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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비록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 재건을 명령하셨더라도,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고레스의 명을 받아 시작한 성전 재건은 다리오 왕 6년에나 완성이 되었는데, 그동안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성전 재건을 끊임없이 방해를 해 왔다. 성전 재건 기간 중 고레스,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왕의 이름이 언급 되는 것을 보면, 왕별로 재위 기간을 10년 씩만 잡는다고 하더라도 대략 40년 정도는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시작할 때는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장기간 지속되는 대적들의 방해와 모함과 그로 인한 왕들의 금지 등으로 인해서 이 명령을 이어 나가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과연 무엇때문에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지 심각한 자괴감이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자신의 선지자들을 백성에게 보내셔서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키신다. 그 때마다 백성들은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떠올리면서 성전 재건에 힘을 냈을 것 같다.
수 십 년간 이어지는 성전 재건 기간 동안에는 아마도 백성들의 세대가 교체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레스 왕 원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던 백성들 중 대부분은 아마도 성전 재건이 완료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백성들이 하나님을 소망하며 비록 자신의 때에는 보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 유언으로 남겨 이어지도록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성전 재건의 과정을 보노라면, 성도의 견인이란 이런 것이라는 표본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무리 지리한 방해가 있더라도, 어떤 때는 전혀 소망이 없어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묵묵히 인내하며 순종하며 지켜나가는 성도의 삶, 그리고 그런 성도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성전 재건 과정에 드러나 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공의를 실현하시려는 이 때에, 대적자들의 무수한 방해가 있더라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20230222
#에스겔
내생각에,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점점 넘치는 에스겔의 환상은,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바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의 예언적 예표가 아닐까 싶다.발목은 예루살렘,무릎은 유대,허리는 사마리아,잠기는건 땅끝으로 절묘하게 대비되는듯.
#벨기에신앙고백서 22.믿음의 의
We believe that for us to acquire the true knowledge of this great mystery the Holy Spirit kindles in our hearts a true faith that embraces Jesus Christ, with all his merits, and makes him its own, and no longer looks for anything apart from him.
우리가 믿는 바는, 우리가 얻은 이 위대하고 신비로우며 참된 지식은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밝히신 참된 믿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공로를 영접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자체로 삼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더이상 아무것도 구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나 사람으로서나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것과, 창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성도들을 정하신 것과,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것과, 이스라엘의 여호와로 다스리신 것과, 때가 되어 하나님 우편에서의 하늘의 영광의 인성을 버리시고 처녀에게 잉태되어 태어나심으로써 이 땅의 비천한 인성으로 낮아지신 것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과, 부활하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셔서 이전의 영광과 권세를 회복하셨다는 것과, 이 모든 것이 세우신 교회와 택하신 성도들을 위한 사역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진리이다.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의 지혜자들은 자기들의 지성으로는 터무니 없어보이기 때문에 코웃음치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지식이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거짓없는 참된 진리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과 믿음은 통상적으로 한번에 단숨에 완전무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믿는지 안믿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고 은밀하게 시작된다. 아울러 이 지식과 믿음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령께서 억지스럽게나 강압적으로나 일방적으로 주입하시고 떠넘기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원해서 깨닫고 믿게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당신의 존재를 숨기시고 비밀리에 역사하신다. 때문에 교회 내 거짓 교사들은 이 원리를 알지 못해서 사람이 성령을 힘입지 않고도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구원의 지식과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짓 교훈을 퍼뜨리며 미혹해 왔다.
For it must necessarily follow that either all that is required for our salvation is not in Christ or, if all is in him, then he who has Christ by faith has his salvation entirely.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 전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 구원에 요구되는 모든 것이 있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전적으로 구원을 소유하게 된다고 하는 양자택일에 필연적으로 놓이게 됩니다.
Therefore, to say that Christ is not enough but that something else is needed as well is a most enormous blasphemy against God-- for it then would follow that Jesus Christ is only half a Savior. And therefore we justly say with Paul that we are justified "by faith alone" or by faith "apart from works."^53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에 충분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극히 심각한 신성모독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절반의 구원자밖에 안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라고 바울 사도와 함께 올바르게 말합니다.
