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어원(ㄴ자 어원)
나그네와 망나니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선생의 '나그네'란 시의 한 구절이다. 낭만적 흥취가 물씬 풍기는 말 '나그네'를 원말로 바꾸면 어떤 맛이 날까?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간 애'. 나그네는 사실 '나간 애'가 변해서 된 말이다. '막(아무렇게나) 낳은 이'가 변해서 망나니가 되고, '막(마지막) 낳이'가 줄어서 막내가 되고, ‘뜬 애기’(떠돌아 다니는 애기)가 ‘뜨내기’가 된 것처럼 우습게 만들어진 말이 멋지게 폼 잡고 있는 것이다.
나비와 나방
나비와 나방은 같은 어원의 말이다. 모두 ‘넓다’의 어원과 같은 말이다. ‘�(낟)’이 제일 깊은 뿌리이다. ‘널빤지’, ‘널 뛰다’ 등의 널은 ㄷ이 ㄹ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ㄹ을 막는 소리 ㅂ이 덧붙으면 ‘넓다’가 되는 것이다.
다시 여기서 ㄹ이 떨어지면 납만 남는다. ‘납작하다’, ‘나비’, 나방’, ‘나박김치’, ‘나부죽하다’, ‘나비(너비=폭)’ 등이 모두 여기서 나오는 것이며, 일본말 나베(우리가 냄비로 역수입)도 넙적한 조리기구를 말하는 것이다.
ㄹ을 막는 소리가 ㄱ이 되었다가 ㄹ이 떨어지면 ‘넉넉하다(낙낙하다)’, ‘넉가래(넓적한 가래)’, ‘넉괭이’ 등이 되는 것이다.
금속 ‘납’, ‘넙치’, ‘너럭바위’, ‘널럴하다’ 등도 모두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말들이다.
내숭과 노틀(노털)
“내숭 좀 그만 떨어라.”“아이, 나른해.”생김새가 도통 한자 같지는 않아서 수 천년 동안 함께 살아온 우리말이려니 싶다. 그러나 이것도 한자말들이 변장한 케이스. 내숭은 원래 내흉(內凶)이었는데, 발음이 어려워 내숭이 됐다. 사투리에 ‘숭한 놈’, ‘숭악한 놈’이 있고 표준어에 ‘뒤숭숭하다’등이 나오는 것은 모두 흉(凶)의 중국어 발음(현대어에선 xiong=시옹 혹은 시웅)과 관련이 있다.
비슷한 과정을 거친 말이 ‘나른하다’. 피곤해 기운이 없다는 뜻의 ‘날연(날然-기초한자에 없음)하다’가 변태(變態)를 거쳤다. 또, ‘의뭉을 떨다’, ‘의뭉스럽다’처럼 쓰이는 ‘의뭉’은 ‘음흉(陰凶)’이 변한 말이다.
‘노틀(노털)은 딱 질색이야.’의 노틀은 노두아(老頭兒=노인네)란 중국말이 변해 고유어처럼 느껴지는 경우이고, 모자 앞부분을 가리키는 챙은 차양(遮陽, 햇볕을 차단함)이 줄어서 된 말이며, 모과는 목과(木瓜, 나무에서 열리는 오이)에서, 보배는 보패(寶貝, 보물과 조개 껍데기 : 옛날에는 조개 껍데기가 화폐로 대접 받던 시절도 있었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말들이다. 지금은 우리말처럼 보이는 수없이 많은 낱말들이 사실은 한자말에서 유래했다.
