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산방을 찾아서 6
시월이 중순에 접어들었다. 단풍은 남녘까지 닿지 않았다만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즈음이다. 근교 들녘에는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벼를 거두느라 바쁘다. 밭둑에선 고구마도 캐고 김장채소가 풋풋하게 자라고 있다. 산비탈 단감과수원에는 고물이 꽉 찬 단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내가 직접 가꾸는 농작물은 없다만 교외로 나가면 풍성한 가을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시월 둘째 주 토요일 하늘은 높고 파랬다. 근교 산행을 나서 가을 야생화를 감상하기 좋은 때였다만 창원을 벗어나 경주로 가야했다. 그곳에서 주말 농장을 일구고 사는 친구가 한번 다녀갔으면 하는 연락이 왔다. 친구는 가을 표고버섯이 돋아나고 있으니 제철에 좀 잘라가라고 했다. 그런 명분으로 깊은 산골 농막에서 하룻밤 같이 묵으면서 세상 사는 얘기들을 나누고 싶어 했다.
나는 아침 이른 시각에 창원종합터미널로 나가 경주행 시외버스를 탔다. 울산에 터를 잡고 사는 친구는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마중 나왔다. 우리는 건천을 지나 당고개를 넘어 산내 감산마을로 들어갔다. 나는 지난 구월 초에 호두를 따느라고 들린 후 한 달만이지만 친구는 매주 주말이면 들리는 곳이다. 산골로 드니 가을이 더 빨리 내려와 있는 듯했다. 먼저 농막에 여장을 풀었다.
친구와 탁자에 마주 앉아 곡차를 들며 가벼운 환담을 나누다 다음날 점심까지 먹고 나갈 쌀을 씻어 밥솥에 안쳐 놓았다. 이어 텃밭으로 가 잔대를 캤다. 잔대는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것을 볼 있다만 친구는 모종을 구해 밭에다 길렀다. 넝쿨로 자라는 줄기에서 종 모양의 예쁜 꽃이 핀다. 잔대뿌리는 도라지뿌리처럼 생겼는데 백숙에 넣어도 좋고 무침나물로 해 먹어도 좋을 듯했다.
잔대를 캐고는 농막 거실로 가서 점심을 차려 먹었다. 친구는 오리고기와 깔끔하게 냉동 포장된 재첩국물을 마련해 반주와 곁들여 잘 먹었다. 점심 식후는 작은 텃밭의 당귀를 캤다. 당귀 역시 인터넷으로 모종을 구해 심은 삼 년 째 되는 뿌리였다. 당귀뿌리로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특히 여성의 어혈을 풀어 주는 효능이 있다. 싱싱한 잎사귀가 달린 당귀는 양이 넉넉하게 되었다.
당귀를 캐고 나서는 천궁도 캐고 부지깽이를 옮겨 심었다. 부지깽이는 매실나무가 자라는 언덕 밑으로 옮겼다. 친구는 당귀와 천궁을 캐고 부지깽이를 옮겨 심은 자리에다 블루베리 묘목을 심을 작정이었다. 산중 노루와 고라니가 밭으로 내려와 애써 가꾸는 농작물을 먼저 시식하고 가기에 속이 상했다. 그래서 이랑을 지어 가꾸는 농작물은 최소화하고 유실수를 심어가는 중이다.
주말에 내가 방문하는 즈음 손을 모아 심으려고 블루베리 묘목을 미리 사 놓았더랬다. 전북 고창 블루베리 묘목 농가로부터 택배로 부쳐온 블루베리 묘목은 사십여 그루였다. 지난주 구지뽕나무와 블루베리를 심어 놓은 것도 있었다. 친구는 관리기로 이랑을 짓고 나는 두둑을 만들었다. 밭 흙이 보드라워 구덩이 파기가 쉬워 블루베리 묘목을 심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블루베리 묘목을 다 심고 나니 짧아진 가을 해는 저물었다. 우리는 아까 캐어 놓은 잔대와 당귀와 천궁 뿌리를 씻었다. 도라지 같이 몸통에 딸린 잔뿌리에 붙은 흙이 잘 떨어지지 않아 여러 번 헹구어야 했다. 깨끗하게 씻은 약초 뿌리를 봉지마다 채워 넣어 창고 냉동실에다 차곡차곡 채웠다. 건재상에 팔려는 것이 아니고 백숙을 끓인다거나 필요할 때 두고두고 꺼내 먹을 요량이었다.
약재를 정리하고 나니 초여드레 달이 중천에 걸려 있었다. 저녁밥은 밤이 이슥해서야 차려 먹었다. 식후에는 구운 갈치를 안주로 곡차를 여러 순배 나누었다. 친구보다 더 산중에 홀로 사는 이웃이 합류했다. 나이 쉰에 이르도록 장가를 가지 않고 있는 기인이었다. 우리는 엄습해 오는 피로에도 아랑곳 않고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여러 차례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우길 반복했다. 13.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