교회 밖의 세속인들은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기 때문에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교회 내에 원수 마귀가 뿌린 가라지 같은 거짓 교사들은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심을 인정하지만 교묘하게 그 공로의 절대성만큼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구속사역을 하신 것은 맞지만, 그것을 믿는 것 자체는 사람의 의지와 능력에 있다고 한다거나, 일정 분량의 선행으로 구원의 공로를 삼아야 한다거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너무 높으시니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 또는 하늘의 천사들 또는 탁월한 신앙의 성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들이 마귀에게서 비롯된 거짓 교사들의 거짓 교훈들이다.
However, we do not mean, properly speaking, that it is faith itself that justifies us-- for faith is only the instrument by which we embrace Christ, our righteousness.
하지만 우리는 이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당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지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 믿음으로 고백한다는 것 자체가 신자의 행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신자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은 믿는다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드러나게 하신 그 믿음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위의 주체자는 비록 신자 자신이라 하더라도 행위에 믿음을 부여하신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의 심령을 새롭게 하셔서 거듭나게 하시면 성도의 지성과 의지는 믿음이라는 행위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시작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으므로 사람은 믿는 행위를 했다고 해서 구원의 공로를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But Jesus Christ is our righteousness in making available to us all his merits and all the holy works he has done for us and in our place. And faith is the instrument that keeps us in communion with him and with all his benefits.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공로와 거룩한 사역들을 우리 안에 적용시키십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하고 그분의 모든 유익을 누리도록 유지시키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When those benefits are made ours they are more than enough to absolve us of our sins.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유익들을 우리의 소유로 받게 되면 우리는 죄사함과 더불어 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공간 안에서의 피조물인 사람으로서 행하신 구속사역으로 인해 우리의 의가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영광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의 그 자체로서 영원 전부터 우리의 의가 되시기로 협의하시고 예정하시며 그에 따라 시공간 안에서 낮아지심으로 구속사역을 행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의를 전가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의를 성도들에게 주실 때에는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가 아니라, 반드시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보혜사로서 성도의 영에 보내셔서 거하시게 하시고 그들의 영을 새롭게 하셔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게 하신 다음에야 그 믿음을 조건으로 죄 용서와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다. 따라서 믿음은 성도 자신의 행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기원은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세 위격들께 있기 때문에 성도는 믿음이라는 행위를 구원의 공로로 내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한다는 것은 단지 어떤 모종의 신비로운 체험이나 극단적인 감정의 복받침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에 기록된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와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를 거짓 없는 참된 진리로, 허구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판단하고 인정하며, 그것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과 사역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내 삶을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이 땅의 눈에 보이고 즉각적인 부귀영화가 아니라 주님 계신 하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소망하는 삶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언제나 고난과 역경과 손해가 따르게 마련인데, 그러한 것들도 견고하게 인내하며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거짓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구속사역을 행하셨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허구적인 설화로 치부하거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정작 자기와는 별 상관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도 사실이라 인정하고 자기와 상관있는 것으로 여기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 등이 포함된다.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며 내세우면서도 지나치게 학문성을 내세우며 합리주의나 이성주의 마냥 성경의 신비를 훼손하는 것은 거짓 믿음에 기인한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교회 자체와 목사들을 맹종하게 하거나 맹종하는 것은 거짓 믿음이다. 성경을 가르치고 전하는 복음 사역보다 다른 외부적인 활동을 중시하고 그 위주로 하는 것은 거짓 믿음이다.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거짓 믿음이다. 주님의 하늘 나라에서 받을 복과 상급을 바라보게 하지 않고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만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거짓 믿음이다. 교회 다닌지 오래 되었어도 말이나 행동이 거룩해지지 않는 것은 거짓 믿음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도 사과나 배상도 하지 않고 회개기도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거짓 믿음이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0220222
#요한계시록 #Revelation 3:2-6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行爲의 穩全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Wake up! Strengthen what remains and is about to die, for I have found your deeds unfinished in the sight of my God.
