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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인상
최 서 해
1
나는 이렇게 벌이를 쫓아서 어제는 서쪽으로 불리고 오늘은 동쪽으로 흐르게 되는 신세가 되니 가지각색의 고생도 고생이려니와 별별 흉하고 무서운 일도 많이 보게 됩니다.
지금 여기 쓰는 것도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목도한 사실인데 내가 본 여러 가지 무서운 인상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그때 그 광경을 목도한 친구들은 대개 처음 보는 참혹한 일이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말이지 지금도 그 생각이 머리에 번쩍하면 그때 광경이 뚜렷이 눈앞에 떠올라서 소름이 쭉 끼치면서 눈이 저절로 감겨집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그 때문에 세상에 기계라는 기계와 쟁기라는 쟁기는 다 미워진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여러분도 아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작년 이때 함경북도 남양역에서 콩을 쓸던 늙은 부인이 기차에 치어서 죽었다는 보도가 신문지상에 굉장히 났던 것은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기 쓰는 것은 그것인데 그 광경을 나는 그때 남양역의 노동자로서 친히 목도하였습니다.
아이구 무섭기도 하더니……
2
작년 가을에 나는 남양역에서 수백 명 노동자들과 함께 정거장 노동을 하였습니다. 그래 매일 아침 일곱 시나 일곱 시 반에 정거장 넓으나 넓은 ‘홈’ 에 나가서는 기차에 짐을 싣기도 하고 기차에서 짐을 풀기도 하여 “치기영” 소리가 입에서 떠날 새 없이 부지런히 일하다가는 저녁에 해가 져서 하숙에 돌아갑니다. 이렇게 다니는 우리 노동자와 기타 정거장에 나다니는 일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콩쓸이’ 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남양역은 북조선 관문이 되어서 간도로부터 나오는 곡식이 전부 그리로 경유합니다.
그런 까닭에 가을, 겨울, 봄―한창 곡식이 나오는 때가 되면 간도서 마차에 실어내는 곡식이 남양 정거장에 산더미같이 쌓여서 발을 옮기어 디딜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터지는 곡식 섬이 적지 않아서 조나 콩알들이 땅바닥에 수북이 흐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세상에는 밥 굶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거짓말같이 생각되지요. 어떤 때는 궂은비 찬눈을 맞아가면서 목구멍 때문에 껄떡거리는 우리네 짓이 우습기도 합니다.
그렇게 땅바닥에 흐르는 곡식을 쓸어 모으는 것이 ‘콩쓸이’ 의 직무입니다.
그것도 ‘콩쓸이’ 를 자유로 하는 것이 아니요, 감독의 명령 아래서 움직이게 됩니다. 내가 남양역에 있을 때에는 김 서방이란 자가 ‘콩쓸이’감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 삼십이 될락 말락 한 눈의 똥그랗고 얼굴빛이 거뭇하며 입술이 갈잎 같은 사람인데 곡식 장사와 정거장에 알랑거리고 지금 만호장안을 들썽하는 부협의원 운동 이상의 운동으로 하여 ‘콩쓸이 감독’ 이라는 직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콩쓸이 감독’ 의 사무는 아침에 일찍 나와서 곡식 도적놈이 없는가 하고 정거장을 돌아보고는 군졸 ‘콩쓸이’ 들이 콩 쓰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모이는 청방에 자빠져서 불도 쪼이고 담배도 피웁니다.
조나 팥도 쓸지만 콩을 많이 쓸게 되는 까닭에 ‘콩쓸이’ 라는 이름을 가진 군사들 가운데는 늙은이, 젊은이, 어른, 아이, 계집, 사내―이렇게 있는데 그네들은 헌 누데기를 등과 허리에 걸치고 시린 손을 훅훅 불면서 곡식을 쓸어서는 감독과 절반씩 나눕니다.
