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전의 문이 열리며 제국의 황태후가 그 모습을 좌중 앞에 드러냈다. 오늘 아침식사 때까지만해도 아들을 어린아이마냥 취급하던 어머니이자 평범하고 소탈한 아녀자와 같은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정반대로 지금은 아주 위엄있고 기품있는 모습이었다. 위풍당당하고 정갈한 그 모습이 제국의 태후로서 한점 손색이 없었다.
“신성 제국 라고스의 황태자 안드레스 리페 오스트리치여.. ”
“예, 태후마마.”
“그대는 제국의 지존인 황제의 자리, 즉 용상에 오르고자 하고 있다. 황제의 자리는 그 책임이 막중한 고난의 가시밭길임을 알고 있는가.”
“예, 알고 있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용상에 오를 자로서 위로는 하늘과 역대 제국 황제들께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며, 또한 아래로는 제국의 만백성을 위하여 그들의 민생을 보살피고 아픈 곳을 어루만져줄 각오와 결의를 갖고 있는가!”
“예! 그러하나이다! 태후마마!”
“제국력 5015년 6월 21일, 선황 루이 리페 오스트리치 폐하의 후계자로서 안드레스 리페 오스트리치가 보위에 오르는 것을 윤허하노라!”
“안드레스 리페 오스트리치는 역대 황제들께 대하여 맹세합니다. 반드시 훌륭한 황제가 되어 제왕의 위업을 이루겠나이다!”
이것으로 즉위식 이전의 윤허절차는 모두 끝났다. 이제는 즉위식만을 남겨놓았을 뿐 실질적으로는 이 제국의 황제였다. 태후는 근엄하고 위압적인 모습을 풀고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이제 용상에 오르세요, 황상.”
태후는 안드레스를 향해 황상이라 하였다. 이제는 그녀의 앞에 있는 30대의 청년이 자신의 아들이기 이전에 제국의 지존인 황제였다. 이제는 사사로운 모자관계 그 이전에 군신의 관계이다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안드레스는 모후가 자신을 일컬어 황상이라 부르자 비로소 자신이 용상에 오르게 되는 것이 실감났다. 또한 앞으로 황제로서 살아갈 것에 대한 가슴 두근거리는 기대와 또 한편으로는 불안감과 두려움도 느끼고 있었다.
어쨌거나 바야흐로 새로운 황제의 탄생이었다. 그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가슴 벅찬 감동과 지난날에 대한 기억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곳은 황도 라도니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황궁. 신성제국 라고스의 5천여년 세월 동안 수많은 역대 황제들이 스쳐지나간 곳이기도 하였다. 지금 이곳에서는 제 254대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254대 황제가 되는 자는 바로 안드레스 리페 오스트리치, 그는 지금 황제의 예복을 갖춰입고 머리에 왕관을 쓰고 천천히 그러나 위엄있게 걷고 있었다. 그의 걸음이 멈춰진 곳은 즉위식을 위해 마련해 놓은 단 위에 있는 좌석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좌정하였고, 이어서 즉위교서의 낭독이 시작되었다.
「신성제국 라고스 5천여년 역사를 함께해 온 이곳 황궁에서, 이토록 영광스러운 곳에서 오늘 나 황태자 안드레스 리페 오스트리치는 하늘의 뜻을 받고, 백성들의 열망을 받아 용상에 오르게 되었다.
짐이 용상에 오르는 것이 오늘에서야 이루어진 것은 그간 제국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대역무도한 역적의 일당이 용상을 찬탈하여 제국을 유린하였도다. 최초로 표범왕 베르도에 의한 난이 있었고, 그 시기에 공을 세운 희대의 마녀 마우스실버 디 조이가 제국의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어 마녀는 성거래특별법을 시행하여 제국내 남성들의 숨통을 틀어쥐었고, 특히 서민 남성들은 여자를 확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비관하여 자살하는 자가 많았으며, 제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이주하는 자가 줄을 이뤘으며, 국법으로 금하고 있는 성욕제거 마법의 시전이 암암리에 시행되는 등 그 폐단이 실로 막대하였다.
또한 악랄한 마녀 마우스실버는 자신이 옹립한 표범왕을 살해하고, 허수아비 황제로서 황실의 어린 종친 경원대공 트리스탄 리페 오스트리치를 옹립하였으니 이는 그 자신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자 함이었다. 마우스실버가 제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나자 그 전횡이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으며, 사치가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헐벗고 굶주리니 이에 곳곳에서 원성이 자자하였도다.
