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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문교수습정론(六門敎授習定論)
무착보살(無着菩薩) 본송 지음
세친보살(世親菩薩) 해석
의정(義淨) 한역
송성수 번역
이제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고자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선정(禪定)을 익혀서 빨리 모든 번뇌를 여의도록 하겠다. 이 때문에 이 방편을 서술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해탈을 구하는 자 쌓아 모으되
부지런히 수습함에 머물러서
세 가지 원만함을 얻고 난다면
그는 의지함이 있어 선정을 닦는 사람이리라
≪해석≫ 이 맨 처음의 한 게송이 여섯 문[六門]을 통틀어 표시한 것이다. ‘해탈을 구하는 자’라고 말한 것은, 이 해탈 구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요, ‘쌓아 모으되’라고 말한 것은 수승한 행[勝行]을 돕는 식량(食糧)을 쌓아 모을 수 있음을 일컫는 것이다. ‘부지런히 수습함에 머물러서’라고 말한 것은, 반연하는 곳에 마음을 잘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를 ‘선정’이라고 이르는 것은, 산란하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문】어떻게 수습하는 것을 가리켜 ‘세 가지 원만함을 얻고 나면 의지함이 있어 선정을 닦는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답】원만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스승과 제자의 원만한 것이요, 둘째는 반연하는 바의 원만한 것이요, 셋째는 뜻을 일으킴이 원만한 것이다. ‘의지함이 있음’이란, 다음의 세 가지 선정을 이르는 것이니, 첫째는 머트러운 생각[尋]도 있고 세밀한 생각[伺]도 있는 선정이요, 둘째는 머트러운 생각은 없고 세밀한 생각만 있는 선정이요, 셋째는 머트러운 생각도 없고 세밀한 생각도 없는 선정이며, ‘선정을 닦는 사람’이라 함은,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를 닦는 그러한 사람을 이르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해탈을 원하고 즐거운 마음을 일으키고, 다시 일찍 해탈을 돕는 식량을 쌓아 모아서 그 마음을 선정이 의지한다면, 그는 스승과 제자 등 세 가지 원만함이 있어 이를 의지로 삼고, 의지함이 있으므로 해서 수습하며, 선정을 수습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세간의 모든 복과 또는 수승 원만한 과보[果]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이와 같이 하여 그 차례를 순조로이 성립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 대목을 ‘통틀어 표시함’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삼승(三乘) 안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는 이를
해탈 구하는 사람이라 이르고
두 장애를 완전히 제거하는 이를
해탈한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네
집수(執受)와 식(識)이
바로 두 장애의 체성(體性)인 줄 알지니
의혹의 종자와 일체의 종자가
능히 두 사람을 얽어매기 때문이라
이미 번뇌의 장애는 제거했다 하더라도
아직 습기를 깨끗이 제거하지 못한
이 같은 것을 성문승(聲聞乘)이라 하나니
나머지는 부처님만이 끊을 수 있으시네
저 의혹이 비록 없더라도
거둥하는 것에 의혹됨이 있다면
이 습기가 바로 전생의 것이니
만약에 제거한다면 이와는 다르리라
≪해석≫ 이 네 게송은 해탈 구하는 자를 해석함이니, 이를테면, 성문승(聲聞乘) 따위가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승 안에서 마음으로 해탈하기를 좋아하는 이를 해탈 구하는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을 해탈이라 하는가 하면, 두 가지 장애를 완전히 제거하는 그것을 해탈이라 하며, 어떤 것이 두 가지 장애이냐 하면, 제거란 그것이 바로 해탈을 뜻함이라, 집수(執受)와 식(識)이 곧 두 가지 장애의 체성인 줄 알아야 한다.
식이란, 아뢰야(阿賴耶)의 식이 그것이고, 고집 수란, 곧 의지한다는 뜻이 그것이라. 이를테면, 이 번뇌와 소지(所知)가 두 가지 장애의 체성인 것이다.
