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며,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3,16.17)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오늘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하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입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은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다음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 성당 안에 걸어 현양顯揚(=높이 드러내다. 나타내어 드높인다는 의미)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 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요3,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으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말씀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3,9)하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약의 민수기의 구리 뱀의 비유를 인용하셨습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 민수기 21, 4-9절은 오늘 복음을 위한 밑그림입니다. 불 뱀에 물린 사람들 가운데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21.9)라는 말씀처럼 믿음으로 바라본 사람은 살아났지만, 여전히 불신앙으로 바라보지 아니한 사람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사실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이 거의 200만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사람이 높은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 뱀을 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물리적으로 잘 보이지는 않았더라도, 믿음으로 보려고 애쓴 사람들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살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민수기의 구리 뱀사건입니다.
모세가 만들어 기둥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뱀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능력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의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며,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3,16.17)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요한 4,9-16참조)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까닭이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당신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구원 섭리와 계획(=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결국에는 외아들이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으며 길고 넓은지를 드러나셨습니다.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기묘한 사업』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에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21,8)하고 약속하셨고 약속에 성실하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사랑과 구원의 표지인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살게 되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상처는 상처로 낫는다는 말처럼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려고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죽음의 상처에서 낫게 하여 주셨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디에나 높이 걸려 있는 십자가는 장식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십시오! 바라보시데, 다시 태어나려면 겉으로 드러난 십자가 표상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깨닫고 그것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기고 의탁한다는 마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마음으로 바라볼 때 그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그분의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회심과 치유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사랑의 바라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내면의 본래적인 자아가 그 사랑이신 그분과 만나고, 그분과 만남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모든 분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시길 권하면서, 이 바라봄의 의미를 꿰뚫은 시몬느 베이유의 「신을 기다리며」의 한 부분을 선물로 보냅니다. 『오늘날 오해받는 크리스챤 사상의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는 구원이 “바라봄”에 있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높이 매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는 이가 구원을 받듯, 완벽히 순수한 이 예수를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다. 높이 달린 그 거룩한 것 앞에 우리의 무능과 악이 드러나고, 영혼의 교만이 드러나며, 불꽃이 일어 이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바라보는 이는 이렇게 하여 보는 상대(=십자가상의 예수)와 비슷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이는 말씀하시는 분을 닮는다. 영혼의 선익을 산출하는 것은 능동적인 의지가 아니라, 바라봄, 말씀을 들음, 그 수동적인 순명, 기다림, 집중, 침묵, 고통과 기쁨을 관통하는 부동성.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모습은 모든 순명 행위의 모델이다.』
저희 수도회 행사 마무리에 항상 부르는 「십자가 찬미」를 기도 대신으로 보냅니다. 『십자가상에 한사람있네 왜 죽으셨는지 말해다오 인간의 죄로 수난하셨네 우리위해 숨거두셨네 십자가상에 한사람있네 홀로매달려 계시면서 나에게 가르쳐주세요 그의 죽음을 왜 몰랐는지 그날을 몰랐던 사람있고 무심한 사람도 있었다네 집단으로 생애를 바침으로 그일을 세상에 알리려네 손에손에 십자가들고 곳곳에 님사랑 전하려네 십자가상에 한사람있네 온세계 알기를 바라노라.』 % 60년 전 오늘, 1964년 9월 14일 예수고난회 미국 시카고 십자가 관구 소속 마 레이몬드 신부님께서 한국에 도착하신 날입니다. 곧 예수고난회 한국 진출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다시금 저희 수도회를 위해 기도 부탁드리며, 돌아가신 두 분 신부님들, 마 레이몬드 신부님(1964년 한국 오심, 2008년 12월 귀천)과 박 도세 유스티노 신부님(1965년 한국 오심, 2008년 10월 귀천), 그리고 건강 때문에 미국 관구로 귀원한 손 어진 신부님(1969년 한국 오심, 24년 1월 귀국)과 베트남에서 수련장으로 활동하고 계신 노 인조 수사님(1974년 한국 오심, 현재 베트남 생활)도 기억하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