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과 양식의 퓨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비스트로
퓨전 음식
어쩌다 가족이 외식을 하게 되는 날은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하느라고 늘 망설이게 된다.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이나
아내는 싫어하는 음식이 많아서다. 그래서 식당을 결정하는 것은 주로 딸의 몫이다. 우리 식구의 식성도 잘 알고 있거니와
맛은 물론 분위기 좋은 집도 많이 알고 있다. 단지 내 주머퓨전음식니 사정을 봐주지 않는 게 단점이다. 오늘은 우리를
청담동의 어느 조용한 골목으로 안내한다. 요즘 유행하는 퓨전 레스토랑이다.
메뉴를 보니 참 기발하고 재미있다. 딸의 설명 없이는 주문하기 어려운 음식들이다. 막상 눈앞에 나온 음식들을 보니
가관이다.
오리고기는 버섯볶음 속에서 아장거리고, 장어는 마요네즈와 식초 소스로 버무린 양배추 속에 누워서 못마땅한 듯 샐그러진
눈으로 흘겨보고 있다. 일본 된장을 발라서 튀긴 치킨은 입은 비쌔면서도 내심 흡족한 표정이다.
소 안심과 바닷가재는 서로가 최고의 몸값 겨루기를 포기했는지 한 접시 안에서 다정하다. 벌겋게 구워진 돼지 삼겹살은
시운(時運)이 좋다. 언감생심이지, 어디라고 감히 어울릴 수 있을까. 생선회 옆에 넙죽이 앉아 어깨에 힘을 주며 보란 듯이
우쭐대는 표정이라니. 광어는 창피해서 입을 샐쭉거리고 있지만 된장, 간장에 버무린 채 묵은 김치 속에 파묻혀 버린 광안리
횟집의 도미보다야 체면은 덜 구겨진 편이다.
조그마한 새우는 햄과 감자로 둘둘 말려 꽁지도 보이지 않는다. 왕새우는 폭염에 선탠한 아가씨들처럼 벌겋게 달구어져
온몸이 고추장 소스에 범벅되어 있다. 콩기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나온 돈가스에는 된장 소스가 얹혀 있고 이탈리아식
군만두에는 참깨 소스가, 그리고 누룽지에는 게살 소스가 별처럼 뿌려져 있다.
국적 없는 퓨전음식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무어랄까.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멋도 있다. 아침 이슬처럼 싱그럽기
조차 하다. 어디서 왔는지 근본도 개의치 않고 귀천도 따지지 않으며 서로의 미모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국적 자유주의
자들의 원탁 회의장 같다. 새콤달콤 각기 독특한 맛을 내면서 격의 없이 놓여 있다. 윤기가 자르르 살아 있고 응집(凝集)하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룬다.
퓨전음식을 보고 있자니 비빔밥 생각이 난다.
비빔밥에는 시금치, 콩나물, 상추, 도라지, 오이, 호박 등속의 나물이 장수곱돌 속에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나물 하나하나는
모두 이름 있는 집안이지만 잘게 썰어 다른 나물들과 어우러져 있으니 장삼이사(張三李四), 똑같은 신세가 되어버린다. 자신의
독특한 맛을 내보지도 못한 채 볼품없이 놓여 있으니 자존심을 버린 지도 이미 오래일 것이다. 게다가 새빨간 육회나 다리를
꼰 낙지가 그 위에 턱 올라앉거나, 달걀노른자 위로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는 날에는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러다가 고추장이 들어와서 밥과 나물이 어우러지면 위신이 서고 진가를 발휘한다. 영양가도 으뜸이라는 칭찬까지 듣는다.
거기에 참기름이 한두 방울 떨어지는 순간, 맛은 절정에 이른다. 미각과 시각의 으뜸가는 조화요 종합예술의 걸작이다.
골동이란 여러 물건을 어지럽게 한데 섞는 것을 뜻한다. 골동반(骨董飯)이라 했던 비빔밥은 이렇게 비벼져야 제맛이 난다.
퓨전요리와는 달리 섞여지면서 더욱 맛을 내는 게 비빔밥이다. 비벼져 뒤죽박죽 서로 뒤엉켜야 신이 나고 맛이 나는 음식,
혼자 있으면 볼품없이 조용하다가도 서로 어울리고 엉클어지면 ‘붉은 악마’처럼 한몫을 하는 우리 민족성과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퓨전음식을 보면 신세대가 떠오르고 비빔밥을 보면 기성세대가 생각난다.
퓨전음식은 화려한 접시 위에서 귀족적으로 보이지만 어찌 보면 권위와 체면을 벗어던진 순수한 서민의 모습도 잃지 않고 있다.
이국적인 듯이 보이면서 토속적인 면도 배척하지 않는다. 가식 없이 너무 솔직하고 뚜렷하여 섬뜩하기도 하지만 깔끔하게 다듬으
면 기품도 있어 보인다. 발랄하고 매혹적이면서도 야하지 않은 외모다. 풍부한 상상과 창조력으로 자유롭게 변신하는 퓨전음식,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를 지키며 맛과 멋이 함께 어우러진 조화에서 나는 활력을 되찾는다. 사고방식도, 선과 악도, 역사와 전통도
뒤범벅이 되어 헷갈리는 요즘이지만 개성을 살리며 자신 있게 현신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삶의 식탁을 그려보게 된다.
퓨전음식을 보면 그 이질적인 것의 화합 때문인지, 독특한 맛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나의 미각은 그쪽으로 더 끌린다. 비빔밥
처럼 비비지 않아도 상큼한 맛을 내는 퓨전음식을 나는 앞으로 즐겨 찾게 될 것 같다.
첫댓글
그렇지요
요즘은 외식에서 다양하게 즐 길 수가 있지요
청송 님의 외식 한자릴 함께 엿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