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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묵상글 (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 사랑 다지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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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 다지기
오늘 주님의 질문 곧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은 질문을 자아냅니다.
주님께서 정말 이렇게 질문하셨을까?
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질문하셨을까?
세 번 질문하신 것은 세 번 배반한 것에 대한 사랑 확인 차원이라고 쳐도,
왜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냐고 물으셨을까? 정말 주님의 질문일까?
주님의 질문이라면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주님의 질문은 베드로의 말대로 베드로가 사랑하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다지기이고, 당신 양들을 맡기기 위한 사랑 다지기입니다.
당신의 질문에 베드로가 답할 때마다
내 양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신 양들을 맡기시려는 계획인데
그것도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시려는 것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상처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던 내가 불치병으로 아이를 두고 죽게 되었습니다.
맡아줄 사람이 없으면 보육원으로 보내야 하기에
친지나 지인 가운데서 누구한테 맡기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누가 가장 나를 사랑하는지 생각할 것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아이를 가장 잘 돌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신 것은
몰라서 물으신 것도 아니고 짓궂으시기에 질문하신 것도 아니며
베드로의 입으로 거듭 대답하게 하심으로써 사랑 다지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목자요 스승이신 주님 대신 주님의 모든 양을 잘 보살필
최고 목자가 되려면 다른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게 사랑하는지, 아니 사랑하겠는지 사랑의 의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교황에게도 똑같은 물으실 터인데
그러나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지금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더 당신을 사랑할 의지가 있는지 다지기 차원에서 물으시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나한테는 묻지 않으실까요?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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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과 사랑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그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주님!
당신께서는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시고 나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레서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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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약한 의지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선을 알면서도 오히려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많이 놀라면 매사에 겁을 먹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여기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첫 만남 때 부르신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고 베드로는 세 번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맹세하고 저주하며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상처 입고 좌절한 마음이 회복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완벽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용서를 알고 믿었기에 배반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 그리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네 방법이 아닌 내 방법으로 양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너는 내 양 떼를 돌보며 네 영광이 아닌 내 영광을, 네 주권이 아닌 내 주권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내치지 않고 당신의 사랑으로 죄책감과 수치심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셨으니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서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른다는 것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계속됩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날 고해성사 때 신부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가 되신지 얼마나 되셨지요?” 저는 ‘아직도 이 모양으로 사느냐?’ 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고해 신부님께서 “신부님, 기도하시면서 열심히 잘사세요!” 하시며 격려하시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합니다. 지켜지지 못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담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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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부르클린 교우들과 함께 필라델피아 랭커스터에 있는 대형 극장에서 공연을 보았습니다. 작년에는 다윗을 보았고, 올해는 모세를 보았습니다. 3,0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극장은 입추에 여지없이 꽉 찼습니다. 5월의 날씨로는 제법 쌀쌀했지만 작년에도 보아서인지 많은 분들이 함께했습니다. 저는 공연에 앞서 버스 안에서 모세와 예수님에 대해서 공통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모세하면 떠오르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갈대 바구니에 누여서 강물에 떠내려가는 아기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물에서 건져 올린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히브리 여인의 모유를 먹으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라는 화려한 장소를 떠나 광야에서 목자가 되어 40년을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아래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모세는 말 주변이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을 잘 하는 형 아론과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기도를 마치신 후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모세를 환영하였지만 어떤 이들은 모세를 의심하였습니다. 이집트의 생활에 만족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지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권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음이 완고했던 파라오는 10번째 재앙이 와서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하였습니다. 10번째 재앙은 모든 이집트의 맏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맏배가 무사하였습니다. 양의 피가 재앙을 대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과 이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재앙이 아니라 치유를 주셨습니다. 눈먼 이는 눈을 떴습니다. 중풍병자는 걸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죽은 소녀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습니다. 모세가 기도를 하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렸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니 샘이 솟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으로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요르단의 느보산에는 모세의 구리 뱀을 형상화한 지팡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저 멀리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공연의 마지막에 모세의 지팡이는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로 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언제가 하느님의 아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 올리신 십자가로 사람들이 구원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모세는 느보산의 어느 골짜기에 묻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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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고인이 계속 생각나면서 지금 함께하지 못함이 너무 슬프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에 생활 자체가 점점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혼자일 때 편안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받았을까요? 대부분 남을 통해 받습니다. 그래서 생(生)의 철학자라는 호칭을 받는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오직 자기 자신과 완전히 융화할 수 있다. 친구와도 애인과도 완전히 융화될 수는 없다. 개성이나 기분이 다르다는 사소한 차이 때문에 언제나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그 때문에 진정한 평화이자 완전한 내면의 평정, 즉 건강 다음으로 이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는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철저한 은둔 상태에서만 지속적인 평정을 가질 수 있다.”