Esto vigilans, et confirma cetera, quæ moritura erant. Non enim invenio opera tua plena coram Deo meo.
γίνου γρηγορῶν, καὶ στήρισον τὰ λοιπὰ ἃ ἔμελλον ἀποθανεῖν· οὐ γὰρ εὕρηκά σου ἔργα πεπληρωμένα ἐνώπιον τοῦ Θεοῦ μου·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悔改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Remember, therefore, what you have received and heard; hold it fast, and repent. But if you do not wake up, I will come like a thief, and you will not know at what time I will come to you.
In mente ergo habe qualiter acceperis, et audieris, et serva, et pœnitentiam age. Si ergo non vigilaveris, veniam ad te tamquam fur et nescies qua hora veniam ad te.
μνημόνευε οὖν πῶς εἴληφας καὶ ἤκουσας, καὶ τήρει καὶ μετανόησον. ἐὰν οὖν μὴ γρηγορήσῃς, ἥξω ὡς κλέπτης, καὶ οὐ μὴ γνῷς ποίαν ὥραν ἥξω ἐπὶ σέ.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셨을 때 제자들에게 열처녀 비유와 달란트를 분배받은 종들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부지런하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바로 맞이할 수 있게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였으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가 결국 혼인 잔치에서 배제되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은 그것으로 사업을 해서 각각 두배로 늘렸지만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그저 땅에 묻어 숨겨놓았다가 받은 것마저 빼앗기고 쫓겨나고 말았다. 주님의 오른편에 분류된 양의 무리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비천한 자들을 힘껏 도움으로써 주님께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나, 왼편에 분류된 염소 무리들은 그런 비천한 자들을 외면하고 유력한 자들과만 어울렸다가 주님께로부터 정죄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가난한 자를 외면하고 부자를 접대하는 당시 교회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렇게 교회의 외적인 명성과 세력을 크게 키웠어도 앙꼬 없는 찐빵이요 스테이크 없는 코스요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 분명히 경고하셨다시피 사데 교회들이 주님께로부터 복음과 성령을 아예 못받았던 것이 아니었다. 사데 교회들은 분명 주님께로부터 복음과 성령을 받아놓고서도 그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그 성과는 너무나 지지부진하며 들여야 하는 수고는 막대하다는 이유로 가시적인 성과가 바로바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사역에 치중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외형적인 사역에만 치중해 온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께서 마치 도둑 같이 갑자기 오셔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받은 달란트를 숨긴 악한 종과 가난한 자들을 외면한 왼편의 염소 무리처럼 심판하시리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내리신다. 만약에 사데 교회들이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있어서 주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려 한다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사역을 멈추고 하나하나 철저하게 재점검을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외형적인 사역을 책망하셨으므로 사데 교회들은 그것들부터 일단 멈춤하고 돌아보고 점검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데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이념 운동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사데 교회의 이름으로 유명인들을 교인으로 포섭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사데 교회의 이름으로 지역사회 활동이나 구제 활동을 일단 멈춰야 한다. 사데 교회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알려주는 세미나 여는 것을 멈춰야 한다. 교회의 영어권 외국인 교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린 자녀들의 영어학습을 목적으로 영어예배를 신설하는 것을 당장 멈춰야 한다.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者 몇 名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合當한 者인 緣故라
Yet you have a few people in Sardis who have not soiled their clothes. They will walk with me, dressed in white, for they are worthy.
Sed habes pauca nomina in Sardis qui non inquinaverunt vestimenta sua : et ambulabunt mecum in albis, quia digni sunt.
ἀλλὰ ἔχεις ὀλίγα ὀνόματα ἐν Σάρδεσιν ἃ οὐκ ἐμόλυναν τὰ ἱμάτια αὐτῶν, καὶ περιπατήσουσιν μετ’ ἐμοῦ ἐν λευκοῖς, ὅτι ἄξιοί εἰσιν.