이는 또 무엇이냐 하면, 의혹의 종자[惑種]가 곧 번뇌장애의 자성(自性)이고, 일체 종자[一切種]가 곧 소지(所知)장애의 자성이다. 또 일체 종자는 곧 두 가지 장애의 종자이어서 능히 두 사람을 얽어매는지라, 번뇌장의 종자가 성문을 얽어맬 수 있고, 일체 종자가 보살을 얽어맬 수 있나니, 성문과 보살이 거기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을 이 두 가지 해탈의 차별이라 하는가 하면, 이른 바 성【문】사람은 아직 습기가 제거되지 못하고 번뇌장만 끊어서 해탈을 증(證)하는데, 불ㆍ세존께서만은 그 모든 것을 다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습기인가 하면, 저 의혹이 비록 짓는바 형용은 없으나 의혹됨이 있는 것 같은 이것을 습기라 하나니, 다시 말하자면, 저 의혹이 비록 그로 하여금 짓는바 형용은 없으나 의혹됨이 있는 것 같은지라, 이 이른바 동작과 거동에 의혹됨이 있는 것 같다 함은, 곧 이것이 인(因)에서 과(果)를 설하는 것이어서 이 때문에 저 성문(聲聞)ㆍ독각(獨覺)으로선 아직 알지 못하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습기인가 하면, 전생 때의 모든 관습된 일이 아직 그 남은 기운이 있는지라, 이제 비록 의혹이 다 되었다 해도 어떤 형상이 더러운 형상과 같은 것을 습기라 하나니, 만약에 다 끊을 수만 있다면 이와는 같지 않을 것이고, 응당 말하기를, ‘저 습기가 다 없어져 의혹된 것 같은 거둥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모든 선근(善根)을 심어서
의심 없이 열뇌(熱惱)를 제거하고
법의 흐름에 청정하게 되는
이것을 쌓아 모음이라고 이르나니
능히 간직하고 법 듣기를 좋아하여
그 두 가지 소견의 잘 제거하고
듣기만 하여도 마음으로 기뻐 만족하는
이것이 네 가지 일인 줄 알아 두라
≪해석≫ 이 두 게송은 쌓아 모으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경 가운데 “이 사람이 먼저 다문(多聞)을 닦아 익히고, 다시 바른 법을 듣고서 모든 소견의 열뇌(熱惱)를 이미 깨끗이 제거한다면, 마음의 덮임과 얽매인 것을 바로 항복받으리라.”고 설한 것과 같음이라, 이 글에 의지하기 때문에 처음의 게송을 설한 것이니, ‘모든 선근을 쌓아 모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바른 법을 능히 간직하기 때문에 이것을 선두로 그 믿음 따위의 선한 법을 늘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의심이 없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법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또 법을 앎으로 말미암아 이미 생겨났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모든 의혹을 다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열뇌(熱惱)를 제거함’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두 가지 소견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소견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알아주게 하려는 소견이고, 둘째는 스스로가 훌륭하다는 소견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그는 곧 생각하기를, ‘어쩌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이 덕을 갖춘 사람인 줄을 알게 할 수 있을까.’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알아주게 하려는 소견이고, 이 소견에 의지하여 스스로가 훌륭한 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르되 스스로가 훌륭한 체하는 소견이라 함이다. 이 두 가지가 능히 마음을 태워 덥게 하기 때문에 열뇌라고 이르는 것이며, ‘법의 흐름에 청정하게 됨’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번뇌를 능히 제거함으로써 다만 법을 들을 적에 마음껏 기뻐 만족하나니, 위의 제거[除]한다는 말이 여기까지 미친다. 이 때문에 법의 흐름에 들어가서 청정하게 되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법을 들을 그 때,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계속 흘러들어서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덮임과 얽매임이 그쳐 쉬는 것이다. 만약에 법 듣기를 싫어하지 않기를 쉬지 않는다면, 바야흐로 법의 흐름에 청정한 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니, 알아 두라. 이것이 곧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위에 의거하는 것이라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다음에 열여섯 게송이 있어서 부지런히 수습함에 머무는 뜻을 해석했으니, 맨 처음의 한 게송은 통틀어 표시한 것이고 그 나머지는 따로따로 해석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반연하는 것과 그 자체가
차별되고 또 뜻을 일으키면
마음이 산란해 자량(資糧)에 머무르니
선정을 닦는 것만이 벗어나는 과(果)라네
반연하는 바를 말한 것이 그 세 종류가 있으니, 다음의 게송과 같다.
