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찬 사오는 불법이 다하는 말법시대가 오면 벽지불이 되기로 결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노력에 박차를 가할 때마다 이러한 이전의 결심은 깨달음을 향한 진보를 방해했다. 이와 같은 결심은 이 생애 안에서 고(苦)의 소멸을 실현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영겁의 세월을 죽음에서 죽음으로 윤회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해 그 결심을 포기하고 궁극의 도달점을 현생으로 앞당겼다. 그 때부터 그는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꾸준히, 그리고 더 빠르게 진보하였다. 그러나 아찬 사오는 남을 가르치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 아마 자기의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남을 가르치는 데는 관심이 별로 없는 벽지불(辟支佛)이 되려는 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결심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 결심이 그만큼 단호하거나 완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찬 문 역시 완전히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되기로 결심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아찬 자신으로부터 이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두타행 스님으로 편력(遍歷)을 시작했을 때 그 결심을 버렸다. 그러한 결심의 이행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마주쳐서 수많은 생사윤회의 방랑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찬 사오의 경우에는 수행 초기에 열심히 수행을 할 때마다, 자신이 이전에 결심한 대로 수행이 잘 진전되고 있는지 점검하느라고 주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심을 버리기로 마음먹은 이후에는 정신적인 부담을 덜어버리고 꾸준히 도법(道法)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진할 수 있었다. 그가 그러한 결심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 결심이 아직 번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확고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행 초기에 아찬 문과 아찬 사오, 두 선사는 북서쪽에 있는 여러 마을과 지방을 함께 편력하며 다녔다. 그들은 비록 성격과 기호는 달랐지만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아찬 사오는 말을 조심했기 때문에 가르침을 줄 때에도 간결하게 말했다. 그의 마음은 아찬 문처럼 쉼 없고 역동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체험도 적었고 가르침에 대한 관심도 적었다. 그는 설법을 해야할 때마다 해야하는 말을 몇 문장으로 축약했다. 여기에 그 예가 있다. “여러분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만 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금수보다 우월합니다. 금수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금수(禽獸)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어 금수의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마친 후, 상단(上檀)에서 내려와 아무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의 숙소[kuti]로 돌아갔다. 그것은 하루에 몇 마디 정도밖에 말을 하지 않는 그와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그의 행동은 정말로 모범적이어서 몇 시간이고도 좌선(坐禪)에 들어,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경행도 수 시간 동안 계속 지속되었다. 그의 인격과 품행은 훌륭하고 고귀하여서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아찬 문처럼 아찬 사오도 따르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많았다. 두 선사는 모두 서로를 존경했고 친분이 두터웠다고 알려져 왔다. 초기에 그들은 우기(雨期) 결제철에 상관없이 함께 거주하고 여행하였다. 그들이 다른 장소에 살게된 것은 오랜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살았기 때문에 자주 서로를 방문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각자 제자들이 너무 늘어나서 그들에게 거처와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건강에 대해 걱정했고 상대방의 제자가 문안드리러 올 때마다 서로 안부를 묻곤 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제자를 보내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주위의 스님들 가운데에서도 서로에 대해서 언급할 적에는 항상 그 사람의 덕에 대해 존경과 호의를 표했다. 절대로 나쁜 의도로 서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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