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정원 증원을 놓고 정부와 의사간의 대결투를 벌인지도 벌써 3개월을 넘기고 백일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2월 6일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2천명 늘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2주 뒤인 2월 19일 전국의 주요 병원의 대다수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에 출근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3개월동안 병원 현장은 비상진료체계속에 어수선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부와 의사들은 치열한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습니다. 정부는 정원 증원을 밀어붙였고 이달말 확정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제 빼도 박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의대 현실은 그 많은 신입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내년도 새로 입학할 학생들이 제대로 수업을 받을 수 있을런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수험생들이 존재하는 학교나 학원에서는 요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상당수 이공계 지원 학생들이 의대쪽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내년에 또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한국적 상황에서 일단 올해 의대에 붙고 보자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교에서 이공계에 합격해 다니던 학생들도 휴업을 하고 학원가로 몰리는 형국입니다. 회사를 다니는 직원들도 휴직을 신청하고 학원으로 향하는 모습도 여기저기 보이고 있습니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선택한 행동들입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 목을 매는 모습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별로 볼 수 없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토록 한국 사회는 의사에 대해 신앙과도 같은 추앙심을 보이게 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높은 보수 즉 돈을 많이 번다는 생각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평생 직장이 가능하다는 현실적인 판단에 의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판검사는 변호사로 평생 활동할 수 있으며 의사들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는 평생 의사로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되어서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해 주기 위함보다는 단지 돈과 평생 직업으로 의사를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는 국경없는 의사회나 아프리카나 중앙아시아 오지에 가서 의술을 펼치기도 하지만 그 수는 전체로 볼 때 극히 일부입니다.
또한 의사들 대부분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개업을 하거나 대형병원에서 일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중소도시나 군단위 지역에 의사가 부족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의사들이 되고 말겠다는 그 의지속에 한국이 지닌 병폐를 그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만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깝고도 멀다는 일본도 한국과 사정이 비슷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긴 한국의 의사시스템이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이후 바뀐 것이 별로 없고 일본의 체계를 대부분 그대로 답습했기에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입니다. 일본도 의대 증원과 관련해 정부와 의사들 사이에 심한 갈등이 존재했고 지금도 의료 편중이라는 고질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대도시 집중현상이 일본에 비해 심화되어 있고 인구당 의사수도 서울은 일본 도쿄와 비슷하지만 수도권 즉 경기권으로 벗어나면 일본에 비해 더욱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일본의 의료계도 한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황이 자신들과 비슷한데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겠지요. 일본 의료계의 대체적인 생각은 한국 정부가 의사라는 엘리트 집단 때리기로 인기를 얻으려는 의도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그래도 중소도시와 군단위 지역의 의사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숫자를 늘릴 수 밖에 없지만 충원된 의사들이 과연 중소도시와 군단위 지역에서 의료활동을 하려고 할 지는 의문이다라는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유독 의대정원에 민감하고 의사가 증원되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의료관련 전문가들은 한국의 의료계는 서구권의 의료계와 생각 자체가 다르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구권에서는 의사는 대단히 존경받는 직업군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시말해 유럽을 비롯한 서구권은 성직자와 법률가들과 함께 예로부터 단순 전문직을 벗어난 존경받는 직업군으로 분류가 됩니다. 아주 오랜 시절인 그리스와 로마시대부터 자리를 잡은 그 직업 윤리의식속에 성장해 온 직업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히포크라테스 선서같은 의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환자의 치료를 위해 존재한다는 그 직업 의식말입니다.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일종의 소명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경우가 사뭇 다릅니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의사시스템이 도입됐습니다. 일본의 의사 사고방식이 대체로 그대로 유입됐다는 것입니다. 일본도 메이지유신때 급속하게 의료인들을 배출했고 그 중 상당수가 유럽 등지로 나가 의술을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서둘러 근대화 추구를 강요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의사들의 정신을 등한시한 채 의학 지식과 기술 습득에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한국에도 그대로 유입돼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일본 의료계에서 자체적으로 자성론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가장 위협받는 직업이 바로 의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저출산과 초고령화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소멸될 가능성이 높은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초고령화로 인해 보살펴야 할 노인층이 더욱 급증할 것입니다. 지금보다 앞으로 10년안에 엄청난 의료계의 변화가 발생할 것입니다. 한국 의료계도 변해야 합니다. 이번 정부의 행태를 찬성하거나 두둔할 생각 전혀 없습니다. 단지 의사들도 사고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작정 백지화나 해당 공무원의 사퇴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으로 한국의 의료계를 위해 필요한 것인가를 조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의사들은 이 나라의 가장 뛰어난 인재들입니다. 지금 온통 이과 학생들은 오로지 의사가 되겠다고 모든 것을 다 거는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 똑똑한 학생들이 몰려야 할 이공계의 현주소를 한번이라고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의 존경받고 책임있는 직업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돈때문에 그리고 평생 직업을 할 수 있다는 그 단견적인 사고방식이 과연 이 나라 의료계 그리고 나아가 이 나라 과학계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도 곰곰히 생각하는 책임있는 의사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동안 현직 의사들이 행한 모습이 과잉 의사추종세력을 확대한 것이 아닌지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로지 의사와 판검사들만이 선망의 대상이며 우러러보는 그런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곳인가에 대해서도 잠시라도 눈길을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2024년 5월 27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