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廣州)이씨 시조 신라 내물왕때 내사령 이자성
광주(廣州) 이씨
광주(廣州)는 경기도(京畿道)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마한(馬韓)의 일부로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쫓겨 이 곳에 남하해서 한왕(韓王)이 되어 세윤 회안국(淮安國)의 일부였다. 371년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남한산(南漢山: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이도(移都)하여 이 곳을 한성(漢城)이라 불렀고, 553년(백제 성왕 31, 신라 진흥왕 14) 신라(新羅)에게 나라를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756년(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년(고조 태조 23)에 광주(廣州)로 고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 광주군(廣州郡)이 되었다.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내물왕(奈勿王 : 제 17대 왕, 재위기간 356 ∼ 402)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본래 칠원(漆原)에 세거(世居)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신라에서 벼슬을 세습해 오다가 제56대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자 이에 불복(不服)하고 절의(節義)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太祖)가 강계(降階)하여 회안 호장(淮安戶長)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본관(本貫)을 회안으로 칭관(稱貫)하다가 940년(태조 23) 지명이 광주(廣州)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광주 이씨는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고려 말에 현달(顯達)했던 현조(顯祖)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수보(修譜)를 하게 되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빼어난 인맥을 살펴보면, 율정공파(栗亭公派)의 중시조(中始祖) 관의(寬義)는 청백리(淸白吏) 지공(知公)의 맏아들로 세종(世宗) 때 누차에 걸쳐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여 자신의 불운함을 느끼고 황야에 은거(隱居)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다가 후에 다시 송정(松亭) 김 반(金 泮)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修學)하여 학문에 정통했고, 덕행이 뛰어나 정여창(鄭汝昌)·손순효(孫舜孝)·남효온(南孝溫) 등과 같은 훌륭한 석학(碩學)을 배출시켰다. 성종(成宗) 때 와서 찬성(贊成) 손순효의 천거로 경연(經筵)에 나가 성리(性理)의 근원과 성진(星辰)의 수(度數)를 강론(講論)하자 성종이 감탄하여 율정(栗亭)이라고 친서(親書)로 사호(賜號)하고 율봉 찰방(栗峰察訪)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노구를 핑계 삼아 사양하므로 왕이 가상히 여겨 지방 수령에게 명(命)하여 여생(餘生)을 보살피도록 하고 쌀과 비단을 내렸다. 율정공 관의(寬義)의 맏아들 점은 성종(成宗) 초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77년(성종 8)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집의(執義)·사성(司成)을 역임한 후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랐다. 1503년(연산군 9)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전북 부안(全北扶安)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후에 복관되어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한성 판윤(漢城判尹)·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생원공(生員公) 당(唐)의 후손에서는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광주 이씨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 둔촌(遁村) 집(集)의 인맥이 가장 화려하다. 초명(初名)이 원령(元齡)인 집(集)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해박한 학문과 고상한 지절(志節)로 명망을 떨쳤으며, 여말(麗末) 삼은(三隱 : 포은 정몽주, 목은 이 색, 야은 길 재)과 같은 명현(名賢)들과 더불어 문교(文交)를 나누며 존경을 받았다. 1368년(공민왕 17) 당시 요승(妖僧) 신 돈(辛旽)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웃에 살고 있는 채판서(蔡判書)란 자에게 신 돈의 전횡을 비판했다가 화(禍)를 자초하는 결과가 되어 신변에 위험을 느낀 둔촌(遁村)은 노구인 아버지 당(唐)을 등에 업고 개경(開京)을 빠져나와 과거 동기(科擧同期)인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가 살고 있는 경북 영천(慶北永川)으로 은거하였다. 둔촌 부자(父子)를 반갑게 맞이한 천곡 최원도는 다락방에 이들을 숨기고 4년 동안 피화생활(避禍生活)을 돌봐주며, 가족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큰 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이 때 천곡(泉谷)의 집에는 열 아홉 살인 제비(燕娥)라는 여종이 있어, 한끼에 밥을 세 그릇씩 먹고 방안에서 용변을 보는 상전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친 행세를 하는 상전의 소행을 수상쩍게 여긴 주인마님은 이 제비라는 여종으로 하여금 염탐을 시켰다. 