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10일 오후 일곱 시, 방화대교 근처-
공식 일정을 모두 끝낸 부국장 일행이 마포구 도심을 지나 강변도로로 막 접어들었다. 다른 때와 달리 오산 공군기지가 아닌 김포공항에 특별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축배를 들 날도 이제 머지않은 겁니까?”
“글쎄, 아직 시기상조야.”
링컨 관용차 조수석과 뒷자리에 앉은 두 사내의 대화 속에, 지난 10여 년간 강대국 권력자들이 골머리를 썩이게 만들었던 문제의 해답이 들어 있었다. 김포공항을 거쳐 나리타 공항으로 향하는 전세기에 황룡이 타고 있으며, 나머지 두 명의 멤버가 중간 기착지에서 합류한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였다.
“워낙 여우같은 놈들이니, 이번엔 그물망을 촘촘히 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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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도로의 말미에 닿을 즈음, 길 옆 잔디밭에 주차한 마세라티 옆에 기댄 여인이 윌슨의 시선을 끌었다.
“잠깐 숨 좀 돌리고 가지.”
그의 말 한 마디에 색과 외양이 일치하는 석 대의 포드 익스플로러가 일제히 잔디밭을 점령했다.
“출국 시간까지 빠듯하지 않겠습니까?”
경호책임자가 물었다. 애당초 공군기지를 이용했다면 하지 않아도 될 걱정거리였다.
“시간은 차고 넘치네. 혼자 갈 테니 따라오지 말게.”
서영은 쯤 되는 인물이 혼자 왔다면 필시 남이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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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격식 따윈 생략합시다. 전화로 한 얘기가 사실이오?”
호텔을 나서기 직전, 그에게 걸려온 전화는 은퇴 후 자칫 파멸로 몰고 갈 뻔했던 그의 운명을 180도 뒤바꾸는 것이나 마찬가지 내용이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선 탁월한 정보력을 지니셨으니 장차 UNA가 선보일 헬리콥터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바로 그 헬기의 비행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의뢰하려는 겁니다.”
“아니 잠깐..”
윌슨이 잠시 침을 삼켰다. 군용 시뮬레이션 업체인 ‘헤이스팅스 밀리터리솔루션(HMS)'의 오너로, 한때 업계 1위에 등극하는 등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미 옛날 얘기였다. F-15K와 F-22의 시뮬레이션 경쟁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신 이후로는 한물갔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며, 주가도 전성기의 5분의 1로 추락해 있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지 않으면 안 될 판에, 튼튼한 밧줄이 내려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현실적인 장애물이 상대가 내미는 손을 약간이나마 주저하게 만들었다.
“제의는 고마운데, 베르니 당신도 잘 알 거요. 미국 정부가 당신을 얼마나 껄끄럽게 생각하는지를. 만약 우리가 손을 잡는다는 기사가 나간 뒤에 사업이 좌초하기라도 하면, 난 미국 땅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지오. 최소한 공화당이 집권하는 동안에는.”
영은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이 틀어질 경우 호주의 UNA본부 사람들과 입을 맞추는 연습까지 한 상황이라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러면 저로선 오히려 환영이죠. 선생님을 모실 명분이 생기니 말이에요.”
“날..스카우트하겠다는 거요?”
“그건 선생님 의향에 달렸습니다. 참, 이건 미리 필요할 것 같아 준비해 왔습니다.”
영은이 노트북을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요?”
“스페이오스의 비행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소스 파일입니다. 제원은 물론이고, 각종 상황에서의 비행 자료가 담겨 있습니다.”
“산업스파이들이 군침 꽤나 흘릴 물건이군요.”
“그래서는 안 되죠. 송구스럽지만 절차 하나만 거쳐야겠습니다.”
약간의 조작을 거쳐 지문 등록 화면이 나타났다. 영은이 말했다.
“여기에 선생님 지문을 등록시켜 주세요. 선생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손을 댈 경우 노트북 자체가 파괴되게끔 했습니다.”
“철저하시군.”
윌슨은 영은이 시키는 대로 엄지를 가져다 댔다. 로딩 화면이 다음 차례로 넘어가고, 메인 화면에 스페이오스 내부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한강 줄기를 따라 7킬로 남짓 떨어진 성산대교의 아래 구조물 옆으로 희미한 수증기가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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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차롄가?”
한남대교 근처를 지나는 유람선 안, 전진하는 방향의 난간에 선 남자가 중얼거렸다. ‘악마에게 자유를’이란 문구의 휴대폰 문자를 받은 직후였다. 손에 조그만 PDA단말기를 쥔 남자가 터치스크린 방식의 화면을 몇 번 두들기자, 숫자를 입력하라는 표시와 함께 시계 그림이 나타났다.
“일 분이면 적당하겠지.”
남자가 분초 입력란에 숫자 60을 입력하려는 찰나, 뒤에서 다가온 한 남자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동생! 추운데 왜 밖에서 이러고 있어? 들어가서 한 잔 하자고.”
“아, 일 좀 마저 끝내고 들어가죠.”
황룡의 해킹 전문이며 김지완이란 이름의 슈퍼개미로 위장한 리쿤이 대답했다. 일단 목표를 제거하고 나면 쌍심지를 켠 추적망이 가동될 것이기에, 완벽한 신분으로 가장해 위험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를 고향 후배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늦깎이 신혼부부가 그의 레이더망에 걸린 것은 적어도 한 달 전부터였다.
“중요한 거야?”
“무려 이백만 달러짜리 거래가 성사되는 겁니다. 이 엔터 버튼만 누르면 말이죠.”
“와우..”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나긋나긋한 여자 목소리의 전자음이 흘러나왔다. 영은과 헤어져 떠날 채비를 하는 누군가의 미래에 종말이 닥쳐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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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자기야, 폭죽이다! 저기 좀 봐봐.”
“웬 폭죽이지?”
김지완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폭죽이 하늘로 솟구친 방향을 쳐다보며 말했다. 유심히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향이 이상한데?”
다음 순간, 수 킬로 상공에서 방향을 확 꺾은 폭죽이 지상으로 쇄도했다. 남자의 눈에, 폭죽의 궤적은 전투기에서 발사하는 공대지 미사일과 유사한 코스로 땅으로 내리꽂혔다. 그리고 또한, 몇 킬로 떨어진 곳에서도 환히 보일 정도로 파편이 일어났다.
“제발 우리 회사에서 만든 것이 아니길..”
화약부문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남자가 가슴을 졸였다. 그는 결코 깨닫지 못했지만,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폭죽 모양으로 개조한 다음 GPS유도장치를 단 집속폭탄이 빚어낸 참상을 수습할 길은 없었다. 눈먼 학살자인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 소형 지대지미사일로 변신한 집속탄이 포드 익스플로러 한 대를 완전한 통구이로 만든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방화대교 남단에서 출동한 소방차 부대가 다리 위를 지나 현장으로 내달았다. 피해로 미뤄보건대, 제조업체가 어디가 됐든 상당기간 홍역을 치를 것이 분명하다고 남자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