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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98회>
씬 1 황궁 외경(밤)
씬 2 동 대전 복도
일반 내관들이 여러 명 대기해 있다. 대전내관이 상궁 둘과 함께 복도를 걸어와 급히 탕제를 받쳐들고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는 내군들이 죽은 내관의 시체를 들고 나와 복도로 사라진다.
씬 3 동 대전 안
상궁들이 탕제를 탁자에 내려놓으면 종간이 그것을 받아 든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눈을 내려 깔고 있는 넋 나갔듯
한 궁예에게 다가가 먹인다.
종간 (어린 아이 달래듯) 자, 폐하, 이 탕제를 드시오소서. 드시면 편안하실 것이옵니다.
궁예 이게... 무슨... 탕제인가?
종간 드시오소서. 편히 주무 실 수 있사옵니다. (눈물 글썽이며) 폐하, 어서 드시오소서. 드시면 편안하시옵니다. 자, 어서...... (먹여 주며) 그렇사옵니다. 그렇게 드시는 것이옵니다. 자, 폐하.... 좋으시옵니다. 그렇게 넘기시오소서. 예, 폐하.... 예, 폐하....이제 다 넘기셨사옵니다. 잘하셨사옵니다.
모두들 .......... ?
궁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정신을 놓은 채 약을 다 넘겼다. 그는 정말로 졸린 모양이다. 아직도 대전 안은 모든 게 어지럽게 널려있고, 핏자국이 흥건하다.
궁예 사형.....
종간 예, 폐하.
궁예 정말..... 졸립구료.... 많이 마셨어....
종간 그렇사옵니다. 주무시오소서. 이제 편히 주무실 수 있사옵니다. 자, 침상으로 가시오소서. 무엇들 하는가? 어서들 뫼시게.
대전내관 예, 내원어른. 자, 어서들 부액 하여 드리세.
내관들 예.....
내관들이 점차 의식을 잃어 가는 궁예를 부축해 침상으로 간다. 은부가 망연자실하여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쉰다. 종간은 그예 눈물을 보인다. 궁예가 침상에 누우며 중얼거린다.
궁예 석총이는 죽었어.... 그렇지? 석총이는 죽었다구.... 내가 죽였어......
종간 예, 그렇사옵니다, 폐하.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사옵니다.
궁예 그래....죽었어.... 왕건아우를 오라고 해야해.....왕건아우....
종간 예, 폐하.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병부에 영을 전하겠사옵니다.
궁예 (점차 잠이 들며) 북벌..... 북벌 준비도 봐야 하는데..... 사형, 거기도 가봅시다...... 보고 싶어....... 북벌....... 가보고 싶어.... 가서 보아야지...
종간 예, 폐하. 그 일도 지시를 해놓겠사옵니다. 자, 주무시오소서. 어서, 침수드시오소서.
궁예 사형..... 사형...... 졸리워.....
웃는 듯 종간을 보고가 궁예는 스르르 눈을 감는다. 그리고 깊은 잠에 떨어진다. 은부는 그런 종간과 궁예를 번갈아 보다가, 종간과 눈이 마주치자 긴 한숨을 내쉰다. 종간은 여전히 눈물을 닦고 있다.
종간 그래도, 나를 보고 사형이라고 하셨어. 사형....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가?
은부 예, 내원어른. 불가에서 말하는 형님이라는 뜻이 아니옵니까?
종간 그래, (감정이 북받치는 듯) 폐하께서는... 나를 보이지 않게 의지하고 계시네. 나를 형님처럼.... 기대고 계셔.
은부 그러신 것 같사옵니다.
종간 (자는 궁예 보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너지실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탄하는 그런 종간의 표정에서....
씬 4 황후전 복도
진내관이 서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몰라한다.
씬 5 동 황후전
연화가 놀라서 제조상궁에게 묻고 있다. 슬이도 옆에 있다.
연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겐가? 누가 죽었다구?
제조상궁 내관 하나가 폐하의 어검에 맞아 절명하였다고 하옵니다. 은밀히 시체를 내가는 것을 진내관이 보았다고 하옵니다. 지금 여기 황후전 밖에 와 있사옵니다.
연화 폐하께서.... 왜 내관을 죽였다 하시더냐?
제조상궁 자세히는 모르오나 독주를 많이 드시고....
연화 아니되겠구나, 슬이야. 밖에 진내관 좀 들라 하여라.
슬이 예, 황후마마. (나간다)
연화 대전 안에서... 내관을 죽이셨다구, 내관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방안에서 사람을 칼로 베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진내관과 슬이가 다시 들어온다.
진내관 황후마마, 소인이옵니다.
연화 자세히 말해보게,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가?
진내관 대전이 온통 난리가 났었다 하옵니다. 폐하께서 독주를 드시고 의식이 없으신 가운데.... 죽은 중 석총이 얘기를 하시면서... 검을 빼시어 내관을 죽이셨다 하옵니다.
연화 (크게 놀라며) 석총스님 얘기를 하셨단 말인가?
진내관 예, 황후마마. 아마도 많이 취하시어 헛보신 것 같사옵니다.
연화 (사이) 헛보셔? 헛보셨단 말이지.... (사이, 도리질) 점차 무서운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구나. 벌을 받고 계시는 게야. 하늘의 벌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어떻게 죽은 석총스님이 보일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씬 6 동 황궁 마당
은부가 밖에 홀로 서서 생각에 잠겨 있다. 그리고, 가끔씩 대전 쪽을 돌아보다가 도리질을 한다. 경계를 서는 내군들이 오가고 있고, 금대와 장일이 다가온다. 그리고, 군례를 올린다.
