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언제 대륙에 진출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백제의 땅이 대륙에도 있었다는 것은 비록 극소수이기는 하나 국내 사학계의 일부 학자들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성립 과정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에 관련된 사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수수께끼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대륙백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백제의 대륙 영토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중국 사서(史書)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대륙백제에 관한 기사는 완전히 제외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들은 대륙백제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으며, 그 성립 과정과 시기를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서 백제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송서(宋書) 제97권 이만열전(夷蠻列傳)이다. 송서에는 백제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시작한다. ‘백제국(百濟國)은 본래 고려(高麗; 高句麗)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천여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려는 요동을 약유하고 점유하자, 백제는 요서(遼西)를 약유하고 점유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불렀다.’
요서(遼西)는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河北省), 하남성(河南省), 산서성(山西省) 등을 포괄하는데, 산서성의 옛이름이 진(晉)이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송서를 참고했을 터이고, 틀림없이 도입부의 이 기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의 상식으로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백제란 그저 한반도 서쪽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니 중원 대륙의 요서 지역을 장악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단 그들뿐 아니라 지금도 국내 역사학자 대부분은 백제의 요서 지배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실정이다. 도대체 어떤 경로로 바다 건너 대륙의 요서 지역을 장악하여 다스렸다는 말인가? 진평군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나와 있는 것으로 봐선 백제가 요서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린 것은 분명한데, 그 경로는 그저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당(唐) 태종(太宗) 연간인 636년에 편찬된 양서(梁書)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백제는 본래 구려(句麗)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대(晉代)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격하여 가지자, 백제 역시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晉平郡)의 땅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양서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차지한 시기를 진나라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고, 여기서는 진평군 이외에 요서군이라는 지명과 백제군이라는 지명이 추가되었다. 양서에서 말하는 진나라는 사마염(司馬炎)이 266년에 건국한 진(晉)을 일컫는다. 진은 역사학계에서 편의상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으로 나뉘는데, 서진은 세조(世祖) 사마염이 창업한 국가이고 동진은 흉노족 유연(劉淵)에 의해 서진이 몰락하자 세조의 후예 사마예(司馬睿)가 동쪽으로 달아나 세운 나라를 일컫는다. 서진은 266년에서 316년까지 유지되었고, 동진은 317년에서 420년까지 유지되었는데,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시기는 서진시대(西晉時代)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298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을 거느리고 침략하자 책계왕(責稽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전을 펼치던 중 전사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흉노의 귀족 유연의 세력을 일컫는다. 유연은 이 무렵 서진의 세력이 약화되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가 304년에 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 한나라는 원래 평양(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서남쪽)에 도읍했다가 나중에 장안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조(趙)로 고쳤는데, 이를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전조(前趙)로 부른다.
물론 한이 침입한 백제 땅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원 대륙이었다. 백제가 요서 지역을 장악한 시기는 서진이 세워진 313년에 미천왕이 요동의 낙랑을 차지한 시기로 보인다. 이 시기는 백제의 비류왕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고이왕계 왕통인 책계왕은 부인이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책계왕 즉위년인 286년 이전에 대방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가 산동성 아래 위치한 대방을 세력권 아래 뒀다는 것은 이미 그때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는 의미다. 즉, 백제는 고이왕 연간에 이미 요동에 진출하여 비류왕 시기에 고구려의 요동 침략으로 요서 지역을 장악하고, 진평군(晉平郡)과 요서군(遼西郡)을 합쳐 백제군(百濟郡)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백제는 언제부터 대륙에 진출했을까? 246년 8월에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串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柳武), 대방태수(帶方太守) 긍준(肯俊)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이왕(古爾王)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도록 하여 그 주민들을 잡아오는 사건이 있었는데, 백제의 대륙 진출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중국 측 기록은 진인(晉人)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桓鮮卑東夷傳) 한(韓)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부종사 오림(吳臨)은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하였다고 하면서 진한(辰韓)의 여덟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게 줘버렸는데, 이 일을 벼슬아치가 통역하여 전하다가 잘못 전해진 부분이 있자, 신지(臣智)가 한(韓)의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읍을 공격하였다. 이때에 태수 긍준(肯俊)과 낙랑태수 유무(柳武)가 병사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긍준은 전사하였으나 두 군이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삼국지의 이 기록은 마한에 관한 것이다. 마한은 이미 그때 멸망하고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여전히 백제를 마한으로 알고 있던 때였다. 때문에 백제 국왕을 마한의 신지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한의 신지로 표현된 사람은 다름 아닌 고이왕이었고, 기리영을 공격하여 긍준을 죽인 군사들은 고이왕이 보낸 진충의 군대였다. 고이왕이 진충을 시켜 대방을 공격하게 한 것은 낙랑태수가 위나라 부종사의 말을 빌미로 백제에 속한 진한 땅의 영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서 낙랑군과 대방군이 합쳐서 한(韓)을 멸하였다고 하는 내용은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진수의 삼국지는 위나라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쓴 책인데, 당시 백제가 낙랑과 대방을 장악한 내용이 그대로 남을 경우 위나라 땅을 승계한 진나라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염려하여 진수가 고의로 조작했다는 뜻이다. 서진 시대에 이미 백제가 대륙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서(晉書)에 백제편은 없고 이미 망한 나라인 마한편만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때 백제의 세력은 낙랑과 대방 세력에 의해 패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고 대방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대방에서는 불모로 딸을 백제에 시집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즉, 백제는 이 때 대방을 장악하여 대륙 진출의 근거지로 삼고 후에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晉平郡)을 차지하여 대륙백제를 일궜다는 뜻이다.
