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수필 이사회를 다녀와서
우승순
오늘은 소확행(小確幸)이 있는 날!
벌써 8월 중순이다. 여전히 덥지만, 입추와 말복을 지나면서 아침 시간 뒷산 산책로에는 한여름과는 사뭇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막바지 여름에 다급해진 매미는 목청을 한껏 돋우고, 청설모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빠졌다. 아카시 열매는 짙은 갈색으로 여물어가고, 도토리는 단단해지며, 가로수의 은행나무에도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익어간다. 진한 녹색으로 빛나던 나뭇잎들도 조금씩 옅어진다. 머지않아 엽록소가 퇴색되면 안토시안과 카로틴이 발현되어 빨강, 보라, 노랑 등으로 아름답게 물들 것이다. 숲은 이미 가을 준비로 분주하다.
올해 상반기는 정말 힘들게 보냈다. 3년 전에 가벼운 치질이 발병했었는데 수술하는 것이 싫어서 그대로 방치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계속 술을 마셨더니 치질이 치루로 악화되어 앉아있기도 불편한 상태가 되었다. 병을 키운 셈이다. 2월 초에 수술을 받았는데 중간에 재발하여 두 달 정도 무진 고생을 했다.
치루가 가라앉는가 싶더니 이번엔 이명이 심해졌다. 8년 전에 생긴 이명이었지만 그런대로 적응하며 잘 생활해 왔는데 지난 4월부터 점점 소리가 커지면서 북을 치는 듯 머릿속이 “왕왕왕”, “쿵쾅쿵쾅” 울리기 시작했다. 대학병원에서 수 십 만원을 들여 갖가지 검사를 하고나서 두근두근 검사 결과를 듣는 시간이 왔다. 의사선생님께서는 “술은 무조건 끊고, 짠 것도 먹지 마세요! 지금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보청기를 착용하게 될 겁니다.”라는 말과 함께 2주일 정도 복용할 약을 처방하면서 더 이상 병원에 안 와도 된다고 한다.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값이 비싼 액체 약과 신경안정제가 처방되었고, 꼬박꼬박 다 복용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좋아하는 술이나 실컷 마시기로 했다. 3개월 동안 금주했다가 다시 마시는 술은 그야말로 감로주였다. 그동안에 못 먹었던 아쉬움까지 더해 마구 퍼마셨다.
술 마신 다음날이면 집사람과 대화할 때 내가 잘 못 알아듣기도 하고, TV 볼륨도 점점 커지게 되면서 걱정이 된 아내는 평생 안 하던 잔소리까지 했다. “이젠 술 좀 끊지~!” 젊은 시절 골초였던 내가 20여 년 전에 금연에 성공했지만, 술은 자그마치 38년이나 마셔온 터라 하루아침에 딱 끊을 자신이 없다. 술로 얽히고설킨 관계가 얼마인데...... 금연은 혼자만의 일이지만, 금주는 그동안 함께 했던 술친구와 다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한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상반기 내내 머리가 무겁고 집중이 안 되어 글 한 편 제대로 못 썼다. 늘 우울했고 짜증도 심해졌다. 게다가 난청은 무의식적으로 대인기피증을 동반하다. 세상에는 노력해서 안 되는 일도 많다. 숲을 산책하다보면 때를 기다리고, 때에 순응하는 나무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싹을 틔우고 잎을 만들 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 단풍이 들고 낙엽을 떨굴 때가 따로 있다. 나무는 때를 앞당기거나 늦추려고 발버둥치지 않는다. 기다릴 뿐이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토록 집중이 안 되고 무겁기만 하던 머릿속이 7월 중순부터 신기하게도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난청은 더 좋아지지도 않고, 더 악화되지도 않는 그런 상태였지만, 다시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게 되면서 편안해지고 몰입도 되고 있다. 이상하리만치 술 생각도 덜 난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가 온 것일까?
오늘은 모처럼 춘천수필문학의 이사회에 참석했다. 회의 안건 중에 2023년 연간집인 「춘천수필 제16집」 발간을 위한 내용도 있어서 편집을 맡은 나를 이병옥 회장님께서 호출하여 참석하게 되었다. 문인들을 만나면 글을 쓰는 공통점이 있어 반갑고 이야기도 풍성해진다. 모임 장소가 명동 일대의 지하상가였는데 정말 신천지를 발견한 듯했다. 지하상가는 바깥 날씨의 폭염에도 아랑곳없는 시원한 ‘무더위 쉼터’였다. 곳곳에 더위를 피해 찾아온 사람들이 노천 의자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거나, 시원한 음료와 함께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으며, 인근의 식당에도 점심시간에 찾은 직장인들로 북적였다. 나 같이 은퇴한 백수에게는 한여름엔 더위를 식히고, 한겨울엔 추위를 피하는 명소로 안성맞춤인 것 같다.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멍’때리기’를 해도 좋고, 고민하던 수필의 첫 문장이나 마지막 문장을 위해 사색에 잠길 수도 있겠다.