함께하지 못함 자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함께해도 불행하다고 말할 사람입니다. 혼자라는 상태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함께일 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처지가 갑자기 180도 바뀔 수 있을까요? 그렇게 바뀌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허황한 망상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지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혼자 있는 고독이 두렵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을 행복의 길로 연결해주는 순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모두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마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묻습니다. 그리고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라.” 였습니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이지만, 직접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을 받아들이면서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행복을 만듭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을 어린양을 돌보는 사랑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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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는 건 사랑이야. 다른 이야기들은 희미해지고 흩어지더라(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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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성인예찬(聖人禮讚)-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밤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를 나서니 반가운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가뭄으로 메말랐던 대지가 봄비에 촉촉이 젖고 있었습니다. 저절로 참 많이 나눴던 “봄비”라는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났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5
2005년도 이맘때쯤 그러니까 18년전 쓴 시입니다. 세월은 그렇게 빠르게 지납니다. 앵두꽃 하얗던게 엊그제 같은데 한 수도형제는 어제 빨갛게 익은 앵두를 다 땄습니다. 빨간 앵두하니 27년전 써놨던 “고백’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사랑합니다.
마침내 빨간 열매로 사랑을 고백하는
앵두나무
초록빛 나뭇잎 희망 사이로 수줍게 살며시
얼굴 내밀고
사랑을 고백하는 빨간 앵두열매들
부끄러워 빨갛게 물들었네”-1997.5.30.
봄비가, 빨간 앵두나무가 상징하는 바 성인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일상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성인들입니다. 두분의 익명의 성인을 소개합니다. 어느 성인처럼 살아가는 의사가 전하는, 퇴근후 방문하여 치료해준 자매님의 아들인 교구사제가 성인입니다.
“알츠하이머와 파킨스 병으로 투병중인 어머님을 평생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고 계시는 신부님을 뵐 때마다 ‘사랑’을 정말 제대로 실천하고 계심에 감탄과 존경심이 저절로 생겨나네요.”
또 저보다 1년 후배로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후 요양원에 있는 남편을 간병하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후 그 요양원에서 일하는 성녀같은 70대 초반의 자매님이 보내준 사연도 생각납니다.
“요양보호사 6개월째 제가 돌봐드리던 어르신들중 3분이 선종하셨습니다. 가슴 아픈 일은 임종을 알림에도 가족 누구도 오지 않고 화장장으로 온다며 그리로 어르신 시체를 보내라 합니다.
제가 세수부터 대소변에 전신목욕도 해드리고 죽드시는 식사도 떠드리고 말벗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려 발버둥치는 순간 포착해 안아서 올려드리며 정성을 쏟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입으시던 옷, 안경, 성경책등 유품 챙겨 박스에 보내려 하니 가족은 그저 다 버려달라고.
80세로 허망하게 가신 제 어르신 가여워 한참동안 울었습니다.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죽음은 무얼 말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 분들이 평범한 듯 하나 일상의 비상한 성인들입니다. 제게는 70대 후반에도 주방장 소임의 책임을 다하는, 또 70대 초반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일하는 영원한 현역의 농장장 수도형제가 성인입니다. 각자의 일터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수도형제가 성인입니다. 부단히 자신을 겸손하게 합니다.
유난히 성인이 많은 한국 가톨릭 교회입니다. 절의 자산이 노승과 노목이라했지만 교회의 최고의 보물이자 자산은 성인입니다. 주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주님을 닮아 참나를 살았던 성인입니다. 지난 수요일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청중을 위한 교황님의 훈화가 참 각별했으니 바로 박해시대 한국 교회에 대한 소개와 온통 성 김대건 안드레아에 대한 찬탄과 격찬의 강론이었습니다. 다섯부분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1.복음을 위한 위대한 시련.
2.항구히 그리스도를 따름.
3.복음을 완전히 살았던 분.
4.위대한 한국인의 증거.
5.모든 추락으로부터의 부활.
교황님께서 얼마나 한국교회 대해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성인들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자부심입니다. 기념, 기억하라고 있는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살라고 선물로 주신 성인들입니다.
어제 베다 성인에 이어 오늘은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입니다. 다양한 꽃들처럼 크기, 모양, 색깔, 향기가 다 각기 고유한 꽃들처럼 성인이 그렇습니다. 똑같은 성인은 없고 주님을 닮을수록 고유의 참나의 성인입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에 대한 감동적인 생애를 일부 소개합니다.
