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헤어지고 나서 강가에서 나는 서성거렸다
물결의 악보 위로 조곡 같은 바람이 흘러왔다
물과 물 뒤섞이는 소리 발끝에 젖고
눈빛이 저녁 햇살에 잠시 붉어졌다
강물 따라 흘러가는 노래는 조금은 슬프리라
강에서는 고기들이 햇살을 마시려 뛰어오르고
물 속의 돌들은 자갈자갈 모난 가슴을 씻어내리라
물풀의 풀결을 간질이며 노래처럼 흘러가고
그대는 이미 떠났고 푸른 저녁이 왔다
랩소디 같은 나직한 물의 노래가
물결의 악보 위로 겹쳐져
흰 모래밭 발자국마다 소복소복 쌓였다
모래 속에는 영혼이 눈을 뜨고 반짝이고
밤이면 손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리라
동화 속의 전설에서 나는 사랑에 귀가 먹고 눈이 멀었지만
나는 노을강가에서 그대의 이름을 부르며 흘러갈 것이다
바다까지 흘러가 섬이 될 것이다
그대는 이 강을 따라 떠났고 물결처럼 남은 사랑만이
내 가슴에 와 뒤척인다 은밀하게 상처 속에 남아있는
고독은 미루나무 숲 그늘 아래 서성이게 하리라
밤새의 울음이 적막하게 둥글어지고
나는 나무의 저쪽에서 또는
물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를 듣는다
내 사랑은 아직도 강가를 서성인다
마루 밑,
누렁이가 새끼 낳으러 들어가기도 하고
쥐약 먹은 누렁이 거품 물고 뻘건 눈 부라리며
서서히 죽어가던
마루 밑,
햇살이 닿지 않아 더 어둡고 서늘하고
왼손잡이 할아버지 꾸불꾸불한 지팡이와
고집 센 검정 소 목덜미에 얹혔던 멍에
삐딱하게 떠받고 있는
마루 밑,
허물 같은 생의 거처는 남아있는가
뭉툭한 호미 날이나 부러지고 이 빠진 낫 모질뱅이 숟가락 깨진 대접 볼펜에 끼워 쓰던 몽당연필 눈알 같은 유리구슬 국어책 겉장으로 접은 딱지 몸통뿐인 기타 무궁화꽃이 선명한 1원짜리 하얀 동전 어머니한테 대들다가 떨어진 것 같은 단추 빠져 들어간
자전거를 타고
한철 약수터에 오르다가
물소리를 들었다 순간적이었다
계곡 한 편으로 동행하는 길들이
물소리에 출렁거렸다
바람이 나무에 부딪혀 출렁거리고
나무가 출렁거리고 쓰러져 누운
내 몸 위의 하늘이 출렁거렸다
지구자 나뭇잎 같은 구름이
구름의 길을 가고 있다
자전거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는지
빈 바퀴를 돌리고
물소리는 내 몸을 뚫고
펌프질하는 왼쪽 가슴께에 닿았다
숨소리가 물소리처럼 흘러나왔다
몸이 흔들리고 길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것이 길뿐이랴
한철 약수에 오르려는 몸짓 하나가 다시 쓰러진다
몸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물소리
몸 밖으로 흘러가는 물의 변주곡을 듣는 동안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몸 위로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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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림 / (본명 허병직) 1960년 강원 홍천 출생. 강릉대학교 영문과 졸업.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2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