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둘레(철원)에 다녀왔다. 몸이 좋지 않다. 몸 여기저기서 붉은 열꽃이 피어났다. 특히 엉덩이 부분은 열꽃들이 붉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가렵다. 피부질환연고를 바르면 잠시 낫는가 싶다가 또 가렵기 시작한다. 이 정도 가려움의 속도라면 곧 온 몸을 점령할 기세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방안을 서성이다 냉장고를 열고 물을 마셨다. 반달모양으로 쪼개진 수박의 푸른 껍질과 붉은 속살. 요즈음 부모님이 드시는 녹용을 즙으로 낸 납작한 비닐팩 위에 조잡하게 그려진 사슴 두 마리. 수컷의 뿔이 마치 전성기 신라의 금관을 연상시켰다.
나. 분단문학작품을 핑계삼아 토요일날 서울을 벗어났다. 잊혀져가는 그 옛날의 소설가 유재용의 [화신제]라는 표제작을 내세운 중단편소설집. 소설들은 대체로 재미가 없었다. 지루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스스로를 채찍질 하며 유재용을 읽다. 유재용의 언어들은 신선하지가 못했다. 지루한 이유였다. 비가 많이 내렸다.
포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철원을 가리라는 계획에 비가 밑줄을 세게 긋고 있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면 관절이 투명한 느낌을 받는다. 빗소리가 새떼로 날아와 관절마다 내려앉는다. 몸을 움직일때마다 날아오르는 빗소리. 후두둑. 근육이완제를 먹었을 때처럼 몽롱함과 미열을 동반한 괘감이 몸안에 깃발을 꽂고 나부낀다.
나. 어지럽다. 잠시 아무렇게나 몸을 맡기고 싶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는 우산을 뚫고 이제 나를 난타할 모양이었다. 일행들이 출발지인 태릉역으로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여행에의 기대가 몽환을 흔들어 깨우더니 빗속으로 내보낸다.
쇠둘레를 생각한다. 철모를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배했던 역사. 평화보다는 전쟁이 압도적으로 많은 인류사의 한 곳. 한반도. 분단에 대한 파편들을 모집한다. 철책선을 지키는 군인의 눈동자. 공동경비구역의 밤. 김일성 주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이승만 정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정읍 발언. 흥남부두의 굳세었던 금순이. 60년대 북한 학계의 놀라운 성과. 미군들의 정액을 받아냈던 이 땅의 여인들. 반공교육으로 점철된 학창시절. 공산당이 싫어요. 그런데 공산당이 뭔지 아니? 몰라서 싫어야 했고 분노와 증오를 배급받던 시절. 김대중의 방북. 김정일의 달변. 최근 서해교전과 유니버시아드대회의 인공기 사건. 신문에 실린 북한기자들과 남한우익단체간의 충돌.
너 정말 통일 원하니? 나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 요즈음 고민이 많다. 포천으로 가는 차에 실려가며 결국 통일은 외부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이권과 내부적으로 양측 핵심 세력들의 이권들이 절묘한 화합을 이루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이 체제붕괴로 흡수되거나. 나는 통일보다 아름다운 북한여자들에게 더욱 관심이 많다. 성형수술로 획일화의 길을 걷는 남한의 여자들보다 싱싱한 자연미와 대체로 서구적인 미의 기준에 더 가까운 북한 여자들. 정말 남남북녀인가. 그런데 나. 나를 보면 남남북녀의 분류가 정확한 통계는 아닌 것 같다. 씁쓸한 기분.
북한은 식량부족으로 신음하고 남한은 카드빚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런 콘트라스트를 통하여 나는 분단문제를 볼 뿐이었다. 동행한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포천에 아직도 팔순의 나이에도 정정하신 그의 어머니가 늦은 밤인데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밖에는 비가 벼들을 농락하는 듯. 마당에 진돗개도 제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인의 집에는 보리수 열매로 담은 술이 있었다. 열매는 빨갛고 작았지만 혓바늘을 부드럽게 만드는 술맛은 수준급이었다. 분단문학의 성과와 문제점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고 순식간에 그런 이데올로기가 한반도를 점령할 수 밖에 없는 당시의 현실. 그들에게는 마르크스나 레닌이 현대판 석가모니나 예수로 인식되었으리라. 신탁통치반대와 6.25 전쟁과 학살. 우리들의 분단에 대한 인식과 통일에 대한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생각들. 역사책에서 배우고 대중매체나 기타 활자체를 통한 정보와 세뇌와 편견을 제거하니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여기 밥 먹고 술 마시고 피곤한 몸을 누이고 싶은 인간. 그 실존만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도 비가 내렸다. 나. 지구라는 호리병의 마개를 누가. 철천지 원수처럼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논둑을 돌아다니는 농부의 반바지와 밀짚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몇 시에 쇠둘레를 찾아 나설까. 의견이 분분했다. 빗줄기가 우리를 분단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아침밥을 짓는 아름다운 여인네들.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밥에 대한 독특하고 보편적인 종교해석. 밥은 사람이고 하늘이고 나누는 것이고 따스한 것이고. 밥을 배불리 먹으니까 일행들 사이에 동질감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하긴 분단이 야기한 모든 문제가 밥이 아니더냐. 정몽헌 회장의 자살도 밥에 대한 이권을 둘러싼 갈등과 이 사회의 허약한 비전에 질식한 기업인의 좌절. 빗속을 질주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나는 쇠둘레로 가기 위하여 차에 몸을 실었다 .
아무래도 이 땅을 국 끓여 먹으려고 하나. 이렇게 비 많이 내리고 갑자기 햇빛이 뜨거워지면 나는 곰국으로 이승에서 생을 마감할까. 내 몸안에 붉은 피는 어쩌면 양념장이 아닐까. 무서운 생각이 훅 코끝을 스친다. 땅굴 견학과 고석정과 월정역을 둘러보기로 하고 입장권을 끊었다. 그러나 실제 눈에 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분단의 비극, 이것만 다시 가슴에 새겨도 좋을 분단문학기행. 가장 슬픈 것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어 하고 사람은 만나서 사랑을 하고 싶어한다. 누가 비무장지대를 만들었는가. 나. 나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익숙해진 것과 헤어지기 위하여 나는 조용히 생살을 찢고 나오는 가을의 단풍잎이어야 한다. 스스로 흘린 붉은 피가 아름다울 수만 있다면. 일요일 늦은 저녁에도 비가 그치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금 내 가슴에 아픔은 많이 희석의 과정을 겪는 중이지만 사람마다 제 각각 고통의 등불을 켜고 살아야만 하는 것에 가슴을 좀 더 열어본다. 이제 서로의 환부 가까이 고통으로 밝힌 등불을 비춰보자. 아픈 곳에 약을 바르며 대화를 하자. 어디 갔다가 이제 오셨어요! 통일님. 어서 제 가슴의 상처를 도려내주셔요. 마취는 절대사절할 것입니다.
기억의 플래쉬
1. 삼부연 폭포. 마치 양수 터진 임산부의 분노 같았다. 임산부가 왜
분노했는지는 남편만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