이에 짐이 사자왕 프라우스 리페 오스트리치의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대의를 위해 거사를 이루었고, 그리하여 가짜 황제를 폐하고 적통의 용상의 주인인 짐이 오늘에 이르러 보위에 올랐도다. 그러나 앞으로 차후로 나아갈 길이야말로 지금까지보다 더욱 중하고 어려운 길이 아니겠는가.
자고로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하였다. 짐이 용상에 올랐으나 이것이 마냥 기쁘기만 한 일이 아님을 이미 느끼고 있는도다. 앞으로 도탄에 빠지고 실의에 빠져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린 짐의 백성들을 어찌 구제할 것인가부터 제국 전반에 걸친 문제에 이르기까지 벌써부터 짐이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음을 실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짐은 반드시 이와 같은 일을 모두 해결해 내어 반드시 제왕으로서의 바른 길을 걸을 것이다.
짐은 지금 이 순간부터 마녀에 의해 시행된 허무맹랑한 성거래 특별법을 전면 폐지함을 선언하는 바이다. 성거래에 종사하던 직업여성들은 이제 다시 생업에 복귀하도록 하며, 지금까지 특별법 위반으로 투옥된 자는 모두 석방하고, 그 신원을 회복케 한다. 짐이 앞으로 행할 일이 지극히 많으나 무엇보다도 이 악법을 철폐하는 것이 중한 일이며 또한 시일을 늦출 수 없는 급박한 것이기에 이와 같이 즉위교서에 이를 명시하는 바이다.
짐은 이제 제국의 주인이 되었으니, 부황께서 다 못 이루신 위업을 달성코자 한다. 또한 제국 역대 황제들께 한점 부끄럼이 없는 제왕의 길을 걷고자 한다. 짐의 이와 같은 마음을 위로는 재상에서 아래로는 시골 촌부의 아낙까지 알아주었으면 하노라.
- 제국력 5015년 6월 21일
신성제국 라고스 황제
안드레스 리페 오스트리치 서(書) -」
즉위 교서 낭독이 끝남으로서, 즉위식도 모두 끝났다. 이제는 명실공히 진정한 제국의 지존이 된 것이었다. 슬레인의 선창에 이어 모두들 만세 삼창을 불렀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즉위식이 끝나며 흥이 가라앉을 무렵, 슬레인이 돌연히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새로 즉위한 황제 안드레스 앞에 앉았다.
“황제폐하! 이제 즉위의 절차를 모두 마치셨으니 마녀 마우스실버의 치죄를 하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이미 국문장이 마련되었으니 친히 납시어 친국을 하여주시옵소서! 이는 시일을 지체할 일이 아닌줄로 아옵니다!”
슬레인은 안드레스에게 서둘러 마우스실버의 죄상을 국문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는 슬레인 뿐 아니라 모든 기사들, 더 나아가 제국의 모든 백성들의 열망이기도 하였다.
“그렇지, 시일을 지체해서는 아니 될 일. 짐이 지금 당장 국문장으로 갈 것이외다. 경들 또한 모두 참관하도록 하시오.”
이제 황태자에서 황제가 된 안드레스는 마녀 마우스실버의 죄상을 다스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 또한 그 의미가 매우 큰 일이었기에 모든 신료들과 기사들이 참관토록 명하였다. 이것은 그가 용상에 오른 후에 처음으로 내린 어명이었다.
국문장은 황실 후원에 있는 뒤뜰에 설치되었다. 마우스실버는 이미 양손과 양발이 잘려나간 상태였고, 형틀에 온몸이 결박되어 있었다. 죄인을 결박한 형틀 주위에는 각기 대각선 방향에 한명씩의 병사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또한 마우스실버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형틀에서 정면으로 대략 7,8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국문을 주관하는 추문관이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의 추문관은 다름 아닌 새 황제였다. 본래 죄인을 국문하는 추문관은 일반 관리가 하는 것이 상례이나 극악한 중죄인, 예를 들어 역모에 관련된 사건이라던가 그런 종류의 큰 죄인을 심문할 때에 황제가 직접 추문관으로서 나서서 죄인의 국문을 할 때가 있는데, 이를 친국이라 하였다. 황제가 친히 국문을 주관한다는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국문장에 지금 죄인을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병사들 몇 명을 비롯하여 각 신료들과 기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물론 그 중앙에 있는 형틀에는 대역의 죄인 마우스실버 디 조이가 묶여져 있었다. 그런터에 국문장 출입을 관리하던 한 병사의 목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황제폐하 납시오!!!!”
국문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는 동안, 안드레스는 기세등등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국문장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걸음을 옮겨 추문관의 자리에 좌정하였다. 그리고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나서 자신의 신하들을 향해 말하였다.
