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하면 우리는 루브르, 에펠 탑, 몽마르트, 물랭루즈 같은 명소와 루이뷔통, 샤넬, 기라로쉬 등 명품 브랜드 등을 먼저 떠올린다. 바게트, 크루아상, 마들렌, 샹파뉴로 대표되는 프랑스 음식문화에도 이젠 제법 익숙하고 나폴레옹, 드골, 소피 마르소, 지단 등 위인과 스타도 잘 알고 있다. 지성, 문학, 예술, 사상, 바캉스와 식문화로 세계를 선도해온 프랑스는 문화 강대국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프랑스가 ‘과학기술의 나라’라는 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최초의 직업적 과학자가 탄생한 나라 프랑스는 천부인권, 자유, 평등의 이념과 여성 해방의 논리를 만든 나라인 한편, 과학자, 엔지니어와 기술관료들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근대화의 모델을 만든 과학기술의 나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과학자가 하나의 직업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덕분이다. 프랑스에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직업적 과학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프랑스 과학기술 발전사를 살펴보면 ‘과학아카데미’라는 단체가 나오는데, 이 단체는 과학자를 존중했던 루이 14세의 전폭적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국왕의 관심과 지원 덕분에 과학아카데미 소속 과학자들은 왕실로부터 급여를 받으며 과학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이들이 최초의 직업적 과학자다. 과학자와 달리 좀 더 실용적 기술을 개발하는 전문가가 엔지니어인데, 엔지니어라는 용어도 프랑스에서 처음 상용화됐다. 엔지니어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엥제니외르(ingenieur)는 16세기에 만들어졌는데, 화포나 전쟁 도구를 뜻하는 앙젱(engin)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앙젱은 라틴어의 ingenium에서 온 말로, 신에게 부여받은 재능(talent)을 뜻한다. 재능이란 말에서 전쟁 도구란 말이 생겼고, 이 도구를 잘 다루는 사람을 ‘엥제니외르’라고 불렀다. 첨단 과학기술 분야가 대부분 전쟁 무기나 군사과학에서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특히 발전한 우주, 항공, 핵 분야는 군사기술과 첨단과학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학교이자 고급 엔지니어 양성소인 에콜 폴리테크니크(국립이공대학)는 사관학교다. 이 학교가 엘리트 학교로 부상한 것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에 의해서다. 나폴레옹은 1804년 황제에 즉위하며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제국사관학교 지위를 부여하고 ‘조국과 과학과 영광을 위하여’라는 교훈(校訓)을 하사했다. 프랑스 최고 전성기를 연 나폴레옹은 “과학은 가장 존경할 가치가 있고 문학보다 위에 있다”고 말했을 정도로 과학을 존중한 지도자였다. 오늘날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은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으며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국가연구소, 공공기관, 고위 관직 등으로 진출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프랑스가 얼마나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나라인지 알 수 있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과학기술 전통을 존중하는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진취적 문화를 가진 사회다. 프랑스는 창조성과 이성을 근간으로 하고 과학기술이 사회의 중심을 이루는 과학문화를 갖고 있다. 과학은 인간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과학정신이 발달하고, 인간 중심의 합리적 문화가 뿌리를 내린다. 과학과 문화의 공통점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성에 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만들어냄으로써 삶의 방식이 변화하고 삶은 진화한다. 발명과 발견에 의해 추동되는 과학기술 발전은 물질적으로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 인간의 문화는 그렇게 진화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온 프랑스는 과학이 문화를 선도하는 선진사회의 전형이다. 프랑스는 과학기술 사회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문화예술의 나라다. 과학기술이나 문화예술은 삶의 질을 높인다는 궁극적 목표에서 서로 만난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발명된 백신, 영화, 테제베 고속열차는 프랑스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삶의 질을 높여주었다. 백신의 발명으로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고 수명이 늘어났고,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함으로써 프랑스인들은 삶을 모사하고 감상하는 새로운 문화를 갖게 되었다. 기술과 감성, 스토리와 연출이 한데 녹아 있는 종합예술인 영화는 과학기술 없이는 출발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한국형 고속철도 KTX의 기술 기반이 된 테제베(TGV : Train a Grande Vitesse, 고속철도라는 뜻)는 평지에서 평균 시속 300㎞ 이상을 주파하면서도 객실 안에서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흔들림이 없다. 시속 300㎞의 열차에서 편지를 쓴다는 것은 과학 발전이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적 삶이다. 저온살균법인 파스퇴르공법이나, 1895년 앙드레 미슐랭(미쉐린)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공기주입식 타이어도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프랑스에서 과학기술 발전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창의력을 높여주기도 했다. 미래를 꿈꾸게 하고 상상력을 넓혀준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나 <해저 2만 리>는 프랑스 과학문화의 산물이다. 그는 이미 1800년 대에 원자력 잠수함, 해저 여행, 달나라 여행 등을 상상하며 모험소설을 썼는데, 그의 공상은 다음 세기에 실현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기술 발전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상상력에 바탕을 둔 공상과학소설이 다시 과학 발전을 추동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나게 된다. 프랑스인들은 발전된 과학기술을 문화로 정착시키는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과학발전의 역사와 성과를 전시하고 이를 문화로 향유한다. 1793년 세계 최초의 자연사박물관을 개관했고, 1867년 파리에서 첨단 과학기술 성과를 전시하는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나폴레옹 3세가 개최한 이 만국박람회 때 사진작가가 열기구를 타고 파리 상공을 날며 사진 촬영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이 되던 1889년에는 에펠 탑을 세웠다. 20세기 들어 1986년에는 파리의 도축장 자리에 산업관, 플라네타리움, 어린이 시테관 등을 한 곳에 모은 체험형 과학관 라빌레트 산업과학관을 건설했다. 박물관이나 과학전시관은 그들에게 발전된 기술문명을 익히고 이를 문화로 받아들이는 학습공간이다.
