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 심훈(沈薰)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930.3)
- 遺稿 시집 <그날이 오면>(한성도서, 1949)
* 감상 : 심훈(沈薰, 1901.10.23. ~1936.9.16).
본관은 청송(靑松) 안효공파.
본명은 심대섭(沈大燮)이며, 호는 해풍(海風) 또는 백랑(白浪).
‘심훈’이라는 이름은 1926년,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할 때
처음 사용했던 필명(筆名)이다.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현,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지주 집안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15년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4학년 때 3.1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죄명으로 8개월간 감옥에 구금되었습니다.
1917년 왕족이었던 이해영과 결혼하였으며,
학교에서는 일인(日人) 수학 선생에 대한 불만으로 시험 때 백지 답안지를 제출,
과목낙제로 유급되기도 할 정도로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대쪽 같은 성격이었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1920년 12월,
중국으로 가서 절강성 항현(抗縣) 저장대학(之江大學) 극문학부에서 2년여 수학하였으나
구금되었을 때의 후유증으로 1922년 11월 귀국하였으며,
당시 친일 중산 지주계급이었던 집안과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귀국 후, 1924년 10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
이 무렵부터 시와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이해영과는 이혼하였습니다.
철필구락부(鐵筆具樂部) 사건으로 1926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11월부터 연재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영화계로 진출하여 이듬해인 1927년에는
이경손 감독의 ‘장한몽’에 이수일 역의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에 있는 일활(日活) 촬영소에서 6개월간 머물며
영화 공부를 하였으며 이때 이 영화사에서 제작 중인
<춘희>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먼동이 틀 때>라는 시나리오를 쓰고 각색 및 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단성사에서 개봉하였습니다.
1
927년 12월 2일에는 <조선일보>에 ‘박 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기고하였는데,
이 시는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이자 친구였던 박헌영(1900~1955)을 위한 시였다.
그가 신의주 사건(1925년에 신의주에서 일어난 조선 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교도소에 수감 되었다가 1927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초췌한 그의 모습을 보고 분개하여
심훈이 이 시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고 말았습니다.
1932년 어머니가 계신 고향 충청남도 당진 송악면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고,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장편소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 공모전에 당선되어,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이때 받은 상금(당시 500원)으로 상록초등학교의 모체가 되는 <상록학원>을 설립하였다.
우리가 감상하는 시, ‘그날이 오면’은 그가 재혼했던 1930년에 발표했던 시로,
조국의 광복이 되는 ‘그날’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예언자적인 시각으로 노래한 시이다.
1932년 서울(당시 경성) 세광사에서 시집을 내려고 준비하다가 일제의 터무니없는 악독한 검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사후인 1949년, 해방된 후에야 유고 시집
<그날이 오면>이 발간되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심훈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언론인, 영화인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마지막 작품인 ‘상록수’가 당선, 당시 문학계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심훈은 가려지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시는 ‘오오, 조선의 남아여’인데,
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동갑내기 손기정, 남승룡 두 마라톤 선수가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소식을 접하고 감격하여
지은 시이다.
지난 주일 예배 설교 중에 목사님은 심훈의 이 시를 인용하였다.
이사야서 55장 12절과 13절*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였던 목사님은
강대국 바벨론의 압제를 받으며 고난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여 외쳤던 선지자 이사야의 노래는
심훈 시인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가 떠오르게 한다면서 이 시를 소개했던 것이다.
희망이 전혀 없는 절망의 순간조차도, 목 놓아 광복을 외치며
그날의 환희와 기쁨의 감격을 ‘예언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선지자’요, ‘바로 선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시학(詩學)을 가르치며 부총장까지 지냈던
Cecil Maurice Bowra(C.M. 바우러, 1898.4~1971.7)는
그의 책 <시와 정치(Poetry and Politics)>(1966)에서 심훈의 이 시를 소개하며
구약시대 다윗의 시편을 연상시키는 비장감이 있는
‘세계적인 저항시의 본보기’라고 극찬했던 시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이 시를 해석하였다.
‘한국 시인은 독일 시인처럼 잔악한 사실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록 먼 훗날의 일이라 하더라도 감격적인 그 미래가 일깨우는 자극적이고도 숭고한 그 기분인 것이다. 그는 한국의 산과 강, 종로와 같이 친숙한 환경에 그의 비전을 설정한다. 자연은 그와 기쁨을 함께 나누고 일어나서 함께 춤을 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자연환경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그가 심훈 시인을 이처럼 잘 알았던 것은, 할아버지 대부터 중국에서 무역업을 했던 집안 환경 때문에 중국 지우지앙(九江)에서 태어났고 11세가 되던 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동아시아를 휩쓸며 무소불위 압제의 귄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너무도 잘 이해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지만,
그 상황에 굴복하거나 패배 의식으로 침잠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혹한의 흑암 가운데서 ‘희망의 촛불 하나’ 밝히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할 일'이라는 말씀에,
그리고 그날이 오기만 하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외치는 시인의 각오가 절절이 묻어나는 노래에 큰 도전을 받습니다.
충남 당진시 상록수길 105번지에 위치한 <심훈기념관>에 있는 '그날이 오면' 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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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의 '오오 조선의 남아여!'
‘오오, 조선의 남아여!’
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동갑내기 손기정, 남승룡 두 마라톤 선수가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소식을 접하고 감격하여
지은 시이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껴안고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심훈은 이 시를 지은 후 일본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다.
유해붕과 이길용의 일장기 말소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기자는 손기정 우승 3일후인 8월13일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사진을 입수했다. 유해붕은 그날 신문에 사진을 내면서 손기정 가슴팍에 붙은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손기정이 조선 사람임을 강조하고 조선 사람의 우수성을 모든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조선중앙일보는 민족지도자였던 여운형이 출옥 후 사장을 맡고 있던 신문이었다.
그리고 8월25일, 보다 선명한 사진을 구한 동아일보도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실었다. 신문을 본 조선 총독 미나미는 격노했고 일본 순사들이 동아일보에 들이닥쳐 기자들을 떼로 연행했다.
체육 주임기자 이길용, 사회부장 현진건,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 제판 담당 서영호 등 5명이 일장기 말소의 주요 용의자로 꼽혔다. 다른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석방됐지만 이들 다섯 명은 40일 동안 풀리지 않은 채 고문에 시달렸다.
고문의 주된 목적은 일장기 말소가 동아일보 창설자 김성수(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 이사를 지냄)와 사장 송진우(조선체육회 이사를 지냄) 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걸 자백받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로 무기한 간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길용 등 다섯 명은 언론계 영구 추방의 조건으로 풀려났다.
동아일보는 다시 발행되었으나 조선중앙일보는 영영 발행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