이러한 콩쓸이 가운데 봉준 어머니라고 그때 칠십이 가까운 노파가 있었습니다. 나이 어려도 반질반질해서 미동이 될 만하고 젊어도 좀 태도가 있고 외모가 똑똑하고 감독의 말을 잘 복종하는 계집이라야 ‘콩쓸이’ 군사로서의 자격을 얻는 것이고 그 밖에는 소개가 든든해야 늙은이가 들어가는 터이지요. 이 봉준 어머니는 여러 노동자의 힘으로 삼 년 동안이나 무사히 ‘콩쓸이’ 군사로서 감독에게 쫓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퍽 침착하고 부지런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머리는 백발이 성성한데 머리는 늘 체머리 ―흔들흔들 떨었습니다. 그리고 주름이 가득한 낮에는 웃음이 흐른 때가 없었으며 눈이 어두워서 어떤 때는 돌을 콩이라고 주운 일이 있습니다. 몹시 추운 날에는 허리에 포대기를 두르고 손에 버선을 끼고 정거장으로 어청어청 나왔습니다. 말없이 빗자루와 자루를 들고 어청어청 다니는 날은 해가 어찌 가는 줄을 모르고 콩을 쓸지만 한번 퍼버리고 앉아서 먼 산을 뚫어지게 보면서 무엇을 생각한다든지 또는 우리가 쉬는 청집에 들어와서 난롯불을 쪼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죽은 아들 이야기, 늙은 신세타령에 세월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 때문에 감독은 은근히 이마를 찌푸리고 중얼거리었지만 여러 노동자의 입이 무서워서 봉준 어머니를 괄세치 못하였습니다. 일기가 사나운 때면 노동자들은 “어머니, 청방에 들어가셔서 불이나 쪼이구 쓰시오” 하고 직접 봉준 어머니에게 권하기도 하고 또 입술이 좀 뻣뻣한 사람은 “여보게 감독나리, 저 노친(함경도서도 늙은이는 사내나 계집이나 간에 노친이라 함)을 좀 쉬도록 하게나” 하고 감독에게 톡 쏩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을 때에 그 노파가 눈에 뜨이면 나누어 먹는 것이 인사였습니다.
그러면 노파는 황송무지라는 표정으로 불도 쪼이고 밥도 먹지만 어떤 때는 공연히 성이 잔뜩 나서 “싫어, 누가 밥먹자나!” 하고 저편으로 갑니다. 그러는 때마다 노동자들은 “또 정신 나갔군! 하하” 하고 웃어버립니다.
“봉준이 있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리?”
“우리네들은 다 그런 신세지. 별수가 있는 줄 아나? 이사람.”
이렇게 서로 기막힌 듯이 뇌는 노동자도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 가서는 그것이 무슨 의미의 소리인지 또는 봉준 어머니가 누구인지 몰랐던 까닭에 그런 꼴을 보거나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별로 흥감이 없었습니다. 그리다가 차츰 한입 건너 두입 건너 전하는 말을 듣고 또 직접 봉준 어머니가 미친 이처럼 지껄이는 모양과 말에서 봉준 어머니의 생애를 알게 된 뒤로는 그를 보는 때나 그의 말을 듣는 때마다 나로도 알 수 없이 가슴이 쯔르르 하였습니다.
실상 내가 그의 말로를 끔찍하게 보게 된 것도 그의 생애를 안 까닭이겠지요. 그러지 않아도 비참하고 무서운 그의 말로는 그가 밟은 쓰라린 사실이 있는지라 더 힘 있게 나의 머리에 박이어서 좀처럼 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그의 말로를 쓰려는데 이르러서 그것을 더욱 힘 있고 인상이 깊게 하기 위하여 먼저 그의 지난 일부터 쓰려고 합니다.