바깥과 위와 안의
이 세 종류가 반연할 바에서 나나니
머묾이 세 종류가 있으므로
그 자체와 마음 산란함이 없는 줄 알라
≪해석≫ ‘세 종류’라고 말한 것은, 첫째 바깥의 인연이고, 둘째 위의 인연이고, 셋째 안의 인연이라, 바깥의 인연이란, 이를테면, 흰 뼈 따위에 대해 그 나타나는 그림자나 형상을 관(觀)하는 것이니, 이는 처음 배우는 이들의 경계이다. 위의인연이란, 이를테면, 미지정(未至定)의 고요함을 인연하는 따위의 상(相)이 그것이다. 안의 인연이란, 이를테면, 그 뜻과 말에 따라 나타나는바 상을 그 인연하는 경계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자체란 것은, 이 마음에 산란한 상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니, 이를 머묾이라 하며, 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이란, 바깥 등 세 가지 인연에 처할 때 그 인연하는 바에 따라 마음이 동요되거나 산란하지 않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첫째의 머묾과 상응(相應)함은
안정된 마음 지닌 이가 볼 수 있나니
경계에 따라 옮기는 생각이 없고
상속하는 이가 명철한 사람이며
둘째의 머묾과 상응함은
싫어 여의는 마음이 고요하나니
전일한 뜻으로 생각이 옮기지 않고
상속하는 이가 이 명철한 사람이며
셋째의 머묾과 상응함은
앞의 경계에 엉기어 머무나니
안정된 뜻으로 옮기는 생각이 없고
상속하는 이가 이 명철한 사람이네.
≪해석≫ 이 세 게송은 그 차례대로 바깥 인연과 위 인연과 안 인연에 배속한 것이다. ‘경계에 따라 옮기는 생각이 없음’이란, 다른 경계에 대해 마음이 산란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옮김이 없다’고 하였으며, ‘상속’이란 것은, 굳게 마음을 간직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명철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혹시 자기의 생각에 따르거나 또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따르거나 선정[靜慮]의 법에 가행(加行)을 일으키는 이러한 이를 명철한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니 알아 두라. 차례대로 이러한 사람은 법을 따르는 행(行)과 믿음을 따르는 행의 종성(種姓)인 것이며, ‘싫어 여의는 마음이 고요하여 전일한 뜻으로 옮기는 생각이 없음’이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그 경계에 싫어 여의는 마음을 내되 과거엔 그 경계만을 보았을 뿐으로 싫음을 내지 못했던 것을 지금에 와선 전일하게 마음을 쏟아 싫어 여읨을 내어서 산란하거나 동요하지 않는 것이며, ‘앞의 경계에 얽히어 머묾’이란, 이른바 그 뜻과 말을 나타내는 경계에 있어서 이 경계를 인연할 적에 그 마음이 어울려 안정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안정된 뜻으로 생각이 옮기지 않고 상속하는 이가 명철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음을 굳게 잡음과
바른 생각을 쏟음과
그 뜻을 거듭 살핌과
점차 얻음과
마음으로 기뻐함과
대치품(對治品)이 생길 때와
의혹 나는 것을 능히 제거함과
가행(加行)이 항상 끊임없음과
저절로 운전되는 도를 행하는
산란하지 않는 아홉 가지를 알아야 하네.
≪해석≫ 저 머묾 가운데에 차별이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최초의 머묾[最初住]과, 바른 생각의 머묾[正念住]과 거듭 살피는 머묾[覆審住]과 뒤 차별의 머묾[正別住]과, 조복하여 유순하는 머묾[調柔住]과 고요한 머묾[寂靜住]과 항복 받는 머묾[降伏住]과 공용의 머묾[功用住]과 저절로 운행하는 머묾[任運住]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아함경[阿笈摩經]』에 의지하여, 그 글귀에 따라 차례대로 닦아 익혀야 한다. 처음 배우는 이로서 경계를 반연할 적에 그 마음을 굳게 잡는 것을 ‘최초의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그 이후로 그 바른 생각을 쏟아 넣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바른 생각의 머묾’이라 한다. 만약 여기에 의탁할 때 산란한 마음이 생긴다면, 다시 그 반연한 경계를 거듭 살펴서 머물러야 하나니, 이렇게 머무는 것을 ‘거듭 살피는 머묾’이라 한다. 다음은 뒤 때에 가서 점차로 그 차별을 얻는 것을 ‘뒤 때 차별의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뒤 때에 가서 대치(對治)가 생기면, 마음에 자유를 얻어 기뻐하는 때게 오나니, 이렇게 머무는 것을 ‘조복하여 유순하는 머묾’이라 한다. 다음은 이 기쁨과 사랑을 거쳐서 기쁨도 사랑도 없는 그러한 마음으로 대치할 적에 사랑하거나 기뻐할 것이 없어 그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지는 것을 ‘고요한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뒤 때에 가서 이미 생겨났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모든 무거운 장애와 번뇌를 항복받기 때문이니, 그러한 것을 ‘항복 받는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뒤 때에 갓 가행(加行)하는 마음으로 그 반연하는 경계에 끊임없이 한 가지 인연을 따라 머무는 것을 ‘공용의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뒤 때에 가서 그 반연하는 경계에 마음으로 가행하는 것이 없어도 저절로 운행되고 다라 흘러서 끊임없이 선정에 들어가 관습(慣習)의 도에 머무는 것을 ‘절로 운행하는 머묾’이라 한다. 이 아홉 가지로 마음이 유동되거나 산란하지 않는 것을 ‘머묾’이라 하나니, 알아 두라. 이 산란하지 않는다는 말이 굳게 잡는다는 따위와 모두 서로를 배속(配屬)시켜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힘을 씀과 간극[隙]이 있음과
