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일보
2012/01/13
인격과 심성훈련 교육목표로 유불선 구현해 보자
방학이면 으레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직장인·일반인을 위해 무료한문교실을 운영하며 공부할 수 있는 장을 열어 놓고 있는 오용기 원장.
오 원장이 교육봉사를 한지도 무려 30여년이 됐다.
오 원장은 지난 1981년 전주한문학원을 설립 10년간 관인학원을 운영하다가 1991년 학문에 더 깊은 뜻을 두고 대만연수를 다녀왔다.
연수를 다녀온 오 원장은 1992년 달마시민서당 문을 열고 다시 무료한문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단순히 한문 글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심성훈련에 교육목표를 두고 유불선을 현실적으로 구현해 보자"는데 교육의 취지를 갖고 있다는 오 원장이 최고의 뜻을 두는 것은 바로 '생명존중'.
남달리 한문교육에 앞장서온 오용기 원장이 무료서당을 개설하고 그 동안 가르친 사람들은 대학교수 10여명을 비롯 초·중·고 교사, 전공대학생, 주부, 학생 등 약 5,000여 명에 이른다.
여기서 가르치는 한자교육의 내용은 독특한데가 있다.
자신의 아호가 달마(선사상)이듯이 유·불·선 삼교사상을 두루 섭렵해 한자를 풀어 설명하는데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일상적인 예화를 들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생활태도를 펴고 있다.
특히 금연, 금주, 채식으로 요약되는 생활지표는 건강한 미래 사회를 지향하는 캠페인으로 자신은 30년째 실행하고 있는 독특한 삶을 살고 있다.
오직 반평생을 외길 인생으로 한문무료교육에 몸 받쳐온 오용기 원장은 이미 1974년부터 1980년까지 김제 원평에서 불우 청소년들을 위해 원평 청소년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금산사 입구에서 토산품사업을 하던 중 원평새마을청소년학교 조영조 교장을 만났다.
이때 조 교장이 “불우청소년학교이니 우리 같이 불우 청소년을 위해 교육봉사에 동참해 보자”고 요청해 교감직을 맡아 학교운영전반을 책임지고 봉사했다.
오 원장은 “원평새마을청소년학교는 비록 열악한 학교이지만 자원봉사교사가 20여명에 이르고 주간 정규 3년제 6학급 360명의 향학열이 뜨거운 모범학교로 평가받았다. 특히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 90%가 검정고시 합격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일부는 회사에 취직해 진로를 개척해 나갔다”며 그때를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또한 오 원장은 “당시 원평새마을청소년학교 학생 대부분은 모악산 아래 위치한 마을에서 자라 생계가 어려워 정규 중학교에 갈 수 없는 한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도덕 교육을 통해 부모님에 대한 효성을 일깨워 주고 사회와 국가에 감사함을 가르쳐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데 중점을 뒀다. 현재 졸업생 증에는 스님, 목사 등 성직자와 중등교사, 회사 사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름 데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한편으로는 가슴이 뿌듯하다”고 자랑하고 있다.
중년을 넘긴 오 원장은 올 1월 작은 둥지를 마련,‘일요시민대학’을 개설하고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논어무료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무료 교육봉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이래서 우리사회는 정이 넘치고 따뜻한가 보다.
/이인행기자
■ 무료 한문서당 훈장님 대학생 됐다
2015.03.05
오용기 달마 한문서당 훈장 건양사이버대 다문화한국어학과 수석합격
24년째 무료 한문서당을 지켜온 훈장님이 늦깍이 대학생이 됐다. 그것도 과 수석으로 입학해 장학금을 받는다. 화제의 주인공은 전북 전주시 중앙동에서 달마한문서당을 운영중인 오용기씨(65)다.
그는 지난달 26일 발표한 건양사이버대학 다문화한국어학과 수석 합격자에 이름을 올렸다. 장학금으로 한 학기동안 등록금을 받는다.
오씨는 지난해 전주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한 뒤 올해 고교과정을 마쳤다. 1960년 전남에서 고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2학년이 되던 때 급성 장티푸스로 쓰러져 학업을 중단한 뒤 54년만이었다.
그는 30대에 들어서면서 유불선 통합사상을 접하면서 한문에 심취했다. 10여년을 주경야독으로 매진했다. 명심보감과 대학, 논어 등을 두루 섭렵한 후 전주에 유료 한문학원을 차려 후학을 길러냈다.
오씨는 원평 새마을청소년 학교 교감과 도덕회 교육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불현듯 사회에 대한 봉사를 해야겠다는 맘이 생겼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무료 한문서당이었다 1991년 전주시 전동에 문을 연 무료서당은 중앙동 등 3곳을 옮겨가야 하는 애로를 겪었지만 평소 한문을 접하기 어려웠던 직장여성과 주부, 대학생들로 붐볐다. 자원봉사 훈장님이 된 그는 독해를 남다른 방식으로 강의하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시일이 흐를 수록 수강생은 급감했다.
그는 “한국어의 70%가 한자어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실용한자 1800자를 위주로 한문서당을 운영했다”면서 “한문을 익히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데도 요즘은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오씨는 건양대 사이버 대학 다문화한국어과에서 4년 공부를 마치고 다문화사회 전문가로 인생 3막을 열게 된다. 이미 다문화사회에 접어든 국내 저변에서 마지막 봉사를 하고 싶다는게 소망이다.
그는 “평생 동양사상과 인문학 연구를 해 왔고 평생교육원과 노인복지관 등에서 고전강사로 뛴 경험을 되살려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밀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박용근 기자
원문보기: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3051409541&code=100100#csidx12a4719315e5513a7367aacac261bd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