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91]고향산천에 흰눈이 “사브작사브작”
‘사브작사브작’이라는 의태어는 그냥 느낌이 좋다. 지금 창밖에는 하얀 눈이 사브작사브작 내리고 있다. 천지가 빽빽하게, 시나브로 내리는 저 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불쑥 눈을 좋아하는 호주에 사는 아들도 생각난다. 그곳은 1년내내 눈이 오지 않는다는데, 이 나라에서 뼈가 굵은 녀석은 눈이 얼마나 보고 밟고 만지고 싶을까. 마음이 짜-안하다. 아침 8시부터 내리는 눈이 조금 쌓였다. 그냥 마음이 한갓져지고 바라보기에 참 좋은 눈이다. 물론 소복소복, 듬뿍듬뿍 쌓이는 함박눈이 좋기는 더 좋지만, 나는 눈을 좋아한다. 내 고향 임실은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다. 연말에는 60cm 가까운 폭설이 쏟아져 1주일도 넘게 은세계의 희열을 맘껏 누렸다. 2021년에는 눈이 거의 오지 않아 신경이 날카롭게 돋기도 했다. 오죽하면 김진섭의 <백설부白雪賦>라는 명수필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을 것인가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단상 65/수필隨筆 감상]김진섭의 ‘백설부白雪賦’ - Daum 카페.
내 고향산천故鄕山川에 눈이 내린다. 고향산천이라는 오래된 단어를 떠올리니, 예전에 ‘양김兩金’과 함께 ‘정치9단’이라 불리던 정치인이 생각난다. 운동권 친구가 그 사람만 나오면 못마땅해 “좆피리는 네 고향산천에나 가서 부르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혼자서 피식 웃는다. 지금의 정치는 엄혹한 독재가 이어지던 그 시절에 비해 어떠한가, 자문해본다. 그때보다 더 못하고 한참 뒤떨어진 것같아 못내 씁쓸하다. 아니, 정부 수반인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야당 대표는 얼굴 보기조차 싫다”며 6개월이 넘도록 회담을 한번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래, 나도 그렇다. 당신의 쌍판때기만 나오면 곧장 채널을 돌린다. 게다가 그 만면에 짓는 미소라니? 시쳇말로 완벽한‘썩소(썩은 미소)’이다. ‘굥’이든 ‘열바보’든 ‘상열이XX’든 그런 독선과 야만의 정치는 검찰에나 가서 ‘가발장관’과 함께 부리라고 하고 싶다.
제주 산간지역과 호남 서해안에 폭설이 내렸다는데, 이번에는 우리 고향을 피해갈 모양이다. 그래도 겨울에 두세 차례는 ‘대설大雪 선물’을 해줘야 내 마음이 갈데를 잃지 않을텐데, “영구 없다‘가 아니고 ”우천 재미없다“이다. 흐흐. 온종일 저렇게 사브작사브작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동영상을 찍어 보여줬으면 좋겠다. 이 눈이 내일 아침 도둑처럼 쌓이면 나는 마을 뒤 신작로를 호올로 걸으리라. 사정없이 노래를 부를 것이다. 정태춘의 <황토강으로>도 좋고, 나훈아의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도 좋고, 장사익의 <찔레꽃>, 범능스님의 <푸른 학으로> 등을 목이 터져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온통 흰 이불을 둘러쓴 봉천들판을 바라볼 것이다. 초인超人이 오지 않아도 좋다. 그런 호사豪奢가 어디 흔하랴.
‘사브작사브작’다음에 이어지는 의태어는 ‘꼼지락꼼지락’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간지럽히는 ‘사브작 눈’을 맞으며 뒷밭에 갔다. 월동식물이라는 마늘과 양파가 혹독한 추위를 이겨대며 파란색을 뽐내고 있다. 늦마늘은 보온덮개를 씌워놓았는데, 살맹이(살짝) 들춰보니 싹이 다 나있다. 이런이런, 어쩌면 이런 일이? 이 작은 미물 식물이 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못내 신기해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는 서재로 돌아와 이런저런 묵은 책들을 뒤적이며, 감탄과 감동을 하기도 하고 졸문 쓸 생각도 해본다. 눈은 지금 4시간째 하나도 흩트러짐없이 똑같은 자세로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바람이 없으므로 오후엔 산책을 나가야겠다. 왠지 마음이 느긋해지고 넉넉해진다. 나의 삶이 저 눈송이들로 하여금 갑자기 기름져진 듯하다. 자연이 준 선물이다.
의태어 <사브작사브작>과 <꼼지락꼼지락>이 생각난 것은, 추석특집 다큐멘터 1,2부로 소개된 <어른 김장하>를 유튜브에서 보고났기 때문이다. 감히 이름 석 자를 입에 올리기도 거시기한 분을 알게 돼 놀랍고 경이롭다. 이 시대에도 과연 저런 ‘성인聖人’이 있을까 싶어서다. “인생이란 사브작사브작 걸으며 꼼지락꼼지락하면 된다”는 말은 그분이 수줍게 말씀하신 것이다. 곧바로 전주 홍지서림에 전화로 김주완 언론인이 쓴 "줬으면 그만이지-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라는 책을 주문했다. 오늘도 부지런히 꼼지락꼼지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