은부 죽은 내관의 시체는 잘 처리하였는가?
금대 예, 장군. 은밀히 궁 밖으로 내다 버렸사옵니다.
은부 소문나지 않게 잘 처리를 해야해. 쥐도 새도 몰라야 하고....
장일 예, 장군. 그리 하였사옵니다.
은부 그리고, 이제부터는 폐하주변을 밀착 경호해드리도록 하게.
두사람 예, 장군.
은부 어려운 일들이 더욱 더 많아질 것 같네 그려. 오늘밤에 그 일이야말로 폐하께서 정신착란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겠는가? 정신병적 증상이 나타나신 것일세. (사이) 이 비밀이 밖으로 나가서는 안돼. 우리 내군이 철저하게 지켜드려야 한단 말일세. 그만 가들 보게.
두사람 예, 장군.
두 사람 그렇게 사라진다. 은부는 다시 불이 켜져 있는 대전 안을 돌아본다.
씬 7 동 대전 안
궁예는 잠이 들어 있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종간은 그런 궁예를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부모처럼 그렇게 보고 있다.
종간 폐하, 얼마나 힘이 드시옵니까? 신은 아옵니다. 지금 폐하께서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우신 지를 아옵니다. (사이) 이대로 무너지셔서는 아니되옵니다. 다시 일어나셔야 하옵니다. 대 미륵으로써 처음에 세우셨던 그 대망을 이루셔야 하옵니다. 꼭 이루셔야 하옵니다. 이 종간이가 목숨을 불태워 폐하를 지켜드릴 것이옵니다. 약도 반드시 찾아내겠사옵니다. 폐하를 살려드릴 것이옵니다. 다시 이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시도록 해 드릴 것이옵니다, 폐하.
궁예는 여전히 잠이 들어있다. 종간은 안타까운 듯 눈을 감는다. 그리고, 한참만에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조용히 그곳을 물러 나간다.
씬 8 동 밖 마당
종간이 걸어 나온다. 아직도 그곳에 은부가 홀로 서서 먼 어둠 속을 보고 있다. 종간이 말한다.
종간 아직도 거기 있었는가?
은부 예, 내원어른.
종간 가서 눈 좀 붙이지 않고....
은부 (한숨 섞여) 오늘밤은 잠을 자기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종간 나도 그 마음을 아네.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은부 (진지하게) 폐하께오서.... 드디어..... 정신을 놓기 시작하신 것 같사옵니다. 그것이 두렵사옵니다.
종간 두려워 할 것 없네. 내가 그 분 곁에 있어. 우리는 이미 그 분과 함께 하는 목숨일세.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어.
은부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사옵니다.
종간 금강산을 이 잡듯이 뒤지게. 그 도인을 다시 찾아와. 지난 번 폐하의 목숨을 구해준 그 도인 말일세.
은부 알아보겠사옵니다.
종간 곧 폐하께서는 분명 북벌 군단에 관한 것을 보고 싶어하실 것일세. 순군부를 사열하실 것일세.
은부 예, 그러시겠지요.
종간 나주의 왕건이도 칙사를 보내어 오도록 해야 할 것이고.
은부 예, 내원어른. 하지만, 그곳에 일을 정리하자면 한동안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겠사옵니까?
종간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폐하께서 서두르시니 그 점을 감안하게나.
은부 예, 내원어른.
종간 사람들이 왜 술을 마시는 지 오늘은 이해를 좀 할 것 같네 그려. 술을 할 줄 안다면 오늘 같은 날은 한 잔 마시고 싶으이.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한숨을 쉬며 말없이 어둠을 본다. 전각들을 밝히는 횃불들만 무심히 타고 있다. 아주 길게 디졸브.....
씬 9 인서트
그 궁궐의 마당이다. 거센 바람이 휩쓸어 가고 있다. 그 위로 천천히 아침이 밝는다.
씬 10 궁궐 뜰(아침)
대전 앞이다. 날씨는 청명하고 밝은 새 울음소리들이 들리고 있다. 내관, 나인들이 부산히 오가는 것이 보인다. 상궁 둘이 물그릇을 받쳐들고 전각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씬 11 동 대전 안
궁예가 일어나 앉아 있다. 조심스럽게 상궁들이 꿀물을 놓고 나가자, 그것을 마신다. 그리고, 머리가 아픈 듯 흔들어 본다. 생각한다.
궁예 (E)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꿈에 석총이를 본 것 같았는데.... 그래, 석총이를 보았는데.... (도리질한다) 그는 마군이었어. 그래서 내가 죽인 것이야..... 헌데, 왜 꿈에 보이는 것일까? 왜.....?
궁예는 또 도리질을 한다. 생각을 털어 내려는 듯 물을 마신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며 입술을 굳게 다문다.
궁예 (E) 약해져서는 아니되지. 그래도, 미륵이고 황제라는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그렇고 말고.... 석총이가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누가 새 미륵이라고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아니되는 소리. (큰 소리로) 밖에 누가 있느냐?
대전내관 (E) 예, 폐하. 원봉성령이 와 있사옵니다.
궁예 들라하여라.
대전내관 (E) 예, 폐하.
잠시 후에 최응이 들어와 예를 올리고 앉는다.
최응 편히 주무셨사옵니까, 폐하?