-착하고 명랑한 성격에 유머 감각까지 겸비한 소년 필립보는 ‘착한 필립보Filippo bono’로 불렸습니다. 필립보가 활동하던 당시의 유럽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속해있었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러 교회의 분열이 뒤따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교회의 분열은 가톨릭 교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그리스도 교회는 가톨릭, 루터교, 개혁교회, 영국 성공회 넷으로 갈라집니다. 바로 로마의 사도라 부르던 필립보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던 때가 이 무렵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을 하느님께 이끌고자 준 많은 충고중 일부만 나눕니다.
“젊은이들이여, 선을 행할 시간이 아직 있으니 그대들은 복되다.”
“육신을 돌보는 데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교만을 미워하라. 자주 기도하라.”
“유혹을 받게 되면 그 즉시 주님께 매달려라.”
“하느님을 등지는 사람은 쉽사리 유혹에 빠진다.”
“악습의 온상인 게으름을 경계하라.”
동료사제들과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설립한 성인에 대한 평가와 임종시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유머 감각 풍부한 성인”이라고 칭했고, 동시대 사람들에게 “매력넘치는 인품을 지닌, 사람을 저절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지닌 성인 사제”, 또 “교회 역사상 가장 명랑한 성인”으로 평가받은 성인의 생애 마지막 5년 동안 심한 병고에 시달릴 때, 성인은 벽에 걸린 십자가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참으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계시는데, 이 비천한 몸은 이런 호사스런 자리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며 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염치없는 노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원하는 자는 참으로 해야 할 일을 모르는 자입니다.”
1595년 5월26일, 성인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축복하고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숨을 거두었고, 모든 이들은 “성인께서 돌아가셨다. 위대한 성인께서 돌아가셨다” 소리쳤다 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도 인상적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베드로이고 사도행전 독서의 주인공은 바오로입니다. 두 성인 사도는 교회의 양대 기둥입니다. 오늘 말씀의 분위기에 어른 거리는 두 사도의 머지 않아 맞이할 순교의 죽음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세물음과 답은 동일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자기에게 세 번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을 확인받자,
“내 양들을 돌보아라.”
말씀하신후, “나를 따라라” 명하십니다. 아마 얼마 안남은 동안 베드로는 자나깨나 “너는 나를 사랑 하느냐?” 이 말씀을 좌우명 삼아 주님 사랑에 온힘을 쏟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가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동안 계속됐던 사도행전 제1독서도 내일이면 끝납니다. 오늘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서 심문을 받고 이어 로마로 압송될 것이며 로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담대히 선포하다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의 좌우명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다음 둘임에 분명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1ㄱ)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4,7)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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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베드로는 속상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면서 계속 물어보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지, 어떤 고통이 있을지 미리 알려 주시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물어보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 그것은 힘겨운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고자 하는 다짐입니다. 세상의 유혹들은 우리의 신앙을 위협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도록, 더 이상 천국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느님을 믿기 시작했는데 가족이 아프거나, 집에 우환이 겹치기도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좌절합니다.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알면서도 물어보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정말, 사랑하느냐?, 네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고백이 진정한 사랑에서 나오는 고백이냐?’라고 물으십니다. 신앙의 길은, 하늘로 가는 길은 꽃길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 드라이브 코스도 아닙니다. 그 길은 돌들로 이루어진 울퉁불퉁한 길이고 웅덩이로 이루어져 흙탕이 튀기는 그런 길입니다.
그런 길에 들어선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얘야! 네 앞길에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고통 말이다. 그래도 가겠느냐?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예수라는 너의 주님만으로 너는 만족하겠느냐?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겠느냐? 그 정도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당신 몸에 암이 있습니다.
갑곶순교성지에는 기도 틀이 있습니다.
기도 틀에 기도 내용을 적어 꽂아 놓으면
아침 기도와 함께 각각의 기도 지향을 하나씩
봉헌합니다.
기도 내용들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기도 지향은
투병에 관한 기도입니다.
병을 이겨내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적힌 기도 혹은 도움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저는 작년에 암을 제거했습니다.
갑상선에 붙어 있었던 암, 암 취급하지 않는 암이지만
처음 들었습니다.
‘당신 몸속에 암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말입니다.
투병하는 모든 분을 위해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전하고 싶습니다.
힘내세요. 지지 마세요. 지금까지 수많은 산을 넘어왔듯이
포기하지 마세요.
기도로써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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