3
“세상은 괴롭다. 사람은 무상한 것이다” 하는 것은 누구나 항례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때에는 이 말을 그리 큰 느낌 없이 말하지만 한번 괴롭고 쓰린 환경에서 헤아릴 수 없이 변하는 물결에 쪼들리는 인간을 볼 때면 “세상은 괴롭다. 사람은 무상한 것이다” 하고 입으로만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몸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우리와 처지를 같이 한 사람이면 그 느낌은 더 굳세어져서 바로 내가 당하는 듯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봉준 어머니를 생각하는 때마다 그렇습니다.
봉준 어머니는 그때 남양역에 간 지가 열한 해나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강원도 어떤 산골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삼십이 가까워서 봉준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 봉준이가 여덟 살 났을 때에 그의 남편, 즉 봉준 아버지가 남양역에 가서 노동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봉준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농사도 짓고 닭도 쳐서 겨우 살아가면서 한달에 한두 번씩 오는 남편의 편지를 무상의 기꺼움으로 받으면서 삼았습니다.
……가을에는 간다, 봄에는 간다 하였더니 가을이 되고 봄이 되어도 바라는 돈은 손에 들어오지 않는구려. 그래도 그립지 않은 바는 아니나 봉준의 생각이 가슴에 맺히어서 참말 한시가 새롭소. 여름은 어떻게 지냈으며 겨울은 어떻게 나는지 천리에서 돌아가는 구름에 죄일 뿐이요.
집을 나설 때는 한 푼이라도 모아서 남의 빚을 갚고 그놈의 돈단련 없이 편안한 백성이 되렸더니 어이 그렇게 되어야지요. 아무쪼록 봉준이를 데리고 과히 걱정치 말으오·……
봉준 어머니에게 가는 봉준 아버지의 편지는 대개 위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돈 몇 원씩 보내었습니다.
돈이 오고 편지 올 때마다 봉준이는,
“엄마, 아버지 계신 데는 어디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저 남양역이란다” 하고 봉준이가 귀여워서 웃었습니다.
“남양역이 어딘가?”
“응, 저 백두산 있는데…… 아주 하늘 지경 밑이란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가겠어요.”
말끝에 이러한 어린 봉준이의 말이 나오는 때마다 그 어머니는 한숨을 지었습니다. 그러니 그 어머니의 남편 그리는 마음은 얼마나 하였겠습니까. 눈이나 뿌리는 때면 남편이 춥게나 자지 않는지, 비 오는 때면 남편의 옷이 젖지나 않는가? 갈바람 낙엽 소리에도 남편이 오는가 잠을 깨고 달밤 기러기 소리에도 눈물로 밤을 새웠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흐르는 물같이 가고 올 줄 모르는 세월은 오 년이나 되어서 봉준이의 나이 열두 살이나 되였습니다. 이렇게 봉준이가 열둘나던 해 봄이었습니다. 닥쳐오는 불행한 운수는 드디어 큰 자국을 내었습니다. 그것은 봉준 아버지가 관격이 되어서 죽었다는 부고였습니다. 모든 괴로움과 억울을 참으면서 오직 그 남편의 금의환향을 바라던 봉준 어머니의 가슴은 어떠하겠습니까? 두 모자는 소슬한 가을바람 속에서 쓸쓸히 부닥치는 낙엽같이 서로 잡고 울다가 빌어먹기로 결심하고 길을 떠나서 일삭 만에 남양역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작년으로부터 십일 년 전에 남양역에 갔습니다.
끓어 부푸는 물과 같이 열도가 극하면 전후를 헤아리지 않고 끓어오르다가도 한번 어떠한 정도에 이르러서 떨어지게 되면 그만 식어져서 전후를 돌보게 되는 것이 사람이 마음이라고 할는지요. 처음에는 그립고 아쉽고 원통한 마음에 설움이 극도로 북받치어서 죽기 살기를 잊어버리고 두 모자는 빌어먹으면서 남양역까지 갔으나 정작 다다라서 무덤을 보니 눈물밖에 별수가 없었습니다. 생활이라는 무서운 위협은 뒤를 이어서 두 모자의 머리를 굳세게 눌렀습니다.
