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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개봉 / 124분>
=== 프로덕션 노트 ===
감독 : 조지 루크
출연 : 시얼사 로넌 & 마고 로비 & 가이 피어스 & 데이비드 테넌트 & 잭 로던
헐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여배우들인 시얼샤 로넌(레이디 버드, 브루클린)과 마고 로비(아이 토냐,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역사적인 여왕이 되어 만나다
남자들이 이끌어가던 시대, 최고 권력자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해야 했던 두 여왕의 역사적 이야기를 새롭게 그려낸 작품
배신과 반란, 음모 등 두 국가와 궁정의 암투 속에서 두 여왕을 맡은 시얼샤 로넌과 마고 로비의 연기와 대립이 빛나는 영화
'메멘토'의 가이 피어스, '닥터후'의 데이빗 테넌트 뿐만 아니라 '덩케르크'의 잭 로던,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의 조 어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캡틴마블'의 젬마 챈 등 화려한 캐스팅
시대극의 묘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두 여왕의 복식, 궁정의 모습 등 볼거리가 많은 작품
광활한 스코틀랜드의 자연 풍광과 그에 어울리는 멋진 사운드트랙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는 카리스마 있는 메리 스튜어트(아카데미상 후보+ 시얼샤 로넌)의 굴곡진 삶을 다룬다. 16세에 프랑스 여왕이 되고 18세에 남편을 잃은 메리는 재혼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적법한 왕좌를 되찾으려 한다. 혈통상 메리는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통치중인 엘리자베스 1세(아카데미상 후보+ 마고 로비)의 후계자 자격도 갖고 있다. 명목상의 왕위가 아닌, 가능한 최대의 실세를 얻고자 결심한 메리는 잉글랜드의 왕위 자격을 주장하며 엘리자베스의 통치권을 위협하고, 권력과 사랑에 있어 라이벌인 두 여왕은 결혼과 아이에 대해 매우 다른 선택을 한다. 배신과 반란, 음모는 두 여왕 모두를 위태롭게 하며 사이를 가르고, 두 여인은 권력의 씁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 인물 정보 === <다음 백과>
메리 스튜어트
(1542~1587)
큰 키에 날씬한 몸매, 금발에 호박색 눈을 가진 뛰어난 미모에다 음악과 시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현명하지 못한 결혼과 정치적 조치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란을 유발했으며, 잉글랜드의 왕권을 위협하는 로마 가톨릭교도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제임스 5세의 외동딸인 메리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아버지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1558년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을 위해 프랑수아와 정략 결혼해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나, 1년 만에 프랑수아가 죽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신구교 간 대립이 팽배했으며, 귀족들은 국왕의 보좌보다는 개인적인 세력 확대에 관심이 많았다. 1565년 단리 백작과의 결혼, 1567년 보스월과의 결혼에 모두 실패해,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의 귀족들로부터 배척당했다. 1578년 퇴위하고 작은 섬에 유폐되었다. 메리는 부당한 감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1587년에 처형당했다.
개요
현명하지 못한 결혼 결정과 정치적 조치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란을 유발해 잉글랜드로 피신해야 했고, 급기야는 잉글랜드의 왕권을 위협하는 로마 가톨릭교도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초기생애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5세와 프랑스 출신 왕비 기즈의 메리 사이의 외동딸인 메리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아버지가 죽자 스코틀랜드 여왕의 자리에 앉았다.
종조부인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자기 뜻대로 메리를 움직이려 했으나(메리의 할머니가 헨리 8세의 누이였으므로 메리는 튜더가의 혈통을 지녔음) 실패했고, 스코틀랜드의 섭정은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어머니는 5살 난 메리를 프랑스로 보냈다. 메리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궁정에서 왕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비롯해 수많은 왕실 가족들과 함께 자라났고, 외가가 권세있는 기즈가였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빈번한 사냥대회와 무도회(메리는 2가지 모두 뛰어났음)를 비롯해 어린시절을 호사스럽게 보냈으나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라틴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를 비롯해 그리스어도 약간 배웠으며 프랑스어가 가장 유창했다. 어느 모로 보나 메리는 스코틀랜드인이라기보다는 프랑스 여성으로 성장했다. 큰 키에(거의 180cm나 되었음) 날씬한 몸매, 금발에 호박색 눈을 가진 뛰어난 미모에다 음악과 시에도 취미가 있었던 그녀가 1558년 4월 앙리 2세와 카트린 사이의 맏아들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할 때의 모습은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적인 공주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이 결혼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이었고, 신방을 차리지는 못했지만 메리는 진심으로 어린 신랑을 좋아했다.
1558년 11월 튜더가의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튜더가의 혈통을 지닌 메리가 그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여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가톨릭교도들은 헨리 8세가 아라곤 출신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한 것은 무효이고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이며 메리야말로 합법적인 여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리의 시아버지인 앙리 2세는 잉글랜드 왕위는 메리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559년 앙리 2세가 죽고 프랑수아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메리는 프랑스 왕비로 화려하게 즉위했다. 그러나 프랑수아가 1560년 12월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18세에 과부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여왕시절
1561년 8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으나 프랑스의 안락한 환경 속에서 자란 자신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처리해나갈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메리는 잉글랜드의 왕위를 요구해서 엘리자베스의 미움을 샀다. 한편 메리는 로마 가톨릭교도였는데 스코틀랜드의 국교는 그녀가 없는 사이 프로테스탄트로 바뀌어 있었다. 따라서 칼뱅파 지도자인 존 녹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눈에는 메리가 다른 종교를 가진 외국인 여왕으로 비쳤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방계 왕족들의 움직임을 좇아 파당을 만들고 소란을 일으켰으며 국왕을 보좌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싸움이나 세력확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메리는 통치 초기에 사생아이자 이복남매 사이인 머리 백작 제임스의 도움을 받고 특히 종교 관용정책을 펼쳐 국정을 잘 이끌었다. 또한 우아한 궁정생활을 연출하고 전국 순회 행차를 즐긴 아름다운 젊은 여왕의 모습을 스코틀랜드인들 모두가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메리는 1565년 7월 레녹스 백작 4세 메슈 스튜어트의 아들이며 사촌인 단리 백작 헨리 스튜어트와 2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 결혼은 불행한 운명의 시발점이 되었고 결국 메리를 파멸로 이끌어 갔다.