중국이 백제라는 나라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개척한 서진(西晉) 이후부터였다. 그 전까지 중국에선 한반도 중부 이남을 삼한(三韓)의 땅으로 인식했고, 때문에 백재가 대륙에 진출하기 전에는 삼한의 맹주인 마한과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目支國)에 의해 그 땅이 다스려지고 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백제가 처음 대륙에 진출할 때가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백제를 마한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송서(宋書)와 남제서(南濟書), 위서(魏書), 주서(周書)에 백제(百濟)편은 있으나 신라(新羅)편은 없는 것도 당시에 중국은 신라를 진한의 한 소국으로 인식한 반면, 백제는 대륙에 진출한 비교적 큰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남사(南史)에서는 신라의 위치를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 고 쓰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대륙 영토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5천리라는 개념은 백제를 대륙에 설정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수치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고이왕(古爾王)이 개척한 대륙백제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송서(宋書)와 양서(梁書)에서는 대륙백제의 위치를 요서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요서지역은 요수 서쪽 일대를 통칭하는 것이므로 그 범위가 매우 넓다. 때문에 요서지역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대륙백제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 힘들다. 북위(北魏)의 역사를 다룬 위서(魏書)는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1천리 떨어져 있으며,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기에 거의 모두 산에 기거한다.'고 하여 대륙백제의 위치를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북위는 386년에 창업되어 528년에 망한 나라로 한때 백제와 직접 전쟁을 치른 나라이기도 하다. 때문에 북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형성된 위서는 당시의 영토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위서의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맞닿아 있지 않았으며, 그것도 1천리나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의 위치를 소해의 남쪽이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해는 발해를 의미한다. 즉, 대륙백제는 요서지역으로서 고구려 국경과 1천리 이상 떨어진 발해 남쪽 일대에 형성됐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기후와 거주지역에 대한 설명은 그 위치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다는 지형과 기후에 대한 설명은 발해 남쪽의 지형과 기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발해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로 둘러싸인 내해로 안개 바다라는 뜻인데, 지대가 낮고 깊은 만이 형성되어 있는 까닭에 늘 안개가 끼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면적은 총 7만 7천 제곱킬로미터이고,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서부는 발해만, 북쪽은 요동만, 남부는 내주만, 가운데는 발해 중앙분지이다. 발해는 3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 대륙의 영향을 심하게 받아 수온의 연 변화가 크고, 황하를 비롯한 난하, 요하, 해하 등의 거대 하천들이 모두 흘러드는 곳이라 습기가 늘 많은 곳이다.
발해 남쪽은 내주만과 산동반도 지역으로 지표면은 장기간 침식을 받아 대부분이 구릉지이고, 아주 일부만 1천 미터 이상의 높은 봉우리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구릉지에 기거하고, 농작물도 구릉지에 적합한 사과와 배를 대량 생산한다. 이곳의 수목으로는 구릉산지에서 잘 자라는 참나무가 가장 많은데, 이것은 멧누에인 작잠의 사료로 쓰인다. 이곳의 연 강수량은 6백 50에서 9백 50 밀리미터 사이로, 다른 화북 지역 강수량보다 2백 밀리미터 이상 많다.
이 곳 사람들이 발해만 주변의 저평원 지대에 기거하지 않고 산간 지역인 구릉지에서 생활하는 또 다른 이유는 평원 지역이 모두 염화저평원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해수가 들어온 후 조수가 빠지지 못해 해수가 증발되고 지하수 염분 농도가 증가되어 고등식물이 번식할 수가 없다. 산동성(山東省), 하북성(河北省), 강소성(江蘇省)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열거한 사실들은 위서(魏書)의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기에 거의 모두 산에 기거한다.'는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대륙백제는 발해 남쪽의 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후에 세력이 팽창되면서 하북성과 강소성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