물정에 서투른 봉준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그 남편이 일하던 노동판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로 사정한 결과 봉준이를 노동판에 넣기로 하였습니다.
어린 봉준이는 처음에는 장정들의 심부름으로 지내다가 차츰 세월이 가서 열육칠 세가 되면서 장정들과 같이 곡식 섬을 메었습니다. 처음에는 퍽 괴로워하여서 하루 일하고는 하루씩 몸살을 하였으나 점점 단련이 되어서 일을 곧잘 하였습니다. 원래 위인이 순박하여서 퍽 부지런하고 영리하며 말을 잘 들었으며, 또 그 어머니도 여러 노동자들께 친절해서 봉준의 모자는 노동자의 후대를 입었습니다. 겨울에 날이나 추운 때면 봉준 어머니는 늘 토장국을 끓여다가 노동자들께 권하였습니다.
이렇게 지내다가 봉준이가 열아홉 살이 되어서 겨우 온전한 일꾼이 되고 또 그 어머니의 팔자도 페일 만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이른 봄 아직도 겨울 추위가 남았는데 노동자들은 영림창서편 두만강가로 나무 실으러 갔습니다. 물론 봉준이도 그 축에 끼었습니다. 여러 노동자들은 도로꼬를 밀어다놓고 산더미같이 쌓아논 ‘무투’ 를 목도에 떠서 도로꼬에 실었습니다.
“치기영, 치기영, 영치기” 하면서 여러 노동자들은 두서 발 되는 아름드리 나무를 목도에 떠메고 미끌미끌하고 휘청휘청하는 높다란 발판으로 올라가서 도로꼬에 길이로 탕탕 싣습니다.
이렇게 목도를 (커다란 나무 양옆에서) 멘 것을 보면 지네나 노래기의 발같이 사람이 조르르 선 것이 재미있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우리네처럼 직접 당하게 되면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휘청거리는 발판으로 올라갈 때면 아주 다리가 떨려서 칠성판에 선 것 같습니다. 그저 돈이지요. 돈! 돈! 돈!·…·그놈의 것 때문에 죽을 줄 알면서도 동지섣달 찬바람에 얼어서 발붙일 수 없는 발판으로 크나큰 나무를 둘러메고 항항하면서 땀을 뻘뻘 홀리고 오릅니다.
우리의 주인공 봉준이도 이렇게 목구멍이 포도청으로 잔약한 어깨에 그것을 메고 올라갔습니다. 그때 봉준이와 같이 일하던 친구의 말을 들으면 그렇게 발판으로 오르는데 “으악” 하는 소리가 나자 치기영 소리가 뚝 끊기면서 어깨에 붙이던 목도채가 뒤통수를 자끈 후리는 바람에 그만 미끄러지고 쓰러져서 그 높은 발판에서 떨어졌습니다. 아마 누가 실수를 해서 한 사람이 쓰러지는 바람에 모두 쓰러졌는가 봅니다.
워낙 목도라는 것은 그렇게 위태한 것입니다. 한 사람만 발을 잘못 디디어도 모두 휘우뚱거리게 되고 한 사람만 실수해도 자빠지고 뿌리여서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단속을 하고 서로 값없이 떠다니는 그 목숨이나마 주의를 합니다. 우리네가 치기영 부르는 것은 무슨 기꺼운 노래가 아니라 발맞추는 행진곡이며 서로 힘을 돋우는 구령입니다. 이렇게 목도군 놈의 노래도 알고 보면 의미가 심장하지요. 요릿집이나 강당에서 편안히 앉아서 부르는 노래보다도 살기 위하여 기를 쓰느라고 나오는 것이지요.