주님께서 합당하다고 인정하신 사데 교회의 몇 안되는 참된 성도들은 아마도 사데 교회 내에서는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도 관심받지도 못하거나 아니면 교회의 사역에 사사건건 시비걸고 딴지거는 교회를 괴롭고 힘들게 하는 교인이라는 배척을 받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교회적으로 무관심과 배척을 받으면 굳이 사데 교회가 아니라 다른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로 옮겨서 신앙생활을 해도 될텐데 그러지 않은 혹은 그러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그 사데 교회가 복음으로 처음 세워졌을 때의 초창기 멤버였거나 사데 교회에서 처음 참된 신앙을 접하게 되어 신앙의 가정이자 고향으로 여겨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성도들은 어쩌니저쩌니 해도 사데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의 모태가 되어 양육받았기 때문에 많은 신령한 빚을 지고 있었고 그래서 지금의 사데 교회가 아무리 어긋난 길로 가고 있다고 해서 저버리기 보다는 끝까지 교회에 남아서 교회의 보존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작정하였을 것이다. 사데 교회 안에서 교회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것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참된 신앙을 홀로 유지해 나가는 것은 마음의 크나큰 괴로움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에서라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될만한 것들을 사데 교회에서는 항상 거슬려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사데 교회 전체의 흐름을 혼자서는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애통함에 빠져있어야 한다. 사데 교회 안에서 홀로 겪는 그 신령한 심적 고통을 드러낼 수도 없이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 그들이 사데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주님께 교회를 보존해 달라고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사데 교회의 그 참된 성도들의 애통함과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받으시며 그들이 장차 주님께서 주시는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게 되리라는 위로와 격려를 주신다. 사데 교회들의 참된 성도들은 주님께서 그 교회들을 어떻게든 보존하시려고 파견하신 주님의 특사들인 것이다. 아합 시대 이스라엘이 아무리 타락하고 범죄해서 선지자 엘리야 조차도 의인이 자기 혼자 남았다고 절망했을 때에도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을 보존하시려고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 명을 남겨두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 성도들을 존귀하게 하시리라는 것이 이 땅의 사데 교회에서 그렇게 되리라는 뜻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사데 교회들은 스스로 주님의 경고를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죽어가는 복음 사역을 살리려 하지 않고 방치하다가 결국 죽게 내버려두고 성령을 소멸시켜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성도들은 자신들의 사데 교회들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황폐하게 될 때까지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사데 교회들의 참된 성도들이 받을 존귀는 그들이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친 이후나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마지막 날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5 이기는 者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生命册에서 決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天使들 앞에서 是認하리라
The one who is victorious will, like them, be dressed in white. I will never blot out the name of that person from the book of life, but will acknowledge that name before my Father and his angels.
Qui vicerit, sic vestietur vestimentis albis, et non delebo nomen ejus de libro vitæ, et confitebor nomen ejus coram Patre meo, et coram angelis ejus.
Ὁ νικῶν οὕτως περιβαλεῖται ἐν ἱματίοις λευκοῖς, καὶ οὐ μὴ ἐξαλείψω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ἐκ τῆς βίβλου τῆς ζωῆς, καὶ ὁμολογήσω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ἐνώπιον τοῦ Πατρός μου καὶ ἐνώπιον τῶν ἀγγέλων αὐτοῦ.
사데 교회들의 참된 성도들은 비록 자신들의 교회들에서는 인정이나 주목이나 관심을 받지 못하였어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승리자로 여기시고 직접 그들에게 하늘의 흰 옷을 입혀주시며 그들을 이끌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오셔서 모든 천사들 앞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사데 교회들에서 행한 모든 수고와 인내가 어떠한지를 선포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승리자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따라 구원 여부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승리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주님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변함없이 선택하신 이들이고 각자의 사데 교회들 안에서 꿋꿋하게 홀로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하늘에 오르게 된 성도들이다. 도리어 처음에는 복음의 원리를 따라 선하게 교회 사역을 시작했을지라도 시간이 흘러 육적인 행사로 변질시킨 사데 교회들의 사역자들과 교인들은 창세 전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버림받은 자들로서 승리자들이 존귀함을 얻을 때 그들을 올려다보며 영원히 타는 불못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될 뿐이다.