제비는 밥 세 그릇을 상전이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벽장 속에 두 사람을 숨겨두고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발견하였다. 만약 포살령(捕殺令)이 내려진 둔촌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양가(兩家) 모두가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기 때문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질린 여종 제비는 마님의 걱정을 덜고 또 상전의 신의와 상전 친구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하여 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듬해 둔촌의 아버지 당(唐)이 영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천곡은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놓은 영천군 나현(蘿峴: 광릉골) 모부인(母夫人) 묘 아래에다 예장을 치루었다. 1371년(공민왕 20) 신 돈(辛 旽)이 역모로 주살된 후에야 비로소 둔촌은 자유의 몸이 되어 송경(松京) 용수산(龍首山) 아래에 있는 현화리(玄化里) 옛 집으로 돌아와 초명인 원령(元齡)을 집(集)으로 고쳐 살면서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어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맏아들 지직(之直)은 1380년(우왕 6) 문과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교리(敎理)와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정종(定宗) 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올라 청백리(淸白吏) 녹선되었다. 풍애(楓厓) 지직(之直)의 둘째 아들로 세조(世祖)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인손 (仁孫)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명문(名門)의 지반을 다졌는데, 장남 극배(克培)는 성종(成宗) 때 좌리3등공신(左理三等功臣)으로 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특히 그는 항상 자기 가문의 세력이 너무 성함을 두려워하여 집안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겸허>를 설득하였고 가문이 너무 성해지면 망하는 이치를 강조하였으며, 두 손자의 이름을 겸(謙)과 공(恭)이라 지으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도리는 이 두 글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경계하였다. 세조(世祖) 때 좌익3등공신(左翼三等功臣)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랐던 극감(克堪)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監)>을 수찬했으며 <북정록(北征錄)>을 찬진하여 필명을 떨쳤다. 우정승 인손의 셋째 아들 극(克增)은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익대2등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성종(成宗) 때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국가경비(國家經費)의 식례(式例)를 찬정(撰定)하고, 동지성균관사 (同知成均館事)에 올라서는 문묘(文廟)를 증수(增修)한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좌의정으로 연산군(燕山君)의 횡포를 바로 잡으려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지인 인동(仁同) 에서 사사(賜死)당한 극균(克均)은 사약을 받고서 유실(幽室)에 들어갔다가 분통함을 참을 길 없어 다시 나와서 형관(刑官)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 백병(白病)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은 없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 반드시 임금께 아뢰라.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 죽은 넋이 너를 따라다니며 평생 괴롭힐 것이다."하고 들어가 약사발을 들이켰다. 형관이 돌아가 연산군에게 그 말 전하니 더욱 노하여 극균의 뼈를 부수도록 하명하였다. 넷째 아들)은 연산군 때 아버지 세좌와 함께 사화에 연좌되어 피살되었고, 당시 일곱 살인 맏아들 윤경(潤慶)과 여섯 살인 차남 준경(浚慶)의 형제는 귀양을 갔다. 어린 나이로 가난한 귀양살이 옷이 해지고 이와 서캐가 많아서 아우인 준경 광성군(廣城君) 극감(克堪)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성종(成宗)이 연산군의 어머니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던 날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었고, 그의 아들 수형(守亨 : 사인)·수의(守義: 한림)·수정(守貞: 수찬) 3형제가 이조(吏曹)와 홍문관(弘文館)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류자광(柳子光)이 크게 시기하여 밤낮으로 연산군을 충동하여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어느날 임금과신하들이 즐기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재상들이 잇달아 술 두 잔을 올리면 연산군도 또한 끝의 술잔으로서 재상에게 돌려 주었다. 다른 재상들은 받아서 마셨는데, 세좌는 끝의 술잔을 받아서 마시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튿날 연산군은 신하가 임금이 주는 술을 받아서 마시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하고, 또 남은 술방울을 임금의 옷자락에 흘린 것은 불경죄(不敬罪)이니 세좌를 옥에 가두라고 하명하였으며, 그의 아들, 손자들과 설날 그의 집에 세배갔던 이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세좌의 손자 연경(延慶 : 수원의 아들)은 세좌가 북방변지로 귀양갔을 때 모시고 다니며 모든 험난한 일을 다 겪었다. 