이렇게 여러 노동자가 발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그 크나큰 나무도 꽝 하고 언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아 나무가 떨어지는 곳에는 금방 발판으로 그 나무를 끄집어 올리던 노동자가 넷이나 치었습니다. 둘은 허리가 끊어지고 하나는 가슴이 부서지고 하나는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곧 병원으로 보내었으나 그것도 돈 없는 탓으로 치료가 불완전해서 사흘 만에 죽고 가슴 부서진 사람과 허리가 끊어진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그 가운데 과부의 외아들인 봉준이도 끼었습니다. 그의 허리가 부러져서 죽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친구가 할 때면 괜찮지만 봉준 어머니―그 늙은 노파가 체머리를 흔들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목 메인 소리로 말할 때면 참말 들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그 아들이 죽던 전말을 이야기하고는,
“에구 하느님도 무정하시지. 글쎄 내 외아들을…… 제발 여보소…… 당신네들은 이 일을 마시우! 휴…… 이게 아니면 굶어죽겠소? 제발 이 일을 마우…… 사람이 죽어도 좋은 죽음을 해야 하지. 그 몹쓸, 봉준이 죽은 것을 보던 일을 생각하면 (그는 눈앞에 그때가 보이는 듯이 몸서리를 치면서)…… 에구 끔찍두 해서…… 내가 평생 남에게 못할 짓을 안했는데 내 아들은 그렇게 죽었구려!” 하고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거짓말이야·…·우리 남편이 객사를 하구, 내 아들이 그렇게…… 그저 돈이야 돈! 나두 돈만 있어서 전장이나 많이 가지구 편안히 있었으면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소…… 휴…… 제발 당신네는 그저 처자와 부모를 생각하거든 이 일을 하지 마오……” 하고 우리더러 극히 권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그 노파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보지도 못한 봉준의 그림자―커다란 나무에 치어서 북극의 찬바람에 ‘세멘트’ 같이 언 땅에 뜨겁고 붉은 피를 흘리고 허리 끊어져 죽은 봉준의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지금도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그 그림자가―봉준이가 변하여 내가 그렇게 치인 듯이 보이는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파같이 헌 누데기에 싸여서 울고 다니실 우리 어머니의 그림자가 눈앞에 떠오르는 때 나는 그만 소리를 치고 하루바삐 그 위태한 노동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있어야지요? 밥이 라는 시퍼런 위협을 무슨 수로 면하겠습니까?
그렇게 그 노파의 내력을 안 뒤로는 나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그 노파를 무심히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의식적으로 무심히 보지 않으리라 해서 무심히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연 그 노파를 대할 때면 나의 피줄같이 켕기었습니다. 이것이 처지를 같이 한 까닭이겠지요? 다시 신식말로 하면 무산자가 무산자에게 대한 자연적 의식에서 흘러나오는 정이겠습니다.
동시에 봉준의 그림자는 나의 그림자 같고 노파의 운명은 우리 어머니의 늘그막 운명을 가리키는 듯해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식을 새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라 나와 같이 일하던 친구들은 늘 그러한 감상을 말했습니다.
4
그것이 음력으로 구월 스무날이라고 기억합니다.
새벽에는 잠잠하던 일기가 해돋이부터 바람이 나고 일기가 흐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대가리가 터진다는 남양역 바람은 간도를 거쳐서 나오는 바람이라 한번 일기 시작하면 우르릉우르릉 하는 것이 천지가 금방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눈까지 뿌리게 되면 바람발에 날리는 눈발이 낯을 쳐서 눈코를 뜰 수 없이 됩니다. 가고 오는 마소까지 문득문득 서서는 뿌연 서리를 훅훅 뽑습니다. 그래도 말이나 소는 주인이 있어서 죽이라도 뜨뜻이 쑤어주고 등에 덤치라도 걸쳐주건만 우리네 노동자야 단박 눈바람에 거꾸러진대야 뜨뜻이 물 한술인들 그저 먹을 수 있어야지요. 눈이나 오고 바람이 불면 곡식이 젖어서 돈이 손해난다고 눈을 쓸리고 ‘가방’을 씌우고 하여 우리네는 더 일하게 됩니다. 돈만 아는 이들이야 우리네 목숨보다도 콩 한 섬을 더 중히 아는 터이니 물론 그렇겠지만, 사람이 쓰려고 사람이 지어 논 돈에 사람이 부리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네 입에서 저주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그때에도 그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근추근한 콩 섬을 메어서 한쪽에서는 ‘도로꼬’ 에 싣고 한쪽에서는 철도 창고에 들였습니다.