자장면 혹은 중국인을 지칭하는 ‘짱꿰’란 말은 ‘장궤(掌櫃)’돈궤를 장악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한 가게 주인을 지칭하는 말이 중국인들(화교들)이 팔던 대표 음식이나 중국인 자체를 지칭하는 말로 둔갑한 것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뙤놈이 번다'는 말이 있다. 이 때의 이 재주는 우리말인가? 한자인가? '재조(才操)', 즉 재인(광대)들의 기술이란 뜻이다. 이 발음이 변해서 재주가 되었다. "저 사람 너무 유세를 떨어", 이 유세는 위세(威勢)를 잘못 발음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노래와 모래
표기법은 참 무서운 것이다. 노래, 모래처럼 쓰면 이 말이 원래 ‘놀다’, ‘몰다’와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노래는 옛 형태가 ‘놀애’이고 이것은 ‘놀다’의 명사형에서 출발한 말이다. 이것은 자라가 ‘잘다(작다) + 아(접미사)’로 결합해 ‘자라’가 된 방법이 비슷하다. 이런 것으로 바다(바닥의 받 + ㅏ), 쪼다(�, 작은 것 + ㅏ) 등이 있다.
모래도 마찬가지로 옛 형태는 ‘몰애’였고, 이것은 ‘몰다 + 애’에서 온 말로 몰려다니는 것이란 뜻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하게 만들어진 말들로는 빨다(흡착하다)에서 온 빨래, 갈다에서 온 가래(농기구, ‘갈다’에서 왔음), 미래(못자리를 다듬는 농기구, ‘밀다’에서 왔음) 등이 있다.
녹은 왜 녹색이 아닌가?
철이 녹슨다고 할 때 녹은 한자로 녹(綠)이라고 쓴다. 녹음(綠陰)이 우거졌다든가, 녹색(綠色), 초록(草綠)이라고 할 때의 바로 그 글자이다. 쇠에 녹이 슬면 보통 붉은 빛을 띄는데, 왜 green이란 의미의 녹(綠)이라고 할까?
대답은 이 낱말의 역사에 있다. 녹(綠)은 원래 동록(銅綠)이 줄어서 된 말이다. 옛날 구리로 된 물건들에 낀 녹색의 때를 본적이 있는가? 구리는 녹이 슬 때, 쇠처럼 뻘겋게 녹이 슬지 않고 녹색으로 녹이 슨다. 녹(綠)이 녹색(綠色)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빛깔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꺼내 보자. 연두색은 왜 연두색일까? 연두색은 한자로 軟(무를 연), 豆(콩 두), 色(빛 색)이다. 콩은 대부분 딱딱하지만 완두콩은 비교적 속이 무른 콩이다. 이 무른 콩을 생각하면 왜 연두색이 연두색이 됐는지 이해될 것이다.
날짜와 해의 연관성
날짜를 세는 단어들을 살펴보자. 하루는 �(해) + 우(접미사)로 이뤄진 것으로 해가 어원이다. 이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면 하루(春)가 되는데 봄은 역시 따스한 햇빛과 관련이 많나 보다. 이틀도 잇(잇다의 잇) + 핫(흗, 흘), 이어진 해, 사흘도 삿(셋, 섯, 석, 사) + 핫(흗)도, 나흘도 낫(넷, 넉, 나) + 핫(흗)처럼 분석할 수 있는 말이다. 닷새는 다섯 해, 엿새는 여섯 해, 이레=일해(일곱 해), 여드레(여덟 해), 아흐레=�흡해(아홉해), 열흘=열 흗(핫, 해) 등 숫자와 '해'가 붙어서 이뤄진 말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현재의 말들은 약간씩 모양만 바뀌면서 원래의 어원을 화석처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두 해를 가리키는 '이태'란 말은 잇(잇다의 잇) + 해(year)로 이루어진 말이다. 또 ‘이듬해’는 ‘이음(잇음=이듬) +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낟과
"우리 낯이 왜 둥그렇게 생긴 줄 아는가?"
"... ..."
" 해의 색깔을 두 가지로 말해 보게."
"노란 색과 ...하얀 색 아닌가요?"
"그렇지. 낮이 왜 낮인 줄 아는가?"
"글쎄요...???"