6 귀 있는 者는 聖靈이 敎會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Whoever has ears, let the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Qui habet aurem, audiat quid Spiritus dicat ecclesiis.
Ὁ ἔχων οὖς ἀκουσάτω τί τὸ Πνεῦμα λέγει ταῖς ἐκκλησίαις.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 주신 책망과 경고의 말씀은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과 동일한 것이므로 오늘날 복음 사역보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위한 행사에 치중하는 사데 교회들은 마땅히 이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새겨들어야만 한다.
#20200222
#창세기 #Genesis 37장.
요셉과 형제들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야곱은 40세에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였고 47세에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 실바와 빌하 네 명의 아내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91세에 라헬에게서 요셉을 얻었고 대략 1백세 전후에 라반을 떠나 에서와 만나 화해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로 죽게 된다. 그러므로 이 당시 요셉과 베냐민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이미 성인 및 중년의 시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요셉과 베냐민은 거의 아들뻘 늦둥이 이복 동생인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통상적으로 본다면 아무리 가족 관계가 복잡하여 이복 동생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면 동생이 아니라 아들처럼 생각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요셉이 자기보다 나이차 많이 나는 장성한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일러 바친데에는 몇가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나 적어도 그가 형들이 미워서 꼬투리를 잡기 위한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추정해 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요셉이 야곱의 손에서 너무나 곱게 자라다보니 소위 분위기 파악을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어서 자기가 말하는 것이 형들을 곤란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고 아버지 야곱에게 형들과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말하는 것을 듣고 다른 아들들의 잘잘못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요셉은 원래 명철하고 똑똑한데다 형들을 사랑하는데, 자기가 보기에 형들의 잘못이 너무나 심각하여서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물론 형들을 사랑하지만 아버지 야곱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요셉은 아버지를 위해서 형들의 사랑을 포기한 것일수도 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이라 모든 것을 다 만족시킬 수 없다. 따라서 교회에서건 어디에서건 요셉과 같은 갈등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럴 때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 더욱 크고 중요하며 참된 가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선택받지 못한 다른 쪽이 너그러운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해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를 대적하기 마련이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대적함 마저도 감수해야 한다.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이스라엘에게는 비록 네 명의 아내들이 있었지만 원래 그는 라헬만 있으면 충분히 만족하였다. 레아와 실바와 빌하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에게는 원치 않는 아내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라헬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명의 아내들에게도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얻은 아들과 다른 아내들에게서 얻은 아들들간에는 애정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세 명의 아내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이미 장성한 성인이었고 어떤 아들들은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로서는 아무리 아버지 이스라엘이 자기들은 제쳐두고 요셉과 베냐민만(아마도) 끼고 돈다고 해도 어른으로서 그러려니 하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갔어야 했다. 게다가 요셉이 자기들의 잘못을 세세하게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것을 알았다면 그것을 인지하고 고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먼저인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고치려 하기 보다는 그것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의 형들은 한마디로 그 나이에 걸맞는 인격과 품성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속된 말로 그들은 나이를 뒷구멍으로 먹은 것이다.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대체로 요셉의 꿈 이야기를 보면 우리는 통상 요셉이 참으로 눈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미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당시 요셉은 17세의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저 신기한 꿈이라 생각해서 별다른 의도 없이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이미 장성해서 어느 정도의 분별력이 있었던데다 요셉을 미워했기 때문에 요셉이 자기들을 얕보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 이스라엘은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꿈의 이야기를 듣고서 순간적으로는 인간적인 마음에 요셉을 책망하였으나 그 꿈에 하나님의 예언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을 임신했을 때 두 민족이 자기 뱃속에 있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였다. 제사장 엘리는 하나님의 이상이 희귀한 시절에도 어린 사무엘이 자다가 세 번 씩이나 자기를 찾아온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사무엘에게 그 부르심에 해야 할 대답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는 지식에서나 삶에서나 장성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아직 어린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특별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명하게 밝혀 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