그 후 조부와 숙부가 모두 화 를 입었고, 연경도 연좌되어 귀양을 갔는데 단정하고 깨끗하게 죽음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죽을 때에 갈팡질팡하여 정당한 태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그는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얼굴빛이 평화롭고 말씨가 따뜻하며 흉금(胸襟)이 쇄락(灑落)하였고, 학문은 세속의 누습을 벗어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엎지러지는 물결 같은 세상에서도 능히 우뚝 서서 시종 불변하였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3년이 지나도록 치르지 못한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모친을 모시고 충주 북촌(忠州北村)에 살다가 안 당(安 唐)이 설치한 현령과(縣令科)에 특채되어 유학(儒學)을 바탕으로 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혁신 그룹에 서서 중견 구실을 하였다. 1519년(중종 14) 홍경주(洪景舟)·남 곤(南 袞) 등의 반동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혁신 정치를 추구하는 신진파를 제거할 때 그 숙청자 명단의 우두머리에 연경의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중종(中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연경은 어필로 이름이 지워져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량과가 파과(罷科)되면서 벼슬을 버리고 공주(公州)에 물러가 살았다. 수정(守貞: 세좌의 이 긁으며 울자, 윤경은 웃으며 "새옷이 입고 싶지"라고 말하니, 준경은"어디서 새옷을 얻겠나"하였다. 윤경은 준경을 시켜 불을 피우라고 시킨 다음 형제가 입었던 옷을 벗어 모두 불에 태우고 알몸으로 앉아 있었다. 때마침 초하룻날이라 귀양살이 순찰 점고(點考)를 하는데, 지키는 사람이 발가벗은 어린 형제의 사정을 관에 보고하자 원은 놀라서 새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온 준경(浚慶)은 신승연과 황효헌(黃孝獻)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1531년(중종 26) 문과에 급제했고, 여러 관청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558년(명종 13) 영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윤경의 아들 중열(中悅)은 중종(中宗) 때 등과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학문이 뛰어나 장래를 촉망받았으나 명종(明宗) 때 을 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친구 이 휘(李 輝)를 변호하다가 갑산(甲山)에 유배, 사사(賜死)되었다.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의하면 중열은 다정한 친구인 이 휘로부터 시국에 걸리는 중대한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열은 이 휘의 일당으로 몰려 처형되느냐 아니면 이 휘의 말을 고발하여 자신은 모면하느냐 하는 위태로운 경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아버지인 윤경에게 찾아가 상의했더니 윤경은 "자신이 죽는 것도 애석한 일이지만 친구를 어떻게 배반한단 말이냐" 하였다. 중열은 다시 숙부인 준경에게 물었더니 "우리 선대에서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피해를 당하여 언제나 원통하고 한스러운 터인데, 오늘날 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위에 계신 부형(父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가문을 보존할 생각으로 글월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라고 하였다.이 때 중열의 아버지인 윤경이 승정원에서 편지를 보내어 아들을 책망하기를 <내가 항상 이 휘는 일을 저지를 사람이니 사귀지 말라고 주의시켰는데 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지금 화가 눈앞에 닥쳤다고 해서 어찌 친구를 팔아서 살기를 도모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열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어 살았는데, 1547년(명종 2) 3월 11일 밤 부엉이가 동북쪽 모퉁이에 모여들어 울어대니 옛부터 불길의 전조라,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가 부엉이가 운지 9일만에 사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 이씨의 화려한 인맥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목(巨木)인 한음(漢蔭) 덕형(德馨)은 좌의정 극균(克均)의 현손(玄孫)으로 지중추 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른 민성(民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양사언(楊士彦)은 덕형이 14세때 지은 시(詩)를 보고 <군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덕형은 조정에서 베풀어진 각종 정시(庭試)마다 최고의 지위를 차지했으므로 다른 선비가 이 정시를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나 일부러 병을 핑계로 시험을 치지 않았다. 31세 때 학자 관직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대제학(大提學)에 초탁(招擢)되었다. 