궁예 그렇다. 잘 잤다. 조반은 들었느냐?
최응 예, 폐하. 소신은 원래 아침은 잘 들지를 않사옵니다. 맑은 물 한 그릇 아니면 죽 한 그릇으로 대신하옵니다.
궁예 참, 그렇다고 하였지. 고기도 먹지 않고....?
최응 예, 폐하. 고기를 취하면 피가 탁해지옵니다. 해서 아니 먹사옵니다.
궁예 허허, 이런.... 하긴 너는 성인이니까 그럴 게다.
최응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내가 어제 무슨 일을 하기로 하였던가?
최응 폐하께오서는 어제 두 가지를 말씀하셨사옵니다. 하나는 북벌을 준비중인 순군부를 사열하시는 것과...
궁예 그래, 그래, 그랬었지....
최응 또 하나는 나주에 있는 왕건장군을 부르시는 일이셨사옵니다.
궁예 그랬어, 맞아.... 둘 다 중요한 일이지. 그렇다면 그 일을 준비하거라. 순군부한테 요 며칠 안에 우리가 간다는 것도 전해주고.
최응 예, 폐하.
궁예 그리고, 황후전에도 알리도록 하고. 황후도 참 답답할 게야. 바깥 바람이라도 쏘이도록 해야지.
최응 그리하겠사옵니다, 폐하.
최응이 일어나 나간다. 궁예는 다시 입정에 든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씬 12 아지태집 외경
씬 13 동 집 사랑
아지태와 함께 임춘길, 입전, 신방, 능달, 기전 들이 모여 있다.
임춘길 나으리, 며칠 안에 폐하께오서 우리 순군부를 사열하신다는 영이 내려 왔사옵니다.
아지태 나도 방금 전에 오면서 이야기 들었네.
임춘길 한동안 잊으신 듯 하시더니, 갑자기 사열이라니요?
아지태 허허허, 지난번 조회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앞으로는 손수 챙기시겠다고.
입전 하지만, 사열을 나오신다고 하여 나아질 것이 없지 않사옵니까?
신방 그렇사옵니다. 무엇 하나 보여드릴 것이 제대로 없사옵니다.
임춘길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오래 전에 환선길, 이흔암 장군들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사옵니다. 우선 대 군단에 쓰이는 기초적인 군수물자조차 제대로 조달되고 있지 않고 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지태 (말을 막으며) 아, 나도 알아. 다 아네. 아, 세금이 걷혀야 무엇을 하지. 그리고, 호족들과 백성들 또한 형식적으로 응하고 있을 뿐이야.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 훈련이 되겠는가?
능달 정말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기전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런 사정을 모르실 것이옵니다.
아지태 그러니까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야. 이제 때가 다 왔어. 다 왔구 말구. 때가 왔어요.
그 말에 모두 긴장하며 아지태를 다시 본다.
임춘길 소인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어르신께서 계획하고 계시는 그 일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고 보옵니다만은....
아지태 (끄떡인다) 옳은 말이야. 황궁에 박아 둔 끄나풀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 폐하께서는 다 되셨다고 하더군.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는 게야. 술이 취해 내관도 죽였다는 게야.
임춘길 그렇사옵니까, 나으리?
아지태 이제 때가 되었어. 오래 끌 것도 없고.... 황제는 이미 미쳤어. 그것을 우리가 갈아 치워 버리는 것이야. 이 나라를 위해서 말이야. 이보게, 입전, 신방, 그렇지 않은가?
두사람 (바짝 긴장하며 더듬는다)... 그.. 그렇사옵니다.
아지태 허허, 사람들 하고는..... 자네들은 만날 때마다 왜 그렇게 긴장들을 하는가?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대범해야지. 원, 쯧쯧쯧....아무튼 이보게, 임장군.
임춘길 예, 나으리.
아지태 우리의 거사는 황궁 안에서는 불가능하네. 황제가 밖에 나와 있을 때가 절호의 기회야. 곧 있을 사열에서 때를 보게나.
임춘길 (긴장하며) 이번 사열에서.... 말이옵니까?
아지태 기회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야. 눈에 보일 때 낚아 채야하는 것이야. 이번에 있을 사열을 잘 보게. 기회가 되면 해치우고 그렇지 않으면 한 번 더 다음 기회를 보고. 믿을 수 있는 수하들을 늘 대기시켜라 이 말이야. 거사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는 내가 그때그때 즉시 결정을 해서 눈치를 줄 것이야.
임춘길 알겠사옵니다, 나으리.
아지태 입전 자네들도 그렇게 알고 비상대기를 하도록 해.
입전 (굳어지며).....예.....나으리......
아지태 왕건이가 그곳 전선이 정리되면 올라 올 것이야. 되도록이면 오기 전에 해치워야 하는데, 왕건이가 오기 전에 말이야.....
그런 그들의 표정에서.......
씬 14 왕건의 집 외경
씬 15 동 집 안
전선에서 막 온 왕식렴과 그의 동생 왕신, 두 부인이 이들을 맞고 있다.
수인 세상에.... 아니, 도련님... 지금 뭐라고 하셨사옵니까? 나주 형님께서 태기가 있으시다구요?
왕식렴 예, 제가 나주서 올 때 그렇게 들었사옵니다 형수님.
유씨 언제 그렇게까지 되었는고.....
왕식렴 태기가 있으신 지는 오래되었다고 하옵니다, 형수님. 참으로 집안의 경사가 아니겠사옵니까?