낮이 가까워서였습니다. 그 몹시 불던 바람은 즘즉하였으나 눈은 점점 더 퍼부어서 삽시간에 세상은 뿌연 안개 속에 잠기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차츰 뼈까지 사무치던 찬 기운은 풀리고 날씨가 포근하였습니다.
점심 때에 청방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머리도 없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여전히 중언부언하는데 어떤 친구가 큰일이나 난 듯이 뛰어 들어오면서,
“여보게, 사람 죽었다네!” 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수수하던 청방 안은 금시로 물이나 뿌린 듯이 고요해지면서 “어디서” 하고 뛰어 들어온 친구의 낯을 보았습니다. 그 묻는 사람들의 낯빛은 놀라웁다는 것보다도 호기심에 흐리었습니다.
나도 그 죽음이 예사의 죽음은 아니라고 직각은 하였지만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응, 저기서 지금 기차에 치었다나?”
뛰어 들어온 친구는 찬바람에 언 뺨을 만지면서 무슨 자랑 비슷하게 말하면서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솜발 같은 눈은 점점 퍼부어서 그새 오륙 치나 쌓였습니다. 천지는 눈안개에 지척 을 가릴 수 없다시피 되었습니다.
청방에서 나서면 바로 정거장 ‘홈’ 이외다. 눈 때문에 고요하던 넓으나 넓은 마당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버글버글 저편에 있는 창고 앞으로 몰키어 갑니다. 그 앞은 바로 철길입니다. 그것을 본 나는 여러 사람과 같이 뛰어갔습니다. 창고 앞으로 몰키어 갑니다. 창고 앞에 거의 다다르니 어느새 모자에 금줄 두른 역장이며 전철수며 종차수며 순사가 쭉 모여 섰습니다. 그것을 볼 때 내 가슴은 무슨 불안이나 닥치어 오려는 때와 같이 두근두근하고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걸음이 띠지었습니다: 그리면서도 돌아가기는 싫었습니다. 그래 천척절벽 끝에나 나서는 듯이 엉금엉금 나서는데 귀결에 “쓰레기 노친!” 하는 소리가 들리자 내 가슴은 쿵 하면서 두근두근하였습니다. 무엇에 쫓긴 듯도 하고 무서운 동굴에나 이른 듯도 하면서도 호기심이 바싹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쓰레기 노친” 할 때 봉준 어머니의 그림자가 눈앞에 언뜻 하던 것입니다.
나는 창고 앞 여러 사람들 틈에 끼어 섰습니다. 지금도 그때 광경이 눈앞에 선합니다. 머리로부터 어슥히 왼가슴까지 차바퀴에 치였습니다. 그 전에는 차에 치면 도끼나 작도로 뭉턱 찍어논 듯이 된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때 그 시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절구통에 집어넣고 짓찧어 놓은 듯하였습니다. 머리는 부서져서 두부를 짓기인 듯한 얼굴이 흩어진 데 끊어진 목과 가슴으로 꽐꽐 흐르는 검붉은 피는 수북이 내려쌓이는 눈을 물들이고 녹이었습니다. 그렇게 흐르는 피는 벌써 걸어서 ‘들쭉’ 처럼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쌓이고 쌓인 원한을 가슴에 품고 한 알 두 알의 콩을 쓸어서 남은 삶을 이어가던 ‘봉준 어머니’ 였습니다. 찬 바람을 막노라고 허리에 두른 누데기와 찢기고 때 오른 의복에는 붉은 피가 점점이 묻었는데, 사정없이 내리는 눈발은 그 위에 쌀쌀히 뿌리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한시도 놓지 않던 빗자투와 쓰레받기는 선로 저편에 뿌리여서 눈에 반이나 묻히고 선로에 가로놓인 콩자루는 찢기어서 누런 콩알이 비죽이 흘렀습니다. 시체의 차디찬 손은 그 찢어진 자루의 한끝을 꼭 쥐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그 자루 쥐인 손을 볼 때 먹음이란 그렇게도 굳세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 게 떠올랐습니다.