“평신.”
평신이란 몸을 일으키라는 뜻이었다. 즉, 무릎을 꿇고 있던 신하들에게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그런 의미였다. 평신이라는 명이 떨어지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슬레인에 의하여 국문의 시작을 알림이 선포되었다.
“짐이 대역죄인의 국문을 단행코자 하니, 죄인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도록 하라. 죄인의 입을 통해 그 죄상을 확인하고자 한다.”
“예! 황제폐하! 속히 거행하겠나이다!”
병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신속히 마우스실버의 입에 물려진 재갈을 벗겨내었다. 재갈을 벗겨내자 마우스실버는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광기에 가득찬 독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쳐죽일 놈들아! 이 하등한 사내들! 너희들이 무사할 성 싶으냐!”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온갖 욕설과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안드레스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조용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죄인에게 매를 쳐서 입을 다물게 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죄인의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은 곧장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때 사용한 몽둥이는 일반적인 몽둥이와는 좀 달랐다. 막대기의 형태이기는 하나 곳곳에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이 매질을 함에 따라 마우스실버의 피부가 찢어지고, 급기야는 살점이 몇군데 떨어져나가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연신 비명을 질러대다가 어느샌가 혼절하고 말았다. 안드레스는 다시 병사들에게 명하여 찬물을 끼얹게 하니 다시금 마녀의 의식이 회복되었고, 힘이 빠져서 그런지 아까와는 달리 조용하게 되었다.
“후후후후. 그건 표범왕 그 자가 욕심이 많고 성품이 잔인하여 무슨 일이든 다 해치울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를 부추겼던 것이다.”
희대의 마녀 마우스실버는 황제의 어전임에도 불구하고 극히 무례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다보다 참지 못한 곤잘레스가 갑자기 형장에 난입하고 말았다. 곤잘레스는 병사들 중 한명이 들고 있던 칼날이 박혀있던 몽둥이를 빼앗아 들더니 마우스실버를 매우 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또한 오래 가지 못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리안이 곤잘레스의 팔을 붙잡고 만류하였기 때문이었다.
“곤잘레스! 무슨 짓이냐. 황제폐하께서 계신 곳이다. 무엄한 짓은 그만두어라!”
리안이 곤잘레스를 향해 질책을 퍼부었다. 그러나 곤잘레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하려 하였다. 그는 이미 분노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 쳐죽일 독랄한 마녀같은 년이 감히 폐하께 무례한 언사를 일삼고 있질 않소이까! 이걸 보고 어떻게 그냥 있으란 말이오!”
곤잘레스, 그 다운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원래부터 무지하고 무식한 용병출신의 그였다보니 법도와 예를 잘아는 기사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이런 우직하고 순박한 성품이 또한 안드레스의 마음에 들었다. 새 황제는 조용히 안드레스를 잘 타일러 만류하였다.
“곤잘레스, 그대의 마음은 짐이 충분히 알고 있다. 어차피 처형될 죄인이다. 그대는 한 걸음 물러서서 죄인의 국문을 지켜보도록 하라.”
“에..예, 황제폐하. 신이 잠시 경황이 없어 폐하의 안전에서 무례를 범했나이다. 용서하여주시옵소서.”
곤잘레스로서도 물러나 지켜보라는 어명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조금전까지와는 정반대로 온순한 한 마리 양처럼 물러나서 국문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마녀에 대한 증오로 불타올랐다.
한차례의 소동이 수습되자 다시금 국문이 이어졌다.
“너는 네가 옹립한 표범왕을 폐하고 다시금 황실의 어린 종친을 옹립하여 허수아비 황제로 삼아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는 무슨 의도였는가.”
“훗.. 하등한 사내놈들이라 그런지 머리가 아둔하구나. 그것을 내가 일일이 말해주어야 아느냐. 하하. 표범왕은 나의 이상에 걸맞지 않았다. 그자는 성거래특별법 시행에 그다지 찬동하지 않는 인물이었고, 또한 어차피 나는 제국의 모든 사내들을 죽이고자 하였으니 언젠가는 죽여 없애야 할 자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허수아비 황제로 어린 아이를 내세운 것은 좀더 쉽게 권력을 휘둘러 나의 이상을 떨치기 위함이었다. 종국에 트리스탄을 죽인 것은 이미 나의 패색이 짙어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었기 때문이고, 마지막까지 한명의 사내라도 더 죽여 없애고자 했음이다. 어린아이라고는 하나 그 또한 분명 남자가 아닌가. 크하하!”
마우스실버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엄청난 무서운 음모의 전말을 드러내고 있었다. 실로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을 그녀는 감행하려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