왕신 아, 왜 아니겠사옵니까? 오히려 좀 늦었지 않사옵니까?
왕식렴 그렇구, 말구....
수인 사실 아기를 보는 일은 큰 형님께서 먼저 하실 일이 아니옵니까?
유씨 (한숨) 그 일이 어디 꼭 절차만을 따질 수가 있는 일인가? 다 나주 아우의 복일세.
수인 (섭섭한 듯) 그렇겠사옵니다.
유씨 부러워만 할 일은 아닐세. 자네도 다 좋은 때가 오지 않겠는가?
수인 물론 그렇기는 하옵니다만은....
표정이 흐려지는 수인의 모습에서....
씬 16 나주 관아 외경(밤)
씬 17 동 관아 안
왕건과 오씨, 다련군, 능산, 유금필, 태평이 술을 마시고 있다. 다련군이 말한다.
유금필 주군, 감축드리옵니다.
능산 감축드리옵니다.
왕건 고맙네.
유금필 형수님께서 태기가 있으시다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왕건 어허, 이런 사람들 하고는.... 그렇지 않아도 자네들이랑 한 잔 하려고 하였다가 금필 아우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었네.
태평 다친 곳은 좀 어떻사옵니까, 장군?
유금필 견딜만 하오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주군께 다시 한 번 송구스럽사옵니다.
왕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야. 자, 들게. 능산 아우도 들고.
두사람 예, 주군.
오씨 오늘 드시는 술은 진도의 명물인 홍주이옵니다. 많이 드시오소서, 얼마든지 있사옵니다.
능산 고맙사옵니다, 형수님. 많이 마시겠사옵니다. 허허허.
다련군 아무튼 이제 전선이 골고루 안정이 되어간다고 하니 한시름 덜었네. 백제군도 무진주 성으로 들어가서 꼼짝도 않고 있다고 하고....
왕건 하지만 견훤왕은 끈질긴 사람이니 아직 결론을 내기는 이르옵니다.
오씨 그렇다고 해도 그토록 지독하게 당하고 나서 또 오겠사옵니까? 당분간은 별일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태평 그럴 것이옵니다. 그 동안에 입은 타격을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옵니다.
왕건 물론 그렇게 생각은 하네만은....워낙 질긴 사람이라서 말일세.
태평 이번만은 다를 것이옵니다. 안심하시오소서, 주군. 이제부터는 이곳에 인심을 관리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옵니다.
다련군 아, 그 일이라면 그건 자네가 안심하게. 내 딸아이가 왕총사나 나보다도 더 나서서 확인하고 감시를 하는 통에 아주 머리 아파 죽겠네 그려. 허허허...
오씨 원, 아버님도..... 그만 하시오소서.
왕건 아무튼 방심은 금물이야. 견훤왕은 절대로 이곳만은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말일세. 대책들을 철저하게 세워야 할 것이야.
그들 예, 주군.
씬 18 전주 황궁 외경(낮)
씬 19 동 궁 안
박씨와 고비에게 추허조가 부상당한 몸으로 예를 올리고 있다.
박씨 추장군, 그렇게 많이 다쳤다니 참으로 안되었구료.
추허조 황공하옵니다, 황후마마. 이런 몸으로 뵙게 되어 부끄럽사옵니다.
박씨 아니오. 용감한 추장군이 이지경이 되었다면 그 전투가 어떠했다는 것은 안 보아도 압니다.
고비 폐하께서는 어찌하고 계십니까?
추허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것으로 아옵니다.
박씨 한 두 번 전쟁을 하신 분도 아니신데, 되지도 않는 싸움을 왜 그리 고집을 피우셨단 말씀인고....안타까운지고.... 모쪼록 몸을 잘 간수하시오, 추장군. 수달장군처럼 되지 마시고....
추허조 망극하옵니다, 황후마마.
박씨 어이할꼬.... 우리 생전에 이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을꼬....?
도리질하는 박씨의 어두운 표정에서.....
씬 20 무진주 성루
견훤이 풀 죽은 모습으로 먼 곳을 보고 있다. 그 옆에 최승우와 능애가 함께 해 있다.
최승우 폐하, 황도를 너무 오래 비워두셨사옵니다.
견훤 ........
최승우 이곳 금성에만 너무 집착하지 마시오소서. 황도로 돌아가시어 하실 일이 많사옵니다.
그래도, 견훤은 대답이 없다. 한숨만 계속 내쉰다. 능애가 거든다.
능애 폐하, 전선은 넓고 폐하께서 돌아보실 곳이 많사옵니다. 인연이 닿지 않을 때는 잠시 두고 보실 필요도 있사옵니다. 파진찬의 말대로 하시오소서.
견훤 일리 있는 말들이야. 그러나, 어떻게 이대로 돌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수달아우나 방장군의 넋이 이곳에서 원통하게 떠돌고 있어. 저들의 혼백을 두고 어찌 간단 말인가?
최승우 오늘만 날이 아니옵니다. 다음을 생각하시오소서.
견훤 (한참만에) 나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를 않아. 그 한스러운 남동풍 말이야. 그게 그때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또, 왕건이는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최승우 신도 그 일로 하여 은밀히 수하들을 시켜 알아보았사온데....
견훤 말해보게.
최승우 첩자들이 알아온 바에 의하면 왕건이 휘하에 태평이라는 젊은 군사가 있다 하옵니다. 그가 바람의 이동을 감지하여 이번 전쟁에 썼다 하옵니다.