공용이 있고 또는 공용이 없는
이러한 백예순둘 가운데
네 가지 뜻 일으킴을 알지니
이른바 바깥과 안과 삿된 인연과
추중(麤重)한 것과 뜻을 일으킴의
이 산란한 마음이 다섯 가지 있음으로써
선정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게 되네
거기에 마음을 머무는 까닭에
고요하지 않아 바깥이 산란하고
흔들리거나 잠기거나 집착하기에
안이 또 산란해지기 마련이라
알지어다. 삿된 인연의 상이란
친족(親族)들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이른 바 추중한 것의 산란함이란
두 가지 아집(我執)을 내는 것이네
앞 경계 보기를 분명히 하되
분별하여 그 상을 관함으로써
뜻을 일으킴이 산란한 것이니
이와 다른 것은 염(念)하는 마음일 뿐이라
뜻을 일으킴이 산란한 가운데
다시 그 산란한 상이 있으니만큼
승(乘)에서나 또는 선정에 있어서
첫째와 둘째의 것을 응당 제거해야 하네
≪해석≫ 뜻을 일으킴에 그 네 종류가 있는 줄을 알지니, 첫째는 힘을 써서 부담[負荷]하여 뜻을 일으키는 것이요, 둘째는 간극이 있게 부담하여서 뜻을 일으킴이요, 셋째는 공용이 있게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요, 넷째는 공용이 없게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라, 이 가운데 굳게 잡아서 산란하지 않는 그것이 곧 힘을 써서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다. 처음에 공력(功力)을 써서 부담하기 때문에 그 다음 바른 생각을 쏟아 넣는 따위의 여섯 종류가 산란하지 않는 것이 곧 간극이 있게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다. 중간에 자주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간극 없이 가행(加行)하는 그것이 곧 공용 있게 부담하여서 뜻을 일으킴이다. 다음으로 관습 된 도에 들어가는 그것이 곧 공용 없게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니, 이와 같이 다 섭수[攝]하고 나면, 이것이 이른바 백예순둘이라, 바로 이것이 네 종류의 뜻을 일으키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마음 산란한 것이 그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바깥에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요, 둘째는 안에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요, 셋째는 삿된 인연에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요, 넷째는 추중(麤重)한 것에의 마음이 산란함이요, 다섯째는 뜻을 일으킴에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다.
그리고 ‘바깥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그 마음 머무는 경계에서 인연을 일으킬 때 드디어 다른 일을 인연하여 마음이 유동되거나 산란하기 때문이며, ‘안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이른바 들뜸 따위의 셋으로 그 반연할 바 경계에서 중간의 산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삿된 인연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선정을 닦을 적에 여러 가지 찾아 구하는 것이 있어서 친척과 친구 등 이러한 일에 그리워하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다. ‘추중한 것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두 가지 아집(我執)이 있어 그 마음을 산란하게 함으로써 선정을 닦을 적에 이러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이를테면 이익되는 것과 손해되는 것이라, 몸이 안온한 것을 이익이라 하고 몸이 쇠약한 것을 손해라 하여, 혹은 ‘내가 이제 즐거움을 얻었다’하고, 혹은 ‘내가 이제 괴로움이 있다’하거나, 혹은 ‘이것이 나의 즐거움’이라 하고, 혹은 ‘이것이 나의 괴로움’이라 하는 것이라, 이 가운데 ≺나[我]≻라는 그것이 바로 집착이어서 그러한 생각을 갖는 것이다. ‘뜻을 일으킴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그것이 세 종류가 있으니, 어떤 인연한 상(相)에 분명히 머묾은 이것이 사찰(思察)하는 성질이요, 혹은 이 승(乘)에 따르다가 다시 다른 승에 나아감이요, 혹은 이 선정에 따르다가 다시 다른 선정에 나아감이 그것이라. 이를테면, 너무나 분별하고 사찰하여 선정을 닦을 적에 드디어 마음을 산란케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마음의 산란이라 한다. ‘이와의 다른 것은 염(念)하는 마음일 뿐이다’함은, 이것이 그 처음 뜻을 일으킴에의 산란함을 대치할 수 있나니, 분별하지 않고서 경계에 인연하기 때문에 다만 염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뿐이다. 이는 또 마음에 잊지 않고서 염할 것을 밝힘이다. 이 세 가지 산란 가운데 첫째와 둘째의 것은 버려야 하고, 셋째의 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선정을 따라 선정에 나아가는지라, 뛰어나고 상위(上位)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허물은 아니다.
