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이 퍼뜨린 지 20년 만에 직장인·여성·中老年까지 동참
정보·전투·위험·실용 社會 반영… 우리 사회를 읽는 단서 제공해
남에게 불안 초래하는 凶器이자 도시文化 저해 요인될 소지 있어
-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우리나라에서 백팩이 처음 유행한 것은 1995년경이었다. 미국 유학생들 일부가 방학 동안 한국에서 메고 다니기 시작한 미제(美製) '이스트팩'이 동년배 대학생은 물론 청소년들 사이에도 널리 보급된 것이다. '신세대 담론'에 편승하여 백팩은 세대 간 구별 짓기의 상징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 학생 가방은 자취를 감추었고 시나브로 젊은 샐러리맨들도 서류가방 대신 백팩을 찾기 시작했다. 백팩을 메는 여성들도 점차 늘었고 얼마 뒤 중년 내지 노년층도 백팩의 인기에 동참했다. 최근에는 고가의 디자이너 백팩까지 합류하는 추세다. '이스트팩 현상' 20년 만에 백팩은 연령과 계층, 신분과 직업을 뛰어넘는 일종의 국민 가방이 되었다.
여기에는 일부 스타들의 선도적 공헌도 있었다. 2004년 텔레비전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 출연한 탤런트 조인성은 고급 정장 재킷에 캐주얼 백팩을 멨다. 정치인 중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시민운동을 할 때부터 양복 위에 배낭을 즐겨 멨고 요즘도 가끔 그런 행장(行裝)이다.
왜 오늘날 대한민국은 백팩 시대인가? 우선은 현대 '유목(遊牧)사회'의 상징이다. 이동이 길어지고 잦아지는 생활양식에서 백팩의 역할은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 시대의 디지털 '호모 노마드(Homo Nomad·유목하는 인간)'에게는 노트북, 태블릿, 충전기, 케이블, 마우스 등으로 가득 찬 백팩이 사무실이자 작업실이다. 굳이 이런 거창한 모바일 오피스 구축용 장비가 아니더라도 정보사회는 대체로 백팩을 환영한다. 백팩은 스마트폰을 위한 두 손의 자유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전투사회 분위기 역시 백팩 선호를 부추긴다.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에게 배낭이 필수적이듯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백팩은 왠지 미덥고 든든하다.
위험 사회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백팩에 안전식품이나 생수를 단골로 넣고 다니는 광경은 지구 종말의 날에 대비하는 이른바 '프레퍼(Prepper)족(族)'을 연상시킨다. 하루하루가 비상사태 같은 세상에서 백팩은 일종의 벙커로 활용되는 셈이다. 가끔 주변에는 생존 물품인 'EDC 가방(Everyday Carry Bag)'을 들고 다니며 도시생존전문가를 자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 더 추가하면 실용사회의 풍경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바쁜 세태에서 백팩 이상으로 범용성(汎用性)을 자랑하는 가방도 찾기 어렵다. 때와 장소나 체면을 불문한 채 물건을 담아 옮기는 가방 본연의 용도만 따진다면 백팩이 단연 으뜸일 것이다.
문제는 백팩 전성시대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무엇보다 백팩은 그 자체가 불안하고 위험한 흉기로 변할 수 있다. 지난 5월부터 서울도시철도공사는 지하철 5~8호선 전 역사(驛舍)와 전동차의 스크린을 통해 백팩 사용에 관련된 에티켓 영상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백팩이 승하차에 불편을 초래할 뿐 아니라 남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거나 옷을 훼손하는 사고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철뿐만 아니라 노상에서도 백팩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때가 많다. 나한테 편한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일본의 경우 아직도 가방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공공장소에서 본인이 통제하기 용이한 크기와 형태라는 게 업계의 이야기다.
백팩은 또한 유행의 창조와 확산이라는 도시 고유의 문화 역량을 잠식할 수도 있다. 백팩이 도시인의 복장을 단조화(單調化) 내지 하향평준화할 개연성 때문이다. 세계 정상급 도시일수록 패션 도시로서의 위상도 높은 법이다. 마침 얼마 전 미국 언어조사기관 '글로벌 랭귀지 모니터'는 2014년 세계 55개 패션 도시 순위를 발표했다. 여기서 서울은 정확하게 55위, 즉 꼴찌였다. 요 몇 년 사이 서울은 아시아권(圈) 도시 가운데에서도 맨 아래로 밀려났는데, 행여 그 책임의 일부가 백팩의 오남용(誤濫用)에 있지 않을까 의심스럽다.
백팩은 더 이상 단순한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 한국 사회를 읽을 수 있는 단서나 징후로서, 그리고 일상의 생활 문화와 도시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나 계기로서 다분히 사회적이고 충분히 사회학적인 소재로 이미 자리 잡았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첫댓글 버스에 앉아있을 때 백팩을 메고, 또는 한쪽 멜빵만 어깨에 건 채 휙 돌아서며 뒷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의 백팩에 얼굴을 맞을뻔 하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정작 백팩을 멘 인사는 그걸 의식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