견훤 (꿈틀하며) 태평?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닌가?
최승우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상주 전투 때부터 왕건을 도와 수많은 전공을 올렸다 하옵니다. 소신이 늦게 서야 그런 내막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모두가 신의 불찰이옵니다.
견훤 그랬었구먼. 그런 자가 있었구먼.
그리고, 또 한동안 견훤은 말이 없다. 그러다가, 힘없이 돌아서며 말한다.
견훤 그래, 황도를 너무 오래 비웠어. 전선은 여기 뿐만이 아니야. 돌아가도록 하세. 돌아 가세나.
두사람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하지만, 절대로 이번 전쟁의 기억을 잊어서는 아니되네. 절대로....
두사람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견훤 그리고, 다음에는 반드시 왕건이의 목을 베어야 해. 그래서, 수달아우와 방장군 그리고 수많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 주어야해. 아니, 그 태평이라는 자의 목도 반드시 베어야 해. 오늘 내가 한 말을 명심들 하게나. 알겠는가?
최승우 예, 폐하. 어찌 잊겠사옵니까? 신의 마음도 참으로 아프고 또한 부끄럽사옵니다. 결코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견훤 가세, 돌아가세.
씬 21 길
견훤군이 돌아가고 있다. 지훤은 보이지 않고, 공직, 최필, 신덕, 김총, 애술들이 군사들과 함께 가고 있다.
해설 견훤의 회군, 수없이 반복되었던 나주전투에서 견훤은 그렇게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한 끝에 황도인 전주로 돌아갔다. 후백제의 정신적 지주였고 군사였던 최승우도 난생 처음으로 맛보는 쓰라린 패전의 한을 안은 채 견훤과 함께 금성을 떠난다. 한편, 그 무렵 철원의 궁예는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고 나서 순군부의 첫 사열에 나서 있었다.
씬 22 훈련장
기마대가 환설길, 이흔암의 지휘하에 질서정연하게 지나치고 있다. 수많은 군인들이 장비들과 무기들을 들고 시위하며 지나쳐 가고 있다. 그 중앙에 궁예와 연화, 아지태가 함께 있고, 그 옆으로 종간, 은부, 금대, 장일, 최응, 박질(장자1), 원극유(장자2), 박지윤 부자, 왕식렴, 왕신, 복지겸, 입전, 신방들과 함께 강장자 부부 그리고 유씨, 수인 등 많은 부인들이 또한 참관해 있다.
궁예 병부에서 가지고 있던 군의 지휘권을 순군부에게 넘겨주었어. 이제부터 뭔가 달라져야 할 것인데...
아지태 순군부를 맡은 임춘길은 신뢰할만한 장수이옵니다.
궁예 그래야지. 아무튼 아학사가 이제는 이 조정에 중심이오. 군은 물론이고 이 군을 받쳐 주는 다른 조정의 부서도 확실하게 다그쳐야 하오.
아지태 예, 폐하.
궁예 (한참 보다가) 오늘은 모든 신료들이 다 나왔고, 또한 중요한 직무를 맡고 있는 장수들의 부인들도 모처럼 다 오라 하였소이다. 안과 밖이 공히 이 나라의 최대 현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오.
아지태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궁예가 끄떡인다. 기마부대와 장창부대에 이어서 이번에는 방패를 든 보군들이 궁예 앞을 지나쳐 간다. 임춘길이 앞을 섰고, 능달, 기전이 부장으로 따르고 있다. 그들 셋은 말을 탔다.
임춘길 (지나치며) 위대하신 폐하께 군호를 드려라!
그 명령과 함께 ‘충군’을 외치는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이어진다. 궁예는 만족스러운 듯 보고 있다. 그때, 능달이 탄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대열에서 이탈하려 한다. 모두들 본다. 능달이 당황하여 워, 워~ 하며 고삐를 당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진다. 모두 놀라서 본다. 궁예가 쯧쯧 혀를 찬다.
임춘길 송구하옵니다, 폐하. (능달에게) 무엇 하느냐? 어서 말에 다시 올라라.
능달 예, 장군.
급히 능달이 말에 오른다. 그때, 킥킥거리며 웃는 부인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궁예가 찡그리며 돌아본다. 다시 조용해진다. 임춘길과 능달의 부대가 그렇게 지나쳐 가는데 웃는 소리가 또 들려온다. 궁예가 멈칫하며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무서운 표정으로 그 부인들을 돌아본다.
궁예 지금 누가 웃음소리를 내었는가? 누가 웃었어?
모두들 ......... (긴장한다)
궁예 (그 부인들 쪽을 본다) 이 중요하고 성스러운 자리에서 웃음소리를 내? 이런 음탕한 것들이 있나. 어디서 그런 더러운 웃음을 웃어?
궁예는 그 부인들을 노려본다. 이미 그녀들은 사색이 되었다. 대꾸조차 못하고 있다. 궁예가 관심법을 하기 시작한다. 신료들의 면면이 지나친다. 유씨와 수인들도 떨며 본다. 궁예의 그 생각 속으로......석총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궁예는 눈을 번쩍 뜬다. 부인이 아니다. 석총의 여러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이는 것이다.
궁예 마군이로구나. 마군이야. 너는 석총이가 아니냐?
종간 ........(이거 큰일 났다 싶다)
궁예 석총이가 또 왔어. 내군들은 무엇을 하느냐? 저 요괴들을 끌어내거라. 철퇴로 때려 죽여.