계행에 머물러 계행이 청정하다면
이는 자량(資糧)이 머무는 곳이라
모든 감관[根]을 잘 옹호하는 것이
네 가지 청정한 인(因)인 줄 알라
경계를 바르게 행하여야
의지하는 데를 더불어 서로 합하고
선한 일을 부지런히 닦아야
모든 과실을 제거할 수 있나니
최초에 뜻 일으킴을 얻고
그 다음에 세간의 청정함을 얻고
다시 출세간의 머묾을 더한다면
세 선정으로써 세 세계를 초래하네
≪해석≫ ‘자량의 머무는 곳’이라 함은 이른바 계행이 바로 그지없는 공덕의 의지하는 곳이므로, 반드시 계행에 먼저 머물러야 계행이 청정하여 모자라거나 범하는 일이 없는지라, 만약에 계행의 청정함을 구하려면, 네 가지 인(因)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감관을 잘 보호하는 것이요, 둘째는 음식에 있어서 그 분량을 아는 것이요, 셋째는 초저녁과 새벽에 능히 스스로가 깨우치어 선정과 더불어 상응(相應)하는 것이요, 넷째는 네 가지 위의[四威儀] 가운데 바른 생각으로써 머무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모든 감관을 잘 옹호하여 계행을 청정하게 하고, 경계를 바르게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의지하는 바와 더불어 서로 합하고 선한 일을 부지런히 닦음으로써 과실을 제거할 수 있는가 하면, 첫째의 인(因)은 바로 그 행하는 경계에서 청정함을 행하기 때문이며, 둘째의 인은 그 의지하는 데에 몸소 서로가 합하여 수순함으로써 음식을 받음에 있어서도 많고 적음을 여의기 때문이며, 셋째의 인은 선한 일에 대해 정진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넷째의인은 과실을 제거함에 있어서 그 나아가고 물러나는 거둥에 마음을 잘 쓰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인(因)으로 말미암아 계행이 청정하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알라. 세 가지 선정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출리(出離)하는 길을 얻는지라, 바깥 경계를 인연할 적에 뜻 일으킴의 머묾을 얻고, 위의 경계를 인연할 적엔 세간의 청정함을 얻고, 안의 마음을 인연할 적에 출세간의 청정함을 얻는다. ‘머묾’이란, 그것이 곧 아주 출리하는 것이어서 반드시 열반에 나아가 다시는 퇴전(退轉)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부지런히 수습(修習)함에 머문다’는 것을 해석해 둔다. 게송으로 말한다.