"낯(face), 낮(day), 낱(rice), 낫(sickle), 날(day, blade)이 모두 한 뿌리 낟에서 출발했고 이 '낟(�)'도 '삳(�, �, �)처럼 해를 가리킨 말이기 때문이지. 해(삳, �, �, �)가 원래는 떠오르는 해였다면, '낟(�)'은 오후의 해라고 보면 맞을 걸세. 그래서 '삳'계통의 '희다', '하얗다'가 흰 색을 나타내지. 오전의 해가 노랗게 이글거리는 법은 없거든. 하지만 '낟'계통의 색깔어 '노랗다'에서 보듯 누런 색깔을 표현하는 낱말에 쓰였지. 오후의 해는 누런 색을 띄는 경우가 많지.
"그렇긴 하겠죠..."
"새가 왜 날아다니겠나? 해의 다른 말이 아닐까?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 '�'이 떠오르는 해라면, '낟(날)'은 낮아지는 해(오후의 해)를 말하는 것일세. 지는 해라고나 할까? 자, 잠시 보세... 낱이 무언가? 벼의 낱알 아닌가? ‘낱낱이’나 ‘낱개’라고 할 때의 낱은 벼 알갱이 하나를 지칭하는 말이지. 벼의 색깔이 노랗지 않은가? 벼 알갱이의 모양과 해의 모양이 다른가? 둥그런 것 아닌가? 또, '낟'과 '�'은 '삳'과 '�'처럼 서로 통한다고 보네. '놀', '놋' 같은 소수의 후손들도 '날'계열과 같은 뿌리란 의미이지.
"네, 선생님... 그럼, 낟(날)에서 변해 간 놈들을 조금 설명해 주시지요..."
"자, 보세. 김선생. 날다람쥐, 날듯이 달아나는 놈이지? ‘하루’가 해이듯이 몇 일, 몇 날을 보면 날=day 아닌가? 그야말로 해를 말하지. 낯을 보세. 얼굴이 동그랗고 누렇지. 그래서 낯 아닌가? 날개, 나래야 해가 날아다니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을 거고... 벼를 ‘나락’이라고도 하는데, 이 것은 ‘낱’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지. '낟>나닥>나락'처럼 변해 간 것이지. 날씨(weather)도 해의 상태와 관련된 것이니 직접 관련이 있고… 동사 쪽으로 간 놈들도 볼까? 박군, 물 좀 부탁하네...쿨럭쿨럭... 우선 '낳다'가 있겠고, 나아간다고 할 때의 '낫다'(進), '나다'(生), '놓다'나 '�다', '날다' 그리고 '놀다'가 보이지. 물론 좀 더 나가면 '낚다'나 '나르다', '내리다' 등도 모두 한 핏줄이지. "
"선생님, '낟'과 '�'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간단하게라도 설명 좀 부탁 드립니다."
"김선생, 전에 �-�에서 보듯이... 둘은 모음으로 연결된 거지. 노란 색으로 연결돼 넘어간 거요. ‘�’은 노랗다의 대표 어원이 돼 버린 거지. 아침의 해는 하얗고, 오후의 해는 노랗게 타오르지... 타오르다가 서서히 서녘을 향해 낮게 깔리다가... 지는 것 아닐까? 이 상황이 바로 '낟'과 '�'이라는 거야. 우리가 쉽게 생각해 보면...'노랭이', 안 먹어서 누렇게 뜬 사람이지? '누룽지'...누런 것이고, '노다지'는 '금'이니 당연히 노란 것이고...이런 식으로 '낟'과 '�'은 서로 연결돼 있는 거라네. '�'에서 나온 수많은 말들은 나중에 죽~ 열거해 주겠네.
"참~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면 신기하게도 서로 통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어원의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지만 --;; "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고 애쓰기는 하는데, 혹시 너무 어려우면 꼭 말해주게. 김선생이 이해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울 터이니... 오늘은 예까지만 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