곁에 선 순사며 역장은 이마를 찡기고 서서 무어라 중얼중얼합니다.
나는 모든 표적이 드러났건마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봉준 어머니인 것은 더 말할 것 없으나 아까 금방 그 노파를 보고 이제 그런 일을 볼 때 어쩐지 그와 같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속일 수 없는 봉준 어머니라고 믿을 때 내 손은 나도 모르게 내 가슴의 심장을 만지려고 하였습니다.
들으니 그는 기차에서 흐른 콩알이 선로에 있는 것을 보고 내려가서 쓸다가 입환하는 때에 치웠다 합니다.
넓으나 넓은 세상에는 그를 위해서 그의 시체에 손대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요히 그것을 보면서 눈을 막고 있었습니다. 순사와 역장들도 시체 치워낼 일꾼을 불러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여 섰던 우리 노동자들은 그의 끝을 보지 못하고 “어서 짐들 실어. 무얼 봐?” 하는 감독의 모진 소리에 다시 ‘홈’ 에 돌아와서 짐을 메기 시작하였습니 다.
5
그 이튿날 들으니 봉준 어머니의 시체는 철도국에서 묻었습니다. 그리고는 별 일이 없었습니다.
“유가족이 있으면 위자료 삼백 원은 줄 터이나 없으니 그 대신 우리가 장례를 훌륭하게 지낸다.”
하고 역장인지 조역인지가 의기양양하게 말하더랍니다. 삼백 원! 사람의 목숨이란 참 싼 것입니다.
그 뒤로부터 나는 이상스러운 병이 생기었습니다. 공연히 기차가 무섭고 싫었습니다. 그놈이 푸푸 뜰뜰 글러가고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진저리가 납니다. 그 바퀴에 내 머리와 가슴이 버석버석 짓이겨지는 듯한 동시에 봉준 어머니 같은 그림자가 알 수 없이 눈앞에 선히 떠오릅니다. 어떤 때는 그 그림자가 나 같기도 합니다.
그래 일하러 나간 때마다 기차를 보게 되는 것이 싫어서 그 다음부터는 정거장 일을 버리고 이렇게 치도판으로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치도판에 와도 나의 마음은 조금도 변치 않습니다. 거기도 역시 기차와 같은 것이 있어서 못 견디겠습니다. 그것은 길바닥을 다지는 ‘로라’ 인데 그 커다란 바퀴가 굴러오는 것을 보면 역시 나의 뼈와 고기가 거기에 바짝바짝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점점 다른 기계까지 미워지고 무서워서 삽이나 곡괭이를 보아도 그놈이 모가지나 허리를 찍는 듯이 아심아심합니다. 심지어 면도칼까지도 쓰다가 서랍 속에 깊이깊이 감추어두지 않으면 반짝하는 빛이 이상하게도 눈앞에 떠올라서 잠을 못잡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처음에는 무서워지더니 나중은 그만 부셔버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늠은 ‘로라’ 나 기차는 더 말할 것 없고 조그마한 기계를 보아도 그만 부셔버리고 싶어서 이가 갈리고 주먹이 쥐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내 눈앞에는 내 앞길이 보입니다. 노동자로서의 내 앞길이 활동사진같이 살아 뜁니다.
오오, 붉은 나의 피여!
-끝-
2016년 11월 14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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