조정에서 대제학을 회천(會薦)할 때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짱만 끼고 양보하였다. 한데 한 점의 반대표가 있어 모두들 의아해하는데 김귀영(金貴榮)이 웃으며 <노부(老夫)의 소위>라고 자칭하고 서서히 말하기를, "나이는 젊은데 지위가 너무 이르니 좀 재주가 노성하고 덕이 성숙함을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들은 덕형은 큰 절로 노대신의 충고를 혼연히 감사하니 선비들 공론이 양쪽을 모두 아름답게 일컬었다. 중국의 조사(詔使)로 조선에 건너온 왕경민(王敬民)이 덕형의 명성을 듣고 한 절귀의 시(詩)를 써주기를 "군의 풍토와 기상이 멀리 범류에 뛰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만나 보지 못하여 이것을 써 주어 신교(神交 : 얼굴은 서로 보지 못하고 정신으로 교분이 깊다는말)를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했다가 삭직되고 양근(陽根)으로 내려가 53세로 생을 마쳤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혼조삼리(昏朝三李)>라 하여 이항복·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임진왜란에 짓밟힌 사직을 지탱한 명신이었다. 광주 이씨의 또 다른 인맥으로는 지군사공(知郡事公) 희령(希齡)의 아들 지강(之剛)이 태종(太宗) 때 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을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겸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지유(之柔)는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역임했다. 한편 고려 말에 형조 우참의(刑曹右參議)를 역임하며 강직(剛直)한 충절(忠節)로 이름이 높았던 양중(養中)은 1392년(태조 1)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후에 남한산(南漢山) 밑으로 퇴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자 몸소 양중을 찾아와 농주(農酒)로서 옛정을 나누며 시(詩)를 짓기를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황제 (光武皇帝)와 엄자룡이 우의를 보나 한(漢)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서 이루어 왔지 않았던가 "하니, 양중이 답(答)하기를 "옛날의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對酌)이 있으리요"하니 왕도 그의 굳은 지조를 알고 밤을 새우며 우정을 나누었고, 양중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서 주부를 제수했다. 고려 말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형(兄)인 석탄공 양중과 함께 충절을 지켰던 암탄공(巖灘公) 양몽(養蒙)은 자손(子孫)들에게 조선조에 불사(不仕)하기를 유언했고, 지금의 서울시 고덕동(高德洞)은 양중과 양몽이 절의를 지켰던 고덕(高德)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그 밖의 인물로는 효행(孝行)과 문장(文章)으로 이름 높았던 필성(必成 : 중열의 아들)과 조선조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휴징(休徵)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던 극기(克基 : 예손의 아들)의 아들 은(誾)은 학자로 영광(靈光)의 보촌우에 배향되었다.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의 문인(門人)으로 임진왜란 후 조정의 해이한 기강을 바로 잡는데 공헌했던 윤우(潤雨)는 성주(星州)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배향되었고, 청명고절(淸名高節)로 명망이 높았던 아들 도장(道長)을 비롯하여 숙종(肅宗) 영남(靈南)의 대기근을 구제하여 전설에 오르기까지 한 담명(聃命)과 함께 명문(名門) 광주 이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남한에 총 33,816가구, 141,8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廣州李(광주이)씨 종중사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유래(由來)는 신라17대 내물왕(재위기간 356 ~ 401년)때 내사령(內史令)인 휘 자성(自成)으로 비롯되는데 칠원백(漆原伯)이 되어 성주(城主:성의 주인)의 작위를 세습하였다고 한다. 칠원은 지금의 경남 함안을 말한다.
신라가 망하자 유독 칠원만이 성을 굳게 지켜 절의(節義)를 높이고 항복하지 않으니 고려 태조가 크게 노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성을 포위 공격하여 오랜 뒤에야 성을 함락하자 칠원성주(漆原城主)의 일족(一族)을 회안(淮安:지금의 광주<廣州>)에 이주시키고 고을의 역리(驛吏)로 복역하게 하였다.
회안에서 복역한지 몇 대(代)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대로 현재(賢才)가 있었다한다.
고려말에 이르러 실권을 장악한 대인(大人)들이 광주(廣州)의 향리(鄕吏)로 이속(移屬)시켰는데,향리는 과거에 나갈 수 있었으므로 그를 계기로 광주에 세거하던 휘 당(唐)께서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生員)이 되시니 이때부터 광주를 관향으로 하여 생원공이 광주이씨의 시조가 되신다.
생원공에게는 인령(仁齡), 원령(元齡, 후에 집<集>으로 개명), 희령(希齡), 자령(自齡), 천령(天齡)의 오형제를 두셨는데 오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940년 고려태조 23년에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하여 광주이씨가 크게 번성케 되었다
광주이씨는 고려태조에 의하여 회안(淮安 : 京畿 廣州)으로 강제 이주된 후 선조 자성(先祖 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는 소목은 생약하고 족보를 인용바람니다.