종간 폐하...... 폐하.......?
궁예 군사 훈련은 그만 되었다. 어서 저 요괴들을 끌어내라.
은부 끌어내라!
부인들 (비로소) 폐하, 살려주시오소서. 폐하.....
연화 ........(어쩔 줄 모른다) 폐하........ 연약한 아녀자이옵니다. 용서해주시오소서. 폐하........
궁예 아니오, 저것들은 마군이오. 저것들이 나를 비웃었어. 이 신성한 자리를 모독했어. 무엇들 하느냐? 어서 끌어내거라. 그쪽은 다 끌어내라. 어서 죽여라.
내군들이 대답하며 달려가 그 여인들을 앞으로 끌어낸다. 여인은 손발이 닳도록 빈다.
부인들 (여기저기서) 잘못했사옵니다, 폐하. 용서해주시오소서, 폐하.....폐하...........
궁예 어서 죽여라.
은부가 고개를 끄떡해 보인다. 내군들이 철퇴로 내려친다. 삽시간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있는데, 아지태의 눈이 번쩍인다. 임춘길과 시선이 교환되고 있다. 그러나, 그 옆에 종간과 은부, 내군들이 보이고 저만큼 환선길, 이흔암들도 있다. 입전, 신방도 아지태를 본다. 그러나, 아지태가 때가 아니라는 듯 가볍게 도리질을 한다.
궁예 꼭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단 말이야. 내군들은 들어라.
내군들 예, 폐하.
궁예 저것들의 목을 모두 메달아 오고 가는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거라.
내군들 예.....
궁예 국가의 만년 대업을 위해서 준비중인 우리 군대야. 이러한 군을 사열하는 중요한 때에 웃어? 이런 정신 가지고 무얼 하겠는가? 이보시오, 내원.
종간 예, 폐하.
궁예 그만 돌아가십시다. 오늘은 더 이상 관심이 없소이다. 에잉....쯧쯧....
궁예가 그렇게 일어선다. 신료들은 겁먹은 듯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궁예가 연화와 함께 지나가자 물결처럼 갈라진다. 아지태와 임춘길은 여전히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 궁예는 그렇게 가다가 입전과 신방을 본다. 특히나, 입전은 궁예가 가까이 오자 온몸을 떤다. 그런 입전을 보고 궁예가 멈추어 서며 웃는다.
궁예 (한참 보다가) 경은... 누구더라? 의형대에 있는 의형대령이던가?
입전 예, 폐하. (가득 겁먹고) 의형대령 입전....이옵니다.
궁예 허허허허, 자네 왜 그렇게 떠는가? 가만히 보니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게로군?
입전 예...예?
궁예 감추고 있는 것이 있어. 그러나, 오늘은 관심법을 그만 쓰겠다. 조심하도록 할지어다.
입전 예....예, 폐하.....
궁예들은 그렇게 지나쳐 간다. 입전은 가슴을 쓸어 내린다. 너무도 무서운 것이다. 은부가 소리치고 있다.
은부 폐하를 뫼시어라. 폐하께서 황궁 하신다, 폐하를 뫼시어라.
사라지는 궁예들을 보며 유씨, 수인들은 어쩔 줄을 모른다. 왕식렴과 왕신도 굳은 표정으로 보고 있다. 디졸브.......
씬 23 인서트(밤)
죽은 부녀자들의 목이 그렇게 결려 있다. 그 위로 해설....
해설 궁예의 이 무참한 살육, 특히나 부녀자들에 관한 이 만행을 고려사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궁예는 미륵관심법을 취득하여 부녀자들의 음행까지도 알아 낼 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삼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 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죽게 하였다. 그로 인하여 부녀자들이 모두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함이 날로 심하여졌다, 라고 되어 있다.
씬 24 아지태의 집 외경(낮)
씬 25 동 집 사랑
아지태와 임춘길, 입전, 신방, 능달, 기전들이 함께 해 있다.
아지태 (능달에게)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하였는가?
능달 송구하옵니다, 나으리. 말이 그만, 갑자기 요동을 치는 바람에.....
임춘길 그것보다도 나으리, 어제 그곳에서 소인은 나으리께서 칼을 뽑으라고 하시는 줄 알았사옵니다.
아지태 그런 기회를 보고 있었지. 허지만, 주변사정이 그렇지를 못했어.
임춘길 더는 두고 볼 일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아지태 그건 그래.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할게야. 우리가 거사를 일으키면 많은 사람들의 심정적인 동조가 생길 것이고.
신방 그렇사옵니다. 어떻게 연약한 부녀자들을 그렇게 죽일 수가 있사옵니까?
아지태 다 되었어. 황제의 때가 다 된 것이야.
입전 ........(눈치만 보고 있다)
아지태 갈수록 더 큰 실수를 하게 될 것일세. 순군부는 준비를 하게.
임춘길 알겠사옵니다, 나으리.
아지태 새로운 혁명이 필요해. 내가 때를 정하고 명을 전하면 빈틈없이 움직이도록 하게. 요 며칠 내에 기회를 봐서 결행을 하세나.
임춘길 예, 나으리.
아지태 입전, 신방 자네들도 단단히 준비하고....
그들 예, 나으리.
아지태 곧 강장자와 만나 거사일을 확정짓고 태자마마를 뫼실 것일세. 무엇보다도 빠른 시간 안에 내군을 제어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 될 것일세. 임장군, 자네에게 달렸어.