들음이 많고 또 진리를 보고
설법을 잘하고 자비심이 있어
항상 기뻐하는 마음을 낸다면
이 사람에겐 선정을 가르칠 만하며
그 모든 일에 대하여
모든 일 그대로를 설하되
아는 바의 경계를 잘 풀이한다면
이는 잘 가르치는 사람이라 하리며
들음으로 말미암아 뜻을 내어서
적멸(寂滅)의 인(因)을 설한다면
이는 그 인에 대해 뜻을 일으킴이니
가장 원만한 사람이라고 이르리라
≪해석≫ 원만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스승과 제자의 원만한 것이요, 둘째는 반연한 것의 원만함이요, 셋째는 뜻을 일으키는 것의 원만함이다. 이 가운데 맨 처음의 게송은 스승과 제자의 원만함을 설한 것이니, 이는 그 사람의 잘 가르치는 것이 원만함과, 증오(證悟)하는 것이 원만함과, 잘 설하는 것이 원만함과, 더럽히지 않은 마음이 원만함과 상속하여 설법하는 데에 있어서의 그 가행(加行)이 원만함을 나타냄이니, 이것은 교수하는 스승의 뭇 덕이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 스승의 원만함을 말미암아 바른 법을 듣게 되고 증오하는 것이 있다. 다음은 반연한 바의 원만함을 밝히기 위해 둘째의 게송을 설한 것이니, 모든 일에 대하여 그 모든 일 그대로를 다 설하되 아는 바의 경계를 잘 설하는지라, 이는 스승과 제자가 모든 일을 설함에 있어서 끝까지 다하여 아낌이 없음을 밝힌 것이므로, ‘인연한 바의 원만’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다음은 또 뜻을 일으킴의 원만함을 밝히기 위해 셋째의 게송을 설한 것이니, 이는 들은 것으로써 인(因)을 삼아 뜻을 일으켜 말하는 것이 능히 성스러운 도[聖道]와 열반을 더불어 바로 인(因)이 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라, 이 뜻을 반연하여 말하기에 그 모든 뜻을 일으킴이 다 원만하게 되는 것이니, 이 가운데 말을 인하여 들은 것을 나타내니 만큼 그 뜻이 바로 말의 인(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적멸’이라 함은, 이것이 바로 열반이고 또 도의 진리[道諦]이니, 자체가 이미 적멸한데다가 또 능히 적멸함에 나아가기 때문에 이를 통틀어서 말하기를, ‘적멸의 인’이라 하는 것이며, 뜻을 일으킴이라 함은 이 뜻을 일으킴이 곧 적멸의 인에 인연하는 것임을 밝힘이다. 어째서 그 인연하는 것이 법의 성품 없음을 요달하는가 하면, 이와 같이 인연할 적엔 바로 그 인이 역시 적멸이기 때문이다. 이 뜻 일으킴을 이르되 ‘적멸의 인’이라 함은, 이것이 전체의 해석이며, 또 이것을 인연하여 뜻 일으킴을 이르되, 역시 ‘적멸의 인’이라 함은, 이것이 별구(別句)의 해석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른바 말과 뜻을 찾아 구함이란
이 뒤에 살펴야 하리니
뜻도, 말도 없는 그것이 선정이라
선정의 상(相)이 세 가지가 있네
다른 인연도 없고 상도 없으면서
마음이 문자를 인연해 머무는
이것이 곧 마음의 적멸한 곳이니
이를 사마타(奢摩他)라고 이르며
저 갖가지 경계를 관하는 것은
비바사나[毘鉢舍那]라고 이르고
다시 하나의 유가(瑜伽)는
12분(分)의 선정이라고 이르네
추중(麤重)한 장애와 견(見)의 장애는
이 사마타ㆍ바바사나의 두 선정이
능히 저 장애를 대치할 수 있어
훌륭한 방편을 일으키는 줄 알라
≪해석≫ 다음은 의지함이 있는 모든 선정 닦는 사람으로선 반드시 의탁할 데가 있음을 밝힘이다. 이를테면 세 가지 선정에 의지함이니, 그 심구(尋求) 따위를 설함이 그것이다. ‘심구’라 함은 이 머트러운 생각[尋]이 있는 것을 나타냄이니, 이미 머트러운 생각이 있는 것을 말한다면, 이에 준하여 세밀한 생각[伺]도 있는 줄을 알지라. ‘세밀한 살핌’이라 함은, 이 머트러운 생각은 없고 세밀한 생각만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뜻도 말도 없음’이라 함은, 머트러운 생각도 없고 세밀한 생각도 없음을 나타내려는 것이니, 머트러운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다 뜻과 말대로 그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 이는 사마타(奢摩他)의 법에 의거하여 그 정의(定義)를 밝힘이다.