광복 이후 정묘대동보를 만들 때 까지 후손이 이어진 5개 계파로 나뉘어 족보를 합보(合譜)하지 못하고, 둔촌 후손들은 광주이씨 대종회를 구성하여 둔촌의 아우되는 십운과공(十韻科公) 후손들의 종회와 두 형제의 아버님이신 생원공 휘 당(生員公 諱 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 휘 집(遁村 諱 集)과 십운과공 휘 자령(十韻科公 諱 自齡)을 1대조(一代祖)로 하여 각기 대종회와 십운과공 종회로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율정공 휘 관의(栗亭公 諱 寬義) 후손들은 1987년 정묘대동보 전 까지는 석탄, 암탄 형제 종회와 함께 한희(漢希)를 1세로 하여 족보(族譜)를 만들고 종사를 이어오다가, 정묘대동보에서 둔촌(遁村)의 4촌이며 율정공의 증조이신 생원공 휘 록생(生員公 諱 祿生)을 1대조(一代祖)로하여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석탄공 휘 양중(石灘公 諱 養中)의 후손들은 정묘대동보 이후 석탄공종회(石灘公宗會)로 석탄공 휘 양중을 1대조(一代祖)로 하고 상대를 소자출로 하여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암탄공 휘 양몽(巖灘公 諱 養蒙)의 후손들도 암탄공종회(巖灘公宗會)를 만들어 정묘대동보 이후 암탄공 휘 양몽(巖灘公 諱 養蒙)을 1대조(一代祖)로 하여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광주이씨는 상대소목(上代昭穆)의 실전(失傳)으로 대종회와 십운과공종회, 석탄공종회, 암탄공종회, 율정공종회가 각기 일대조를 달리하여 족보를 만들어 왔으며 그에 따라 광주이씨는 대종회와 4개 방계종회로 나뉘어 진 것이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9 / 광주이씨대종회(gwanglee.or.kr) 문의 ☎ 02-735-1720/ 메일: webmaster@gwanglee.or.kr Copyright (c) 2004 gwanglee.or.kr All rights reserved
광주이씨 집거유래(광주시청 홈페이지-소개글)
광주이씨의 시조는 신라때 내사령(內史令)란 벼슬을 지낸 자성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고려 태조에 의해 회안(淮安:지금의 광주)의 호장으로 삼음으로 그 신분상 출세를 못하여 기록이 전연 없다가 고려말에 이르러 등극을 시작하니 이때 본관을 광주로 하게 되었다.
集 遁村 寬義 栗亭 養中 石灘 養蒙 巖灘등 학자와 판관이 배출되어 광주이씨는 둔촌,율정,석탄,암탄의 네 파맥으로 이어오는데 둔촌의 후예들은 지금의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을 중심으로 옛 광주시 구천면 일대와 성남시에 연고가 많고 초월면 무갑리에는 임진란때 피난을 와서 세거가 시작되어 대쌍령리등에 번창하고 도척면 방도리 등에도 집거한다.
둔촌 집은 고려말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과 친교가 두터워 학문을 같이 닦은 학자로 이름이 높다. 석탄파의 시조 양중도 고려말 판관으로 당시 방원과 가까웠으나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조의 태종으로 등극하자 사귈자리가 못된다 하여 고덕동에 은신하다 태종이 찾아와 도와줄 것을 청하니 한사코 사양하고 돌려보낸후 후환이 두려워 수리골(지금의 하남시 덕풍2동)에 은둔하고 그의 양몽(암탄)은 광주 원적산 아래(실촌면 이선리)에 은둔하고 일체 벼슬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부도덕한 조선에서는 벼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양중, 양몽의 자손들은 그후 벼슬을 기피하고 생업에만 열중하였다.
지금 강동구의 고덕동의 지명 유래도 이 두형제의 높은 덕에 기인 한것이고 미금시의 왕숙천도 태종과 양중이 밤새 술을 마시며 이야기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은 지금도 전해오는 유명한 얘기이다. 초월면 신월리와 용수리 그리고 실촌면에 거주하는 광주이씨의 석탄자손들은 조선 태종때 수리골, 이선리에서부터 분리되어 분포된 것이다. 둔촌의 묘는 원래 성남시 하대원동에 있고 석탄의 묘는 원래 하남시 덕풍2동에 있었으나 도시개발에 따라 종손 이창희가 초월면 신월리로 이장을 하였고 암탄의 묘는 원적산 아래 실촌면 이선리에 그대로 자리한다.
광주에는 독립 운동가인 이종훈(3.1운동 33인중 1인), 이병승(실촌면 만세운동의 주동자)이 유명하다.
광주이씨 제단(祭壇) 광주이씨 문중에서는 매년 가을에 시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선조의 분묘가 여러곳에 산재되어 있어 시제때는 매년 많은 시일이 걸려 여러 가지로 불편함을 느낌은 물론 또한 각 분묘마다 제수를 각기 마련하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므로 이를 한곳에서 제를 지낼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도척면 방도리 안산 종중소유 임야에 제단을 설단하여 선조의 위패를 한자리에 순서대로 설치하고 한자리에서 한분상분의 제수로써 위패에 따라 차례로 제를 올리도록 마련된 제단으로서 한날 한자리에서 여러 선조의 제를 올리게 되어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제반 비용이 절감되는 한편 宗族이 한자리에 모두 참여 하여 종중제반 사항을 토의할 수 있는 잇점도 있다.
자료출처:광주시청 홈페이지 광주이씨 집거유래 [출처] 광주(廣州)이씨 시조 신라 내물왕때 내사령 이자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