그녀는 미남 단리와 사랑에 빠져 무분별한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의 권력구조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파멸을 초래한 선택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또다른 튜더가 출신과 결혼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이복남매간인 제임스는 레녹스가의 세력 확대를 시기해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단리의 성격은 외모와는 달리 나약하고 방탕했으나 야심가였다. 1566년 3월 다른 귀족들과 함께 단리는 메리의 면전에서 신뢰하는 신하 데이비드 리치오를 비정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이 일로 메리는 단리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아들 제임스가 태어났으나 두 사람은 전혀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토록 갈망하던 후계자를 갖게 된 메리는 이를 이용해 난관의 타개책을 찾으려 했다.
그뒤의 8개월은 메리의 일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논란이 많은 시기였다.
이때 메리는 보스월 백작 4세 제임스 헵번과 간통해 함께 단리를 죽인 뒤 결혼할 계획을 세웠다는 비난이 있었으나 단리가 죽기 전에 이들이 간통했다는 당시의 증거는 전혀 없다. 메리가 보스월에게 썼다는 편지와 시들을 모아놓은 이른바 '캐스킷 편지집'이 논란이 되고 있으나 그 신빙성이 매우 희박하며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증거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1566년 10월 메리는 심한 병을 앓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뒤 단리와 이혼할 생각을 했다.
1567년 2월 9일 밤 단리가 요양중이던 에든버러 외곽의 커크오필드에 있는 집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단리는 빠져나오려 했으나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이 사건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왔다. 그 가운데는 단리가 메리를 폭사시키려고 했다가 자기 덫에 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단리를 미워하는 귀족들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주장이 가장 신빙성 있다.
메리가 사전에 이 사건을 얼마 만큼 알고 있었든지 간에 그 이후에 보여준 행동은 지극히 어리석었으며 여왕을 보좌하는 훌륭한 자문관이 없음을 잘 보여주었다.
3개월 뒤 메리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의심받고 있던 보스월에게 유괴되어 겁탈당한 뒤 그와 결혼해버렸다. 애정이 바탕이 된 결혼이 아니라면 메리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을 보좌해줄 강력한 힘 없이는 스코틀랜드가 당면한 문제들을 처리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건강의 악화로 이러한 절망감은 한층 깊어졌다. 그러나 시기심 많은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이 보기에는 보스월 역시 단리와 마찬가지로 달갑지 않았다.
메리와 보스월은 1567년 6월 15일 카버리힐에서 영원히 결별했다. 보스월은 추방된 뒤 투옥당해 1578년에 죽었고, 메리는 리븐 호수에 있는 작은 섬에 유폐되어 1세밖에 안 된 아들 제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이듬해 잠깐 동안 자유를 얻었으나 랭사이드 전투에서 지지자들이 패배해 다시 도망쳐야 했다.
메리는 친척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는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그러나 메리와는 달리 정치적 간계에 능숙한 엘리자베스는 단리 사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구실삼아 이후 18년 동안 메리를 여러 감옥에 번갈아 가두며 잉글랜드에 붙잡아두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에서는 메리와 이복남매간인 제임스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잉글랜드에서의 감금생활
감금생활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신앙에서 위안을 얻고 자수를 하거나 애완견이나 새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운동부족으로 건강이 나빠지고 뚱뚱해졌으며 미모도 사라졌다. 이런 모습은 1578년 검은 벨벳 옷과 흰 베일을 쓴 그녀의 모습을 그린 유명한 초상화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메리는 부당한 감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탄원을 하고 나중에는 음모를 꾸미는 등 온 힘을 기울였다.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 군주인 엘리자베스를 왕위에서 몰아내고자 했고, 따라서 가톨릭교도인 메리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이는 메리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1586년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음모가 적발되어 가톨릭교도의 반란이 일어나자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했던 것이다.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군주였음에도 잉글랜드의 법원에서 재판과 선고를 받았다. 아들 제임스도 메리를 젖먹이시절 이후로는 보지 못한데다가 잉글랜드 왕위계승에 골몰해 있었기 때문에 이 재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메리는 1587년 피터버러 근처에 있는 포더링헤이 성의 넓은 방에서 처형당했는데 그때 나이는 44세였다.
살벌한 처형장면은 오히려 메리가 죽음에 임박해서 보여준 위엄있는 자태에 가려졌다. 그후 왕위계승에 성공한 아들 제임스는 어머니를 위해 웨스트민스터 대사원 안에 거대한 기념관을 세우고 이곳에 시신을 안장했다.
지지자들에게는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인물로, 정적들에게는 간악한 요부(妖婦)로 비친 메리는 살아 있는 동안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가리켜 "논쟁을 몰고 다니는 애"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녀의 극적인 생애는 계속해서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16세기의 요부' 메리에 대한 대중의 흥미는 지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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