임춘길 예, 나으리.
아지태 때는 왔어. 이제 때는 왔어......
씬 26 강장자 집 사랑
부부가 서로를 빤히 보고 있다.
백씨 아니, 나으리.... 지금 뭐라고 하셨사옵니까?
강장자 혁명이라고 하였소이다. 이제 황제가 가실 때가 된 것이올시다.
백씨 무서운 말씀 그만 하시오소서. 대체 뭘 믿고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옵니까?
강장자 이미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소이다. 황제는 미쳤어요. 아까도 석총이가 보인다고 했어요. 그게 어디 제정신입니까?
백씨 하지만, 혁명이라니요?
강장자 아학사는 폐하의 은총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은 사람이오. 그래서 지금 신료들 중 서열 두 번째에 있소이다. 그런 그가 나를 돕겠다고 했소이다. 우리 태자들을 보위에 올려주겠다고 했소이다.
백씨 그만 하시오소서, 무섭사옵니다.
강장자 무서움은 잠깐이오. 이제 곧 밝은 날이 올 것이오. 우리 손주가 황제에 앉고 나는 그 섭정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오. 섭정말이오. 다시 말하면 내가 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 말이오. 아시겠소이까, 부인?
백씨 나으리.....?
강장자 곧 연락이 올 것이오. 아주 기쁜 소식이 올 것이오.
씬 27 황궁 외경(석양)
씬 28 황후전
연화가 생각에 잠겨 있다. 그리고, 두려운 듯 중얼거린다.
연화 아버님의 말씀은 모두 다 사실이었어.
슬이 ........
연화 폐하께서 폐인이 되신 것은 드러날 만큼 다 드러났어. 이제 더 이상 감출래야 감출 길도 없게 되었어. 아니 그러냐, 슬이야?
슬이 그러하옵니다, 황후마마.
연화 이러니 어찌 많은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이럴 때에 왕장군이 계셔야 할 터인데.... 이럴 때에 왕장군이 조정에 있다면 안심이 될 터인데..... 도대체 언제 온다고 하시더냐?
제조상궁 소인이 알기로는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돌아오도록 칙령이 내려 갔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그 분 밖에는 없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해결해 줄 사람은 그 분 밖에는 없어.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폐하가 저러 하신데 불순한 무리들이 얼마나 많이 나쁜 마음을 품고들 있겠느냐? 두렵구나. 너무 두려워.....
씬 29 대전 복도(밤)
씬 30 대전
궁예가 태연히 경전을 읽고 있다. 어제에 있었던 일은 이미 잊어 버렸다. 끄떡이며 아주 심각하게 책을 읽는다. 그 옆에 종간이 가만히 앉아 있다. 한참 책을 읽다가 궁예가 그런 종간을 본다.
궁예 내원, 왜 그러고 있소이까? 국정에 관한 얘기는 다 끝나지 않았소이까?
종간 그렇기는 하옵니다만은....
궁예 (도리질)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그 순군부 말이오. 이름만 바뀌었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종간 군대를 육성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옵니다. 날이 가면 좋아질 것이옵니다.
궁예 하긴, 뭐, 아지태 저 사람이 그저 그렇게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야. 그래도 나와 더불어 누구보다도 북벌에 관하여 관심이 많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오.
종간 그러하옵니다, 폐하.
궁예 (옆에 놓은 탕제를 보고) 헌데, 이건 무엇이오?
종간 편히 주무실 수 있는 탕제이옵니다. 드시고 주무시오소서. 편안히 주무실 수 있사옵니다.
궁예 (도리질) 할 일이 많아요. 잠만 자서야 되겠소이까?
종간 그래도, 좀 드시오면....
궁예 경전도 좀 더 읽어야 하고 나라 살림이 어찌되고 있는지 이 조세에 관한 것도 오늘밤 다 보아야겠소이다. 그만 가보세요.
최응 ...........
궁예 (계속 경전 보다가) 가 보세요.
종간 저.... 폐하....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그 죽은 석총이가..... 자꾸 보이시옵니까?
궁예 석총이?
종간 예, 폐하.
궁예 그 자는 내가 죽이지 않았소이까? 가끔 생각이 날 뿐이예요. 그래, 생각이 나. 좋은 일은 아니지만.....
종간 대범하게 생각하시오소서. 그런 자들은 폐하께 아무 것도 아니옵니다. 큰 부담을 갖고 계시니 자꾸만 그 상이 떠오르는 것이옵니다. 무시해 버리시오소서, 폐하.
궁예 알고 있소이다. 허긴 그래요. 그까짓 것들 아무 것도 아니고 말구...
종간 그러하옵니다. 그리 생각하시오소서.
궁예 그건 그렇고.... 관심법을 쓸 일이 갈수록 많아질 것 같소이다. 이 나라를 더 단단히 만들려면 말이오. 좋은 철퇴를 하나 구해야겠소이다. 쇠방망이 말이오. 한 삼척 쯤 되는 좋은 쇠방망이면 좋겠는데.... 내말 들었느냐,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그걸 하나 구해오라고 하여라. 쇠방망이 말이다. 자주 쓸 일이 생길 것 같구나. 알겠느냐? 기왕이면 오늘 밤 안으로 구해와.
최응 예, 폐하.
종간 .........(눈을 감는다, 한숨)
그렇게 한숨을 쉬는 종간에서......
