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국의 구도자 창계 임영의 삶과 사상(上) -하루 7번 자신을 돌아보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에 있는 창계서원 신도비.
# 8세에 시를 지은 신동(神童) 큰 빗방울 연잎에 떨어지니 大雨落蓮葉 하얀 옥구슬 푸른 쟁반에 구르네 白璧轉靑盤
창계 임영(1649~1696)이 여덟살 때에 지은 시다. 이런 시를 읽어보고 신동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임영은 외가가 서울에 있었다. 임천(林川) 조씨로 인조 때에 병조참판 벼슬을 지낸 데다 학문까지 높아 당대에 큰 명성을 날리던 죽음 조희일(竹陰 趙希逸)의 아들에 근수헌 조석형(近水軒 趙錫馨)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임영의 외조부였다. 그의 집이 서울의 장의동(壯義洞 : 지금의 북악산 밑 경복고 일대)에 있었고, 임영은 거기에서 인조26년에 태어났다.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글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벼슬도 승지에 오른 운강 조원(雲江 趙瑗)은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峯)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분인데, 그의 아들이 죽음이고, 죽음의 아들이 근수헌이다. 이 3대가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조선의 명가로 그만한 집안이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으니, 그런 외가의 피를 이은 임영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드러냈다고 한다.
태어난 곳이야 서울이었지만 임영의 고향은 전라도 나주의 회진 마을이다. 지금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지만, 고려 때에는 회진 고을이었다. 관향이 나주이지만 임씨들을 회진 임씨라고 부르는데, 천재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고향이어서 세상에 더욱 이름을 날린 마을이다. 회진은 백호를 비롯한 시인이 많이 배출되어 ‘시점(詩店)’이라는 이칭도 있었다. 기묘사화 때의 귀래정 임붕(林鵬)은 승지의 벼슬을 지내고 크게 의리를 지켜 이름이 높던 분인데, 후손들이 연달아 높은 벼슬에 오르고 시문에도 뛰어나 인물의 보고로 알려진 마을이었다. 백호는 곧 귀래정의 손자이고 귀래정의 후손인 임영은 백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이니 바로 당내(堂內)의 친족이었다.
귀래정 임붕 이후의 회진 임씨의 학문과 벼슬은 임영과 같은 학자를 길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임붕의 손자로 백호는 물론 그의 사촌 아우 서(서)는 호가 석촌(石村)으로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는 당대의 문사였으며, 서의 아들 담은 문과에 급제후 이조판서에 올라 시호가 충익공이니 임영에게는 재종조(再從祖)가 된다. 할아버지 타는 상주목사를 지냈고 그의 아우로 임영의 종조할아버지인 위는 호가 동리(東里)인데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아 은일(隱逸)로 지평(持平)에 오른 당대의 학자였다. 임영은 소년시절에 대체로 그분의 슬하에서 학문을 익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 일유(一儒)는 학행으로 천거받아 여러 고을의 원을 지내며 높은 치적을 올린 이름난 선비며, 어머니 조씨도 이름난 가문의 따님으로 식견이 높은 분이어서 천재적인 임영은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시문에 뛰어나다는 명성을 얻었다.
문집에 실린 ‘영화(詠畵)’라는 제목의 시는 11세 때의 작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림을 보고 화제로 지은 것 같은데 시격이 뛰어나게 높아 보인다.
푸르고 푸른 큰 소나무 아래 蒼蒼長松下 그 사이에서 흰 구름이 솟는구나 白雲生其間 강가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 臨溪有釣客 아마도 부춘산의 강태공 아닐는지 恐是富春山
한 편의 시는 바로 한 폭의 그림이다. 11세 소년의 시로는 정말로 좋다. 7~8세 때에 글을 대부분 깨쳤고 한글까지 쓰고 읽을 줄 알아 신동에 값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 10대에 도(道)를 찾아 나서다
고관대작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여러 벼슬과 여러 곳의 고을살이를 했던 관계로 임영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임소를 따라다니느라 전국의 각처에서 두루 거주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향인 전라도 나주 회진에 터전을 두고 생활하였고 학문을 익혔지만, 역시 서울은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주 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 때에 아버지의 명으로 당대의 학자 정관재 이단상(靜觀齋 李端相)의 문하에 들어가 돈독하게 도학(道學) 공부에 침잠한다. 월사 이정귀의 손자요, 백주 이명한의 아들인 정관재에게 학문을 익힌 임영은, 정관재의 소개로 18세에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 들어가 깊고 넓게 학문을 익혔다. 그 무렵에 정관재의 사위인 농암 김창협(金昌協)과 평생의 친구로 사귀게 되고, 정관재의 아들인 지촌 이희조(李喜朝)와도 죽마고우로 평생의 학문친구가 되었다. 높은 수준에 이른 학자로 명망이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당시의 학계 거물들인 우암 송시열이나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고 명재 윤증(尹拯)과도 많은 학문적 토론이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창계는 확실히 구도자로서의 공부하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일반 학자들과는 다르게 창계는 ‘칠성례(七省例)’와 ‘일방권점획례(日傍圈點劃例)’라는 특별한 의식을 정해놓고 매일매일 착실하게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칠성례란 글자의 뜻대로 일곱 차례 반성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인데, 자신을 깨우치고 반성할 자료가 되는 글이나 격언을 선정해놓고 하루에 일곱 차례인, 새벽·조반을 들기 전후·정오·석식 전후·잠들기 직전의 시간에 자기반성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일방권점획례란 자아의 반성과 자기비판을 계속하는 일이다. 