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
집회 44,1-13; 마르 11,11-25 / 연중 제8주간 금요일; 2023.6.2.;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는, “의로운 행적을 남겼지만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훌륭한 선조들을 칭송하자”(집회 44,1.9-10)는 말씀을 들었고, 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처럼 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한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막바지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둘째 날에 일어났습니다. 첫째 날에 그분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모여 든 군중으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으셨지만, 그 환영이란 며칠 지나지 않아 적대적으로 바뀔 만큼 신기루와 같이 실속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루 일도 없었던 듯이 둘째 날에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시면서 이 성전을 무화과나무에 빗대어 저주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상징되는 유다교는 예언자들이 외쳤던 바 대로 공정과 정의, 사랑과 자비라는 열매를 역사 안에서 맺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는 물론 공생활 동안에도 맺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지배했습니다. 모든 유다인 가정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1/10을 거두어들이는 십일조를 성전에서 관리하면서 그 십일조 수입의 1/10은 사제들이 받았습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성전세까지 신설하여 거두어들였는가 하면, 속죄의 제사를 바치려는 유다인들은 성전 관리자인 대사제가 정한 제물을 비싼 가격을 주고 사야 했으며, 해외에서 온 유다인들은 외국 화폐를 환전해야 했는데 이 일을 맡은 환전상들에게 허가를 해 주면서 뒷돈을 챙겼습니다. 이래저래 성전은 돈이 쌓이고 쌓여서 급전이 필요한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할 수 있을 정도여서 금융기관 역할까지도 대행했습니다. 한 마디로 개혁이 시급했던 복마전(伏魔殿)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부패행위가 전부, 하느님께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서 제물을 태워 바치는 제사를 지내야 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사제를 통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근거를 두고 정당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전과 제사의 타락상에 대해서는 일찍이 예언자 아모스가 이렇게 비판한 바 있었습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당시에 조선 사회에서 성리학적 유학은 단순히 학문이 아니라 국교로 행세하였습니다.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송대(宋代)의 주자(朱子)가 성리(性理), 의리(義理), 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한 유학의 한 갈래였는데, 이는 노동하지 않아도 자유로웠고 권력과 재산을 독점할 수 있었던 양반 계급들의 공리공념(空理空念)으로 그쳤습니다. 실제로는 백성을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하면서 관리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고 힘없는 신분에 속한 백성들은 무한 억압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수효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천민 계급에 속한 노비들이 전체 백성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렇듯 실패한 사상과 실패한 정치를 자행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겠다고 들여온 천주교를 그릇된 학문, 즉 ‘사학’(邪學)이라 매도했고, 조상제사 대신에 천주교식으로 죽은 조상을 공경하겠다던 천주교 신자들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라고 매도하였습니다.
이러한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대다수 신자들은 교우촌을 이루어 신앙의 가치를 실천하다가 체포되면 치명을 불사하는 비폭력 저항으로 일관했지만, 비록 글을 써서라도 적극적으로 저항한 의인도 있었습니다.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써서 천주교를 옹호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어내려 했던 정하상 바오로와,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써서 신유박해의 실상을 알리고 이미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던 서양 나라의 힘을 빌려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얻어내려 했던 황사영 알렉시오가 그 의인들입니다. 이 중에서 정하상은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지만, 황사영은 지금도 반역죄 논란에 휩싸여 신자들의 뇌리에서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고 세상에서는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고 무지막지하게 학살했던 박해는 분명히 국가 폭력이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조선의 임금을 향해 칼끝을 겨눈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백성 중 어느 누구를 향해서도 폭언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른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착한 백성을 무려 2만여 명이나 단지 임금이 금한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 결국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백 년 동안이나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악랄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행위는 의로운 것입니다. 더군다나 폭력적인 그 어떤 행위도 없이 오로지 글로 호소하는 행위가 범죄일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정당방위에 속하며 후손들이 기억하고 칭송해야 할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을 거점으로 자행된 유다교 사두가이들의 악행을 심판하셨던 예수님의 행동이나,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에서 나타난 국가 폭력에 저항하려던 정하상과 황사영의 행적 등 의인들의 이러한 과거 행적을 기억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들이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버려야 할 가치가 있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목숨 바쳐 용감하게 진리를 증거한 순교자들의 뒤를 이어 반드시 그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