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마을서 길어낸 그리움
'이가락(離家樂)'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집 떠나는 즐거움,
그러니까 여행의 즐거움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행의 즐거움은 다양하다.
멋진 풍경, 맛난 음식이 대표적이다.
동행한 가까운 이들과의 대화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고단한 일상을 잠시 떠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다.
여기 외로움을 여행이 주는 즐거움의 하나로 꼽는 이가 있다.
고개를 갸웃할지 모른다.
번잡함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는 것, 이 역시 여행이 주는 귀한 기회다.
'이가락'의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평역에서''전당포 아리랑' 등 시집과 '아기참새 찌꾸' 등 동화집으로
문명을 떨친 시 곽재구에 따르면 그렇다.
그가 2002년 낸 여행에세이집 '포구기행'(열림원)을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그만큼 고운 책이다.
"살다 보면 외로움이 깊어지는 시간이 있다."
스무 군데의 갯마을, 포구, 섬을 찾아나서 바람과 파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잃어버린 꿈과 그리움을 길어낸 시인의 여행담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는 파도들의 축제가 눈부신 화진, 옛 이야기 같은 동화마을, 땅의 마음을 아는 지심,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삶의 원칙과 슬픔과 근원의 뼈아픔들을 다 알고 있는" 지세포 등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향일암에 오르고, 순천만을 살피고, 어란 포구에 깃든다.
컨테이너와 대형 선박, 마도로스와 휘황한 불빛이 어우러진 항구 이야기가 아니다.
생존의 바다로 나갔던 낡은 목선 몇 척이 지친 몸을 누인 갯마을,
어지간한 지도에는 표시조차 되지 않는 곳들이다.
"안개처럼 가는 비가 창밖의 바다에 펼쳐지고 있었다. 불빛들이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에 봄비들이 아늑하고 포근한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아득히 먼 곳에서 빛나는 별빛 같은 것. 가까이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
삼천포항에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작은 섬,
늑도의 '초대'를 받고도 당장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시인은 이렇게 읆조린다.
어쩌면 조금은 서러워도 보이는 외로움은 성찰을 낳는다.
시인이 그랬다. "선창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혼자 먹는 밥맛의 깊이를 아는 이는 예술가가 아니면 육체노동자다."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로 비유한 이가 있었다.
남다른 예민함으로 사회의 병증, 시간의 결을 감지하는 시인의 감수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옛날 잠수함 장비가 시원치 않았을 때 공기 부족을 일찍 탐지하기 위해
토끼를 태웠다는 데서 나온 이야기다.
곽재구 시인의 글을 보면 그런 섬세함이 느껴진다.
"갈매기들은 이쁜 소의 눈빛을 하고 있다.
그들이 꾸는 꿈의 정갈함 탓이다."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갈매기 눈빛을 보고
, 거기서 정갈한 꿈을 읽고 소를 떠올릴까. "조금 외로운 것은 충분히 자유롭기 때문이야"란
가로등 불빛의 속삭임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애잔한 감상(感傷)만 넘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이야기도 있다.
지방도로에 붙은 세 자릿수 번호도 없는 도로를 따라 화포에 이른 시인이
개펄에서 맛조개를 캐는 아낙들을 만나는 대목이 그렇다.
"우산을 접었다. 가능한 한 그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무른 개펄에 무릎 위까지 푹 빠져든 시인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돼지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것을 뭐하러 찍소?" 아낙의 거친 대거리를 한다.
사람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글답게 곳곳에 깃든 문학의 향기가 그윽하다.
"저 너머 강둑으로 가고 싶어요/여러 척의 나무배가 줄지어/대나무 말뚝에 묶여 있는 저 강둑으로…엄마,
엄마가 걱정하시지만 않는다면/나는 이 다음에 커서/저 나루터의 뱃사공이 되고 싶어요…
나는 아빠처럼 엄마를 남겨두고/먼 도시로 일하러 가지 않겠어요"
인도의 시성이라는 타고르를 시인은 서해대교 인근 '바람아래 해수욕장'에서 읽는다.
그리고는 묻는다. "이곳 바다에 노을이 찾아왔다. 아시는가.
그대. 구름이 많은 날의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바람아래 세상의 뭇 삶들의 꿈은 기실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책이 나온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고운 향내가 나는 책이다.
맛집이며 지도 등 여행 정보는 없지만 시인을 따라 낯선 포구 어디쯤 헤매고 싶게 만드는
그런 책이기도 하다.
글_김성희(북 칼럼니스트)_포스팅 편집_김선희
첫댓글 저도 오래 전에 사서 소장하고 있는 책이지만 봄이 오는 길목이 되면 떠오르는 책입니다
해풍의 맛을 가장 잘 느낄수 있는 조춘에 이런 책 한권 들고 가벼운 일탈을 해보심은 어떻하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