매일 자신이 행하고 말한 일을 적어놓고 행한 일과 말을 자기 스스로 비판해보는 일이다. 했던 일이나 말이 양심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으면 동그라미를 치고,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획을 긋고, 잘한 일과 못한 일이 섞여 있으면 점을 찍어 표시해두고 자기 행위를 스스로 평가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학문태도를 견지하여 구도자로서의 명확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런 성찰이 계속되고 높은 수준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10대에 그의 학문은 뚜렷한 성과를 얻기에 이른다. 특히 자신의 내적 기반을 견실하게 닦은 뒤에 사회적 실천에 옮기려던 그의 공부와 수양의 자세는 성리학자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 18세에 진사과에 장원
창계의 벼슬살이는 화려했지만 벼슬에 종사한 기간은 매우 짧았다. 왕조실록에서 사관이 말했던 대로 ‘다퇴소진(多退少進)’, 즉 ‘물러남이야 많았지만 벼슬에 나아가기는 몇 차례 아니었다’라는 뜻이니, 그야말로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과에 장원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고, 23세에 학문이 익은 뒤에야 문과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이 내리면 사직소를 올려 자신의 간절한 우국충정을 토로하면서 벼슬은 사양하기 다반사였다. 애초에 부귀영달에는 뜻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학문의 진리를 밝히고 양심적인 선비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 것인가라는 우국의 마음만이 가슴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좋은 벼슬일수록 응하지 않고 사직소만 올렸다.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던 창계는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 퇴계와 율곡 선생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분들의 뜻을 세상에 밝히려는 내심으로 언제나 학문에 침잠하는 것이 그의 본령이었다. 더구나 창계가 활동하던 시기는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때이고 말년에는 서인 내부의 노론과 소론의 당파가 격렬히 싸우던 때여서 정직한 선비가 마음 놓고 벼슬할 기회가 아니던 때였다. 숙종 임금 초년에는 더구나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여 서인계이던 창계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할 기회가 있었다. 27세에서 31세 때까지 5년간 강원도 통천에 은거하면서 마음껏 경전연구에 시간을 보냈고, 숙종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물러가자 32세 때부터 청요(淸要)의 벼슬이 연이어 내려졌다.
# 대제학의 물망에도 오르다
35세에서 38세 때까지 부모상을 치르고 나자 의정부 사인(舍人), 검상(檢詳), 승정원 동부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고관의 벼슬이 내렸으나 취임하지는 않았고, 오직 임금과 경학을 강론하는 경연관으로 어전에 참석하여 높은 수준의 이론으로 임금을 계도한 공로가 있었다는 것이 사관의 평이었다. 얼마 뒤에는 이조참의·호조참의의 벼슬이 내리고 전라감사와 대사간·대사헌·개성유수·공조참판이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고, 개성유수에 마지못해 취임차 상경하여 모진 질병으로 숙종22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홍문관의 부제학이 내려졌을 때에는 조야에서 다음에는 대제학에 오르리라는 기대가 컸다는 것이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 48세의 짧은 생애
송시열, 송준길, 이단상, 박세채 등 스승의 문하에서 학문을 넓혔고, 김창협·이희조 등의 동료들과 강학을 통해 경전의 연구와 성리학의 깊은 공부를 한 시대의 석학이던 창계는 48세라는 너무나 짧은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익은 학문과 경륜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세상을 건질 벼슬살이도 역임해야 했건만 그러한 시간적 여유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단명에 아픔을 이기지 못했던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고향인 나주의 회진에 근거를 두고 학문을 연구하고 도를 구하는 일에 매진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일대의 많은 제자들이 운집하여 학단을 이룩함직도 했지만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 이유로 스승에 버금갈 만한 제자들이 나오지 못한 점도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창계는 고봉 기대승 이후에 호남 출신으로는 최고의 학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짧은 생애를 마쳤으나, ‘창계집’이라는 27권 14책의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27권 중에서 10권이 사우들과 주고받은 서간문인데, 이 서간문은 바로 창계의 대표적인 논학문자(論學文字)로 그의 사상과 철학은 물론 성리학과 경학의 구체적인 이론이 그대로 담겨있어, 조선 유학자에서 혁혁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농암 김창협은 창계의 서간문에 대하여 “퇴계 이후에 드문 글”이라고 평했던 것이다.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