회의진행 후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은 ‘추억의 옛 다방’으로 향했다. 오래 전부터 그곳에 가보고 싶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몇 년이 흘렀다. 마침 오늘 문우님 중에 그곳에서 봉사하시는 K라는 분이 계셨기에 일행과 함께 방문해 보기로 하였다. 나는 지하상가를 1년에 한두 번 방문할까 말까 하는데, 갈 때에도 중앙로타리에서 백화점 방향으로만 다녔다. 그런데 반대편인 로터리에서 중앙시장 쪽으로도 그렇게 길게 이어진 상가가 있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고, 모임 장소를 찾느라 도청 올라가는 방향의 지하상가도 오늘 처음 가봤다. ‘추억의 옛 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더위가 싹 달아날 만큼 깜짝 놀랐다. 우선 가격이 저렴하여 너무 좋았고,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시니어 분들이 옛날방식 그대로 서빙해주시는 모습에 또 한 번 감동했다.
다방커피는 1,000원, 아메리카노는 2,000원이었고 가장 비싼 메뉴는 4,000원 짜리 쌍화차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K문우님께서 살짝 귀뜸을 해주셨다. “여기 쌍화차는 가루로 만든 것을 물에 타는 것이 아니라, 각종 재료를 직접 끓여서 만들고 싱싱한 계란 노른자도 “퐁당‘ 띄워 준다.”고 하셨다. 식사대용의 미숫가루는 2,000원이고, 메뉴 표에 없는 달달한 봉지(믹스)커피도 냉커피로 주문하여 마실 수 있다. 한 시간 정도 왁자지껄 담소를 즐기는 동안 손님들이 연신 드나들었다. 대부분이 로맨스그래이였다. 나는 설탕을 넣은 다방커피와 냉커피를 맛 봤다. 그 옛날 다방커피의 향에 이끌려 추억을 떠올려 봤다. 좌충우돌했던 청춘시절과 지금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되어있을 그 여인도 생각해 봤다. “억척스럽게 변했을까. 조용한 모습일까. 혹시 글쟁이가 되진 않았을까.” 언젠가 편안한 말동무가 생기면 이곳에서 긴 인생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방을 나섰다.
7월 27일부터는 금주를 결심했다. 100일 정도 해보고 성공한다면 아예 끊을 생각이다. 어쩌면 실패한 계획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계속 시도해볼 작정이다. 그동안 술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때론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나무가 헌 잎을 털어내고 이듬해 새순을 만들 듯, 인생도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때가 있는 것 같다. 때를 잘 알아차리는 것도 큰 행운이다.
요즘은 나무와 숲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30여 년 동안 애막골 뒷산을 산책하면서 관찰하고 메모해 두었던 내용을 토대로 관련 서적들을 찾아보며 정리하는 중이다. 밀린 글이 많다. 산책시간을 빼곤 방구석에 콕 박혀 있다가 오늘 모처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봤다. 초대해 주신 이병옥 회장님께 감사드리며, 언제나 밝고 씩씩한 에너지로 챙겨주시는 김동순 선생님 고맙습니다. 다정한 문우들과 함께 마음에 점을 찍으며(點心) 푹푹 찌는 더위도 잊을 만큼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행복이 있는 하루였다.
첫댓글 힘든 시간을 보내셨군요 몸이 불편하면 매사에 짜증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마음이 괴로워도 몸 못지 않게 힘들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은퇴 7년째인 올해 상반기에 몸도 마음도 가장 힘들었습니다.
내 경우는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리는 순간 몸과 마음이 오히려 편해 집디다.ㅎ
요즘 좀 뜸~ 하셔서 궁금했는데........
상담학을 전공하신 분이니 금방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화이팅 하세요! ^^
@우승순 그덕분에 도움이되고 있어요
맹지해결 문제인데
해결이 어렵네요
알박기로 꼬장을 부리니
소통이 어렵네요
결국 민사로 가야하나 고민중입니다
응원해주세요
나만 힘든 여름을 보냈나 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네요. 수술에 이명까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회복 단계로 들어섰다니 감사합니다. 뭐니뭐니 해도 건강이 젤입니다. 건강 또 건강하세요. ^^
회장님~~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빠른 시일 안에 마음에 '스파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그래서,
안부는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또 해봅니다.
힘든 날들이 많았군요.
힘든 중에도 희망찬 생각을 구상하고
오늘의 임원회 모임을
중심으로 섞은
재미와 의미가 섞인 글
잘 읽었습니다.
상쾌한 날들이
우리들 모두에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thank you 😊
지난 번 운전 중에 접촉사고로 .......
화를 내는 대신 경례를 하셨다는 말씀이 오래 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교훈으로 삼게 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