그리고 ‘다른 인연도 상도 없음’이란, 그 차이(差異)가 없다는 뜻을 밝힘이다. 다만 그 문자를 인연하여 마음이 머물게 됨으로써 다른 인연이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며, 다만 그 문자를 인연해 이치와 모양을 관하며 모든 뜻을 일으킴은 저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양을 ‘사마타’라고 이르는 것이다. ‘사마’란 것은, 고요히 그친다는 뜻이고, ‘타’란 것은 곳이라는 뜻이라, 사마만으로 그 일을 다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니, 이를테면, 그 마음이 고요히 그치는 곳에 의거해 마음이 엉켜 머물러서 선정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 선정이 곧 엉킨 마음의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사마타’라고 한다. 이와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다음은 비바사나[毘鉢舍那] 법에 의거하여 그 정의(定義)를 밝히기 위해 다음의 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이를테면, 많은 경계에 의지하는 것을 ‘뭇 관’이라 하고, ‘저’라고 말한 것은 저 두 가지를 더불어 함께 서로가 매여 붙는 것이니, 곧 사마타와 또는 인연하는 문자가 그것이다. 이는 사바타에 의거해 비바사나를 얻어서 문자의 곳에 의지하는 것이니, 모든 이치가 모든 관(觀)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고요히 그치는 곳의 모든 뭇 이치가 문자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뭇 이치를 반연하여 관찰을 일으키는 것을 ‘뭇 관’이라 한다. ‘12분의 선정’이라 함은 혹시 고요한 곳은 있되 뭇 관이 없거나, 혹시 뭇 관은 있되 고요한 곳이 없거나, 혹시 다 함께 있기도 함이니, 알아두라. 이것이 바로 지(止)와 관(觀)이 쌍으로 운행하는 것이다. 또 사마타와 비바사나에 두 가지 장애가 있으니, 이른바 추중(麤重)한 장애와 견(見)의 장애가 그것이라. 두 선정이 곧 장애를 대치(對治)하나니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어째서 이 두 선정을 이르되, ‘훌륭한 방편을 길러낸다’고 하는가 하면, 선한 법의 방편을 길러내기 때문이다. 어떻게 방편의 법으로 하여금 훌륭한 청정을 얻게 하겠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세 가지 상(相)을 닦는 것이니
고요히 그침과 들뜸을 억제함과
버릴 줄 아는 이것을 차례대로 닦아야 하네
만약에 마음이 가라앉을까 염려되면
묘한 일에 대해 인연을 일으키고
만약에 들떠서 흔들릴까 염려되면
묘한 일에 대해 인연을 일으키고
만약에 들떠서 흔들릴까 염려되면
싫증을 내어 제거하게 할지며
가라앉음과 들뜸을 아주 여의려면
그 마음을 버리는 것에 머물지니
공용이 없이 저절로 운행하려면
항상 세 가지 상을 닦아야 하네
설정이란 이 세 가지 상을 닦고
한 가지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음 따위의 잘못을 막기 위해
다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네
≪해석≫ 앞에서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다. 청정한 선정을 구하는 자는 세 가지 상을 닦나니, 그 세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이른바 고요히 그침[止]과 들뜸을 억제함과 버림이 그것이며, 다시 어떻게 닦느냐 하면, 차례대로를 따름이니, 그 의혹의 장애가 생길 때를 따라 응당 차례대로 닦아 익히되, 어떤 일에 다시 어떤 상을 닦아야 함이 그것이다. 또 들뜬 것을 억제하는 상을 변론하건대, 만약에 마음이 가라앉음으로써 빠질까 염려되는 자라면, 세 가지 상을 아래와 같이 닦을지니 알아 두라. 마음이 가라앉은 것을 닦거나 들뜬 것을 억제하는 상이라면, 그 상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묘한 일에 인연을 일으켜 마음으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는 것을 그 상으로 삼으며, 또 고요히 그치는 상이란, 만약에 마음이 들뜨거나 혹은 들뜰까봐 염려될 경우엔 응당 고요한 곳을 닦을지니, 어떻게 닦느냐 하면, 싫증을 내어 제거하게 하되 그 반연한 경계에 대해 아주 싫어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내어서 자신의 속마음에 허물을 그치게 함이 그것이다. 