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
임춘희
“다음 방학 때 또 올게.”
“으~~응, 잘 가래이.”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는 그 아이. 뒤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목을 길게 빼서 내다본다. 동구 밖으로 점점 멀어져 콩알처럼 작아 보일 때쯤 난 시선을 땅으로 푹 떨궈 버린다. 눈 속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흙 위에 툭 떨어진다. 사학년 짜리 초등학생이 다음 해 여름방학 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 소 풀 베던 손길을 멈추고 멍하니 있다가 죄 없는 땅바닥만 쿡쿡 찔렀다.
그 아이는 서울에 살았다.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 동네에 사는 고모네 집으로 놀러 왔다. 코가 우뚝하고 쌍꺼풀이 진 둥그런 눈 하며 구불구불한 곱슬머리에다 하얀 피부까지 어느 곳 하나 미운 데가 없다. 온 여름 내내 햇볕에 그을린 내 피부와는 달리 유난히 흰 피부를 가진 그 아이가 자꾸만 귀하게 여겨진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까지 한몫해 내 마음을 쏙 빼앗아 간다.
나는 종일 그 아이 생각에 빠진다. 같이 놀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도 그 아이 생각을 했다. 파란 달빛이 우리 방문을 비춰 줄 대도 그랬다. 새벽기도 시간을 알리는 예배당 종소리에도 그 아이의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행여나 나 아닌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면 애가 달았다. 더군다나 나와 단짝인 뒷집에 사는 친구와 놀고 있으면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그 아이는 다정했다. 그래서일까. 동네 아이 누구하고도 사이좋게 지냈다. 내심으론 나하고만 놀았으면 싶은데 속마음을 전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혼자서 끙끙대다 친구들에게 투정을 부린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심술을 부리는 나를 동네 친구들은 다행히 개의치 않았다.
평소엔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개울에서 멱을 감았는데 서울 아이가 온 후로 한 번도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떤 놀이에든 용감한 나였는데, 부끄러움이 거센 썰물처럼 나를 덮친다. 다른 친구들은 개구리처럼 자연스럽게 잘도 뛰어드는데 말이다. 숨바꼭질할 때도 그 아이 뒤만 따라 다녔다. 서울 아이가 술래가 되면 내가 대신 친구들을 찾아 주었다. 행여 낮선 동네에서 길을 잃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숨지 않았다.
그 아이는 소를 몰고 풀 뜯기러 가는 나를 보며 놀라워했다. 큰 소가 자그마한 여자아이 말을 잘 듣는 것이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소고삐를 풀어 준다. 마음껏 풀 뜯어 먹으라고 산에다 놓아주고 친구들과 이산 저산 쫓아다녔다. 피부가 가시에 긁혀 따끔거려도 그 서울 아이와 함께 라면 즐겁기만 했다. 그것뿐인가. 산딸기와 개암, 머루, 다래 등을 따 먹으며 깔깔거렸다. 그 아이도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 다녔다. 생전 처음 보는 열매라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신기해서 자꾸만 따다 줬다.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이 서쪽 하늘로 기울어졌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그 아이의 얼굴도 붉어졌다. 집집마다 모락모락 저녁연기가 피어오를 때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어느새 소도 부른 배를 내밀며 우리 곁으로 슬슬 다가왔다. 배도 부르고 해가 졌으니 집으로 가자며 커다란 두 눈을 껌벅거렸다.
친구들과 나는 소를 앞세우고 한 줄로 서서 산에서 내려온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합창한다. 산골마다 퍼지는 우리들의 노랫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멀리멀리 퍼졌다. 그 아이도 나와 친구들을 번갈아 보며 환한 얼굴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처음 소를 보고 겁내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젠 소를 쓰다듬기까지 한다.
방학 동안 추억을 함께한 그 아이는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편지 하라는 말을 남기고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뾰족한 돌멩이로 주소를 적어 줬다. 부끄러워 제대로 읽지 못하고 다른 친구들이 떠난 뒤 한참을 지나 그 자리로 갔지만 짓궂은 친구가 발로 뭉개 버린 뒤였다. 허탈한 기분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둥둥 떠가고, 흰 두루미 한 마리가 소나무 위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타까워하는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그 아이가 보고 싶다. 다음 여름방학 때 온다던 아이는 그 후로 소식이 없다.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는 나처럼 중년의 길목을 깊게 들어섰을까. 구불구불하던 곱슬머리에 어설프게 서리가 내렸을까. 꼭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
첫댓글 선생님들 무더위가 하도 기승을 부려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해 드릴 수 있으려나?
하면서 얼라 같은 글 올립니다.
문학이 아니더라도 잘 봐 주시이소.^*^
아름다운 글입니다. 빼어난 감수성으로 때묻지 않은 첫 순정을 그려낸 수작입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비교할 만 합니다. (농담 아님).
내가 영화 감독이라면 tv문학관 한편 찍고 싶어요~!^^
공감이 갑니다.아름다운 소시적
이야기가 꼭 제이야기 같습니다.
또 써 주시소.동시대의 이야기는 읽는이의 감성에 홍시하나 얹어 줍니다.
@정임표 항상 제 글에 대해서 점수 낫게 쳐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숙 온 ( 서해숙) 숙온 선생님도 그랬습니꺼?
서툴은 글이지만 가끔 올리겠습니다.^♡^
아름다움이 있는 작품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더위 잘 보내십시오.^^
선생님께서 아름다움이 있는 글이라고 하시니 부끄럽습니다만 감사 합니다. 항상 건강 하십시오.
역시 글 잘쓰시는 선생님의 감성은 저와는 너무 다르네요. 우리반에도 서울에서 전학온 남자애가 있었는데 얼굴이 뽀얀지 까무잡잡했는지 기억도 없어요. 무관심이었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성격이 너무 드라이하다고 남들이 말하니 이런 서정적인 글이 나올리 없지요.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은 기분 ㅋ
언제나 참꽃 같이 연하고 보드라운 조경숙 선생님~~특히 목소리가~~칭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경숙 선새엄 저는 사니라꼬 바빠서 황순원의 소나기 읽어 보지 못했거든요. 이번 기회에 그 작품 꼭 읽어 보겠습니다.
아름다운 글입니다 금방 읽어 내려갔습니다 아쉽습니다
다른 내용이 계시다면 또 올려 주시면
이 무더위도 행복할것 같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봐 주신다니 고마워서 꼭 밥 한 끼사드리고 싶습니다. ^♡^
임춘희샘.
닐씨도 더운데 우리 이거 첫사랑 시리즈로 나가봅시다.
<첫사랑 시리즈 1> 그 아이로 질러 주세요.
남학생, 여학생 벌떼같이 달려들 겁니다. ㅎ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그리 해 보겠습니다.
헉. 저는 첫사랑 없는데요. ㅋㅋ
@조경숙 선생님 맞지예? ^♡^
임춘희 선생님의
첫사랑 잘 보았습니다.
두 번째 바톤 제가 받겠습니다. ㅎ
예. 선생님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