씬 31 철원 저자 거리
씬 32 아지태의 집 사랑
아지태와 강장자가 만나고 있다. 두 사람은 표정이 굳어 있다.
아지태 드디어 때가 온 것 같소이다. 머지 않아 폐하는 다시 군을 사열하러 나올게요. 때는 그 때올시다.
강장자 알겠소이다.
아지태 이미 순군부에서 모든 준비를 끝내 놓고 있소이다.
강장자 알겠소이다.
아지태 수삼일 내에 기회를 봐서 황제가 밖에 나와 있을 때 순군부의 군사들이 움직일 것이오. 그 현장에서 내원과 내군 장군 은부를 즉결 처형하고 동시에 일단의 군사들이 황궁을 접수하게 됩니다.
강장자 그래야겠지요.
아지태 허면, 어린 태자마마를 옥좌에 앉게 하신 이후 강장자께서 신료들을 소집하고 혁명을 알리는 것입니다.
강장자 그, 그래야겠지요.
아지태 요 며칠 사이에 다 끝나는 일입니다. 며칠이면 말입니다.
씬 33 어느 집 방
입전이 생각에 잠겨 있다. 그리고, 신방도 마주해 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겁먹은 표정으로 말이 없다. 술상이 놓여져 있다.
입전 아무래도 군사를 일으키기는 일으킬 모양일세. 그 일은 아주 그렇게 하기로 굳어진 것 같아.
신방 그러게 말일세.
입전 과연 아학사 어른이... 이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보는가?
신방 ....... (대답 못한다)
입전 많은 사람들이.... 그 관심법에 걸려서 죽었네.
신방 그랬지.
입전 솔직히 나는 두렵네. 이 세상에서 누가 페하의 그 관심법을 속일 수가 있겠는가? 어제도 보지 않았는가? 폐하께서는 나를 보시고 뭘 감추고 있는 지 안다고 하셨어.
신방 그랬지.
입전 그때 관심법을 썼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을 것일세.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신방 그건 그러하이.
두 사람은 고민하고 있다. 계속해 두려운 표정들이다.
신방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네 그려. 우리가 비록 아학사어른 덕에 벼슬은 했지만.... 이건 역모가 아닌가? 삼족이
아니라 구족이 멸할 일일세.
입전 (끄떡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무서워. 성공할 확률이 적네 그려. 내군 그 사람이 얼마나 독사처럼 차가운 사람인가? 우리 일을 훤히 알고 있을 지 몰라. 아니, 그럴 것이야.
신방 어쩌지....?
입전 이건 무모한 일이야. 잘못하면 청주 출신이 다 죽을 수도 있어. 나는 그 관심법이 너무도 무섭네, 관심법 말이야.
잔인하게 웃던 궁예의 모습과 부녀자들이 죽어가던 모습들이 보인다. 그것도 짧게 여러 번.....입전이 눈을 감으며 불안한 한숨을 쉰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서로를 본다. 그리고, 끄떡인다.
입전 지금쯤 아학사어른과 강장자가 만나고 있을 것일세. 내군에서 풀어 놓은 첩자들이 다 보고 있을 것이야. 잘못하면 개죽음일세.
신방 맞아.
입전 그렇지? 그렇겠지.... (술을 마시고) 이보게, 신방.
신방 말하게.
입전 차라리... 차라리 어떻겠는가? 우리 둘이라도 목숨을 구해야하지 않겠는가? 역모라니...? 가능성이 없어.
신방 맞는 말이네.
입전 내원은 우리를 살려 줄 것이야. 바른 대로 말을 다 하면.... 살려주고 어쩌면 상도 줄 것이야. 아니 그런가? 그 관심법을 받지 않아도 되고 말일세.
신방이 끄떡인다. 둘은 서로 끄떡인다. 합의를 한 것이다.
씬 34 그 저자 거리
입전, 신방이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 그렇게 카메라 앞을 스치며 사라진다.
씬 35 황궁 대전
궁예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쇠방망이를 만지고 있다.
궁예 아주 잘 만들었어. 정말 잘 만들었어. 그래, 이것이 바로 법이야. 무지몽매한 것들은 그저 몽둥이가 약이야.
최응 ..........
궁예 허허허허, 최응아, 볼만하지 않느냐? 아니 그러하냐?
최응 ..........(미소만)
궁예 관심법과 이 쇠방망이만 있으면 다 된다. 온 천하가 이 방망이 앞에 서 벌벌 떨며 무릎을 꿇을 것이야. 하하하하, 정말 잘 만들었다. 우리 내원에게도 좀 보여주어야겠구먼 그래. 하하하하.
씬 36 동 내원
종간이 생각에 잠겨 있다. 두루마리들을 보며 뭔가를 살피고 있는데 급한 인기척과 발자국 소리들이 들린다. 내원이 돌아본다.
은부 (E,급한 소리로) 내원어른, 은부이옵니다.
종간 무슨 일인가? 이 밤중에....
은부 (들어서며) 내원어른, 대역사건이 터졌사옵니다.
종간 대역.....?
은부 두 사람은 이리 드시오! 어서 내원어른께 전말을 아뢰시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종간이 본다. 입전과 신방이 덜덜 떨며 그대로 문 밖에 넙죽 엎드린다.
종간 아니 그대들은 의형대에 있는 분들이 아니오?
두사람 그렇사옵니다, 내원어른.
종간 대역사건이라고 하였소? 대역.....대역......?
그렇게 날카롭게 묻는 종간의 굳어진 표정에서....
< 98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