만나면 닿고 싶은 먼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바람을 품은 비는 강하게 흩어지며 달라붙고
청년의 한쪽 어깨가 흠뻑 젖는다
우산 안으로 드나드는 폭우 속에서
운중천 길이 참 예쁘다며 웃는 소리를 빗소리가 훔치고 있다
편의점 앞에서 손을 흔들며 청년을 보내고
스스로 지워진 아득한 얼굴이 생각나 들썩이는 파도처럼 울컥,
비의 어깨에 의지해 들키지 않은, 고맙다는 말이 빗소리에 묻어 간다
잠깐 지나가는 폭우 속에서 마법 우산을 들고
눈빛으로, 넘치는 그리움이 다녀갔다
눈 맑은 청년이 돌아서 간 칠월이었다
가끔은 파란 하늘을 향해 삿대질도 할만하다
연명지 약력
2013년 미네르바 시선으로『가시비』를 출간하며 문단 활동 시작.
시집『사과처럼 앉아있어』전자시집『열일곱 마르코 폴로 양』이 있다.
2023년 호미문학상 은상 수상,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