과학은 변화의 동인이자 합리적 문화 토대 프랑스에서 과학은 사회문화를 변화시키는 근본 동인이자 합리적 문화의 토대다. 과학과 문화 발전의 선순환 구조를 위해서는 과학이 자연스럽게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과학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과학과 교육과 문화는 사회의 근본적 가치나 지향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유네스코가 과학, 교육, 문화로 연결된 것은 이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문화는 포괄적 의미에서 한 사회나 사회집단을 특징짓는 정신적·물질적 특징의 총체다. 문화는 예술, 문학뿐 아니라 삶의 양식, 인간의 근본적 권리, 가치체계, 전통과 신념을 포함한다.” 사회과학자들은 보통 문화를 광의의 개념과 협의의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넓은 뜻의 문화는 유네스코의 정의처럼 ‘인간이 역사적으로 만들어온 유무형의 모든 산물’이고, 좁은 의미의 문화는 정신적 영역만을 가리킨다. 일상에서는 이 두 가지가 혼용되고 있다. 칸트가 문화를 “자연의 보호상태(에덴동산)에서 자유의 상태로의 이행”이라 정의했을 때, 그는 인간이 자연이나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역사적으로 만들어낸 과학, 기술, 법률, 종교, 가치, 학문, 도구, 건축물 등 모든 것을 문화로 간주했다. 이 경우 과학과 기술은 문화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므로 과학과 문화 사이에는 어떤 장벽도,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협의의 문화는 형이상학적 측면을 가리키므로 물질문명과 대칭된다. 문명이 기계나 발명품 등 기술의 산물로 이루어진 이기(利器)라면, 문화는 인간의 감성과 가치를 고양시키는 정신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문화비평가는 문명은 비행기, 전화, 자동차 등 삶의 속도를 증가시켜주는 것이고, 문화는 삶의 속도를 늦춰 여유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슬로푸드, 느리게 살기 등은 문화의 이런 측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화를 정신적 가치의 산물로 보는 인식의 편린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우리 언어를 보더라도 ‘물질문명, 정신문화’라는 말은 괜찮지만 ‘물질문화, 정신문명’이라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다. 이렇게 구분하고 나누고 서로 배치시키는 태도 때문에 어느새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갈라졌고, 일찍이 영국의 C.P. 스노우가 우려한 바와 같이 인문학적 문화와 과학적 문화 간의 괴리가 발생했던 것이다. 문화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래적 문화의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를 배치시키는 것은 문화의 보편성과 역사성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문화는 인간이 인식하고 존재하고 살아가는 방식의 총체다. 문화의 차이는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로 나타난다.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학기술이다. 과학은 주변 환경과 자연을 인식하는 앎의 방식이고, 기술은 과학에 근거해 뭔가를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기술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만든 것을 수용하고, 사용하고, 상용화하면서 삶의 방식은 변화한다. 과학으로 인식의 폭이 넓어지고, 기술에 의해 문명의 이기는 진화한다. 새로운 기기를 사용하면 더 멀리 보고, 더 멀리 소리를 전하고,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삶의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문화적 삶의 지평이 확대되는 것이다. 손으로 쓰는 것보다는 타자기를 사용하는 것이, 짚신을 신고 걸어가는 것보다는 자동차를 타고 빨리 가는 것이 분명 진화된 삶의 방식이다. 과학기술의 산물은 삶을 편리하게 해주고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삶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과학기술문명이 문화의 중요한 부분임을 인식하는 순간 과학기술과 문화 간 불필요한 오해나 대립은 사라진다. 과학을 문화로 받아들이고 과학이 자연스런 문화가 될 때, 과학은 문화의 지평을 넓혀주고 인간을 좀 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어준다. 바로 여기에 과학문화의 중요성이 있다. 우리가 프랑스로부터 배울 것은 문화예술만이 아니다. 과학기술이 사회문화의 변화를 이끌어온 역사와 합리적 과학정신에 기반을 둔 그들의 문화에서 우리는 과학과 문화가 융합되는 새로운 미래 문화의 전망을 읽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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