버리는 상이란, 이른바 가라앉거나 들뜸을 여의는 것이니, 어떤 마음속에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마음을 버림에 머묾이 그것이라, 이 버리는 상이 바로 ‘공용이 없이 저절로 운행하려면 항상 세 가지 상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상을 차례로 닦을 적에 모든 선정을 닦는 자는 그 청정한 상을 얻는 것이며, 또 사마타(奢摩他) 같은 것이 바로 이 선정인 것이므로, 이 세 가지 상에 있어서 한 가지만을 닦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라앉은 따위의 잘못을 막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함’이란, 만약에 그치는 것만을 닦는다면 속마음이 가라앉는지라, 이미 가라앉을 때엔 곧 들뜸을 억제된 것이어야 하는데, 만약에 들뜸을 억제함으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리거나 흩어질 경우엔 부정(不淨)한 경계를 관하여 싫어 여읨을 나게 할지니, 이 버리는 상을 올바르게 닦아 익힐 적에 비로소 바른 선정으로써 능히 번뇌를 다할 수 있다고 하겠다.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마음을 지극히 청정하게 할 수 있으리니, 알아두라. 이 가운데엔 다 바른 경전의 문구(文句)에 수순하여 이치 그대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벗어나거나 또는 즐거워하는 것은
바르게 머무는 이라야 그럴 수 있나니
이 장애와 의혹을 다 제거한다면
선정을 닦는 자로서 마음이 청정하리라
≪해석≫ 이는 청정의 이익을 밝힘이다. ‘거진경(去塵經)’의 말씀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속마음의 청정함을 구하려 할 적에 의혹의 장애가 있어서 현전에 제거할 수 없다면, 그 제거하려는 자로선 먼저 불선한 업(業)과 도(道)에 큰 허물을 짓지 말고, 죄악의 견(見)을 지식시킨 다음 출가를 구하여 벗어날 것을 희구하여라. 만약 이 번뇌 속에 처하여 탐욕ㆍ진심ㆍ살해의 뜻으로 죄악을 일으킨다면, 그 머트러운 생각의 장애가 애락(愛樂)을 이길 것이니, 이 장애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는 애락하는 이라고 말하리라”고 하셨으니, 그 누구나 미세한 권속에의 머트러운 생각과 세간에의 머트러운 생각과 죽지 않는 것에의 머트러운 생각이 있다면, 이것이 그 바르게 머무는 것을 막는다. 이것을 대치하기 때문에 바르게 머물 것을 말함이다. 만약에 공용이 있어서 바야흐로 선정에 든다면 이 선정은 곧 충분히 감당하는 성질이 아니고, 만약에 이것을 제거한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능히 의혹을 제거한다면, 충분히 감당한다고 말할 것이니, 이는 청정한 선정의 사람으로서 네 가지 수승한 이익 얻는 것을 나타냄이다. 어떤 것을 이르되 ‘선정을 닦는 사람의 과(果)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이 선정의 문(門) 가운데에
이른바 바르게 닦아 익힘이란
세속의 선정을 다 분명히 요달하고
또 출세간의 선정을 아는 것이네
이 게송의 뜻은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毘鉢舍那]를 닦아 익히는 자는 현재의 과(果)를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건 이른 바 선정의 상에 의지하여 닦아 익힐 적엔 모든 세간의 수승한 과를 얻는 것이 원만하고, 또 출세간의 과를 얻나니, 앞서 이미 설한 바와 같다.
【문】이상과 같이 설한 것은 무슨 일을 밝히려는 것입니까.
【답】게송으로 말하겠다.
의요(意樂)의 의지하는 곳인
그 본래의 의지함가 바르게 의지함을 나타냄이니
세간의 선정을 원만히 하고 나선
아울러 출세간의 선정을 요달하는 것이네
≪해석≫ 간략하게 설한 것이지만, 그 뜻이 두루하니, 앞서의 일을 풀이하기 위해 이 게송을 설하였다. 최초에 이른바 ‘해탈을 구하는 자’라 함은, 의요(意樂)의 원만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요, ‘쌓아 모음’이라 함은, 의지하는 처소의 원만함이니, 이는 그 선정 닦는 데에 마음을 둔 자로선 반드시 의탁하여 돕는 식량을 쌓아 모을 것을 밝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수습함에 머묾’이라 함은, 그 본래 의지하는 곳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니, 경 가운데 설한 바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먼저 선정에 의지해야만 번뇌를 다할 수 있으리니 이것이 내가 설하여 두는 바이다. 만약에 생사의 바다에 벗어날 것을 구하려는 자라면, 바른 선정을 떠나선 별다른 방편이 없으리라.”고 하심과 같음이요, 다음으로 ‘세 가지 원만함을 얻음’이라 함은, 바르게 의지하는 것의 원만함을 나타냄이니, 이는 그 스승과 제자가 질문하고 결정하는 것에 의지할 수 있음을 밝힘이다.
‘의지하는 데가 있어 선정을 닦는 사람’이라 함은, 그 닦아 익히는 것의 원만함을 나타냄이니, 모든 슬기 있는 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방일(放逸)을 멀리 여의고서 바르게 수행할 적에 세간의 모든 선정을 죄다 원만히 하고, 또 출세간의 선정을 함께 증오(證悟)하여 현저히 그 과(果)를 얻는 것이 원만하기 마련이다.
『육문교수습정론』 1권(ABC, K0633 v17, p.775a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