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것도 출력할 줄 몰라요? 지난번에 가르쳐 줬잖아요." "한 번 더 설명해 주실래요?" "잘 보세요! 홈페이지에서 이 버튼을 클릭한 다음 두 번째 걸 눌러요. 그럼 이 화면이 나오죠? 그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서울역에 새로 단장한 와인 가게에서 일한 지 보름이 돼 갈 무렵이었다. 30년 넘게 푸른 경찰관 제복을 입고 살았다. 퇴직 전 경찰서장으로서 지시하고 보고받는 일에 익숙했다 보니 현장의 실무는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늘 하던 일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으니. 매일 아침 한강변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다짐한다. '경찰서장은 과거고 지금은 와인 신참내기일 뿐이니, 열심히 배우자!' 다행인 일이라면 막 손녀를 출산한 딸아이보다 어린 막내 매니저들이 잘 도와준다는 거다. 덕분에 지금은 가격표 출력이나 와인 발주, 매대 정리 같은 일은 큰 탈 없이 해내고 있다. 고마운 마음에 같이 햄버거도 먹으러 가고, 아이스아메리카노도 마시러 다닌다. 은지 매니저가 키오스크로 주문하면 나는 재빨리 카드를 꺼낸다. 모르면 배워야 하고, 배움엔 돈이 드는 법이다. 퇴직하고 유럽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오른다. 우리는 아내가 좋아하는 와인 양조장에서 고급스러운 식사를 즐기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와인을 팔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아내는 내가 제복의 굴레에 갇혀 평생을 지낸 것이 안쓰러웠는지 퇴직하면 좋아하는 일을 해 보라고 여러 번 권했다. 응원에 힘입어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학원에 등록해 와인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와인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가장 즐거운 시간은 역시 고객들에게 와인의 종류나 역사 등에 관해 설명 할 때다. 고객들은 들뜬 내 표정을 보며 "와인을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조강원'이라는 이름표와 'I can speak English(나는 영어를 할 수 있어요).'라고 쓰인 배지까지 달린 나의 유니폼. 이 운명은 젊은 날 프랑스에서 처음 마신 와인의 매력에 빠진 순간 정해진 걸까. 유나 매니저의 도움으로 택배를 포장한다. 생각해 보니 어느새 이 일도 9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이젠 제법 단골도 생겼다. 특히 프랑스 와인을 사 간 프랑스 사람이 내가 추천한 와인이 마음에 든다며 또 사러 왔을 땐 무척 기분이 좋았다. 이건 미국 마트에서 미국 판매원이 한국 사람한테 여수 갓김치를 판 것과 같은 일이니까. 오늘도 거울 앞에 서서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미소를 띠운다. 오늘은 호주 사람에게 호주의 바로사 밸리에서 온 와인을 하나 팔아 봐야겠다. 조강원 | 소믈리에, 보틀벙커 와인 매니저
자신의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에게는 인생의 목적이 있지요. _ 토마스 칼라일
버즘나무
덥다. 버즘나무 그늘 아래 한참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가 바람에 너울너울 흔들린다. 긴 치마가 살랑거리는 것 같다. 유년 시절, 선생님은 운동장에서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하늘 높이 쭉 뻗은 미루나무를 그리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풍성한 버즘나무에 눈길을 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치마를 떠 올리며 버즘나무를 그렸다. 추석날 아침이었다. 공장에 다니던 큰언니가 집에 와 내게 원피스를 하나 줬다. 색깔도 곱고 사선 무늬가 들어간 새 원피스였다. 얼마나 좋던지, 동구 밖으로 마구 뛰었다. 휘둥그레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우리 큰언니가 사 왔다!" 하고 자랑을 늘어놨다. 새 옷 냄새를 일부러 풍기며 치마가 둥글게 퍼지도록 빙빙 돌았다. 아이들이 황홀하다는 듯 바라봤다.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철모르던 시절이었다. 언니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힘겹게 살았다. 병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위에 암세포가 잔뜩 퍼진 상태였다. 부랴부랴 아들 혼사를 서둘렀다. 식장 안은 울음바다였다. 언니는 울다 울다 의식을 잃었고, 복수가 찬 배는 산처럼 솟아올랐다. 마흔아홉의 기구한 삶이 그렇게 끝이 났다. 장대비가 쏟아진 날, 언니는 커다란 버즘나무 숲 아래 외로이 묻혔다. 나는 목놓아 울었다. 길모퉁이에 있던 버즘나무 한 그루가 싹둑 잘렸다. 그루터기만 남은 모양새가 볼썽사납다. 나이테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한가운데가 시커멓게 비었다. 못다 한 생명의 상흔이다. 잘려 나간 버즘나무 그루터기에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양순례 | 대전시 중구
*분수 한옥 건축 대목장(大木匠)이자 인간문화재 최기영은 말했다. "좋은 목수든 좋은 집이든 원리는 똑같다. 분수를 알고, 지키는 것이다. 분수를 안다는 건 자기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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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좋은 공감 멘트로
공유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동트는아침 님 !
반갑습니다
사랑천사 님 !
다녀가신 고운 걸음
감사합니다 ~
복더위가 절정인 시기
건강 유의하시면서
설렘과 보람으로
의미있는 8월보내세요
~^^
기후 변화로 포도 생산량이
해마다 줄어들어 와인 생산도
줄어든다고 합니다.
칵테일 열심히 배워서
유명한 바텐더가 돼세요~
안녕하세요
정읍 ↑ 신사 님 !
다녀가신 고운 흔적
고견 감사합니다 ~
오늘도 즐거움이 깃든
좋은 하루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