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초역동성과 기민함
아찬 문은 자기 마음의 성향에 대한 아찬 사오의 솔직한 의견이 아주 올바른 지적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의 마음은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어서 길들이고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즉, 균형[中道]의 중심이 없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었다. 방금 우주 공간으로 치솟았던 마음이 한 순간에 땅속으로 던져졌고 또 다시 그것은 바다를 가로지르며 질주했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 그는 마음이 어느 정도 고요한 한 지점에 이를 때마다, 외부 자극에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습성으로 인하여 몹시 놀라 좌절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위에서 언급된 바 있다. 시체의 상(像)이 그 형태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파노라마로 펼쳐졌던 현상이나, 올바른 길을 발견했을 때조차도 그의 마음은 어느 한 정점에 이르면 자주 어디론가 떠나 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뻗어 나가서 전에는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던 다양한 현상들을 알아차리곤 했다. 때때로 그의 마음은 천상의 세계로 날아가서 거기서 발견되는 기쁨과 장관에 여러 시간동안 감탄하기도 했고, 어느 순간에는 지옥으로도 들어가서 그곳을 돌아보며 전생의 업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다.
그는 종종 시간을 낭비한다는 사실에는 개의치 않고 ‘현상 여행’에 시간을 보냈다. 그 단계는 아직 실제의 체험과 상상의 체험을 구분할 수 있는 차별지(差別智)를 갖추지 못했을 때였다. 그는 나중에 제자들에게 이런 종류의 ‘현상 여행’은 과도한 몰입과 자기 착각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실제 체험과 상상의 체험을 구별하는 지혜의 능력이 갖추어진 이후에만 시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의 마음은 재빠르고 역동적인 특성 때문에 일순간이라도 마음챙김을 놓치면 어느 새 달아나서 외부환경에 반응하였다. 나중에 마음이 잘 길들여지고 제어된 이후로는 의도적으로 마음을 밖으로 보낼 때 이러한 특성이 밖으로부터 메시지를 포착하는데 귀중한 것이 되었다.
지나치게 빠르고 활발히 움직이는 자신의 마음을 따라갈 수 없었던 수행 초기에 그의 마음은 자주 들락날락하며 그를 괴롭혔다. 예를 들어, 그가 몸에 대해서 발끝까지 관찰하려고 할 때, 마음은 갑자기 몸에서 뛰쳐나와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한편 마음을 몸으로 되돌려 놓으면 또 순식간에 그것은 다시 공중으로 뛰어올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다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관찰을 하기 위하여 마음챙김으로 강하게 끌어당겨야만 몸으로 복귀하게 할 수 있었다. 이 단계에서 마음 챙김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한쪽으로 치우쳐 가는 집중(定)의 상태가 깊고 강하게 나타났다. 이 상태는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져 순식간에 땅에 닿는 상황과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그러한 심오하고도 고요한 상태에서 아주 잠깐동안만 머물렀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물러나 ‘우빠짜라’[upacara, 문자그대로 ‘근접’, ‘입구에 이름’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더 낮은 다음 단계로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마음은 의식의 여러 층위를 여기저기 스치며 아무 제어 없이 흘러 다녔다.
그 당시에 그는 마음 챙김의 힘을 벗어나 더욱 재빠르게 제멋대로 달아나는 마음의 특성으로 인하여 아주 난처해하였다. 이것은 내적인 자신만의 문제였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를 심각한 좌절에 빠뜨렸다. 그래서 마음 챙김의 힘이 진전되어 변화무쌍한 마음을 저지시키는 작용이 강해져야만 했다. 과도하게 역동적인 마음과 단호히 투쟁했던 이 시기는 괴롭고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난폭한 종마와 같은 마음은 진정되었고, 일단 제어가 되면 고분고분해져서 더없이 귀중한 장점이 되었다. 마음 챙김과 지혜의 힘으로 결합된 그의 마음은 너무도 위대하여서 한량없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소원의 반지’(wishing ring)로 나타나게 되었다.
아찬은 성자다운 용기와 기민함을 갖추었고 그 자신이나 남들을 위한 수행 법에 대한 대책이 풍부했다. 그의 제자들 중 누구도 여기에 필적할 만한 제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찬과 함께 지내면서 배운 바에 의하면 그는 정말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용감했고 그에 부합하는 냉혹함도 갖추고 있었으며, 수행 가풍은 좌절하지 않고 굽힘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마음속의 종마(번뇌)를 길들이는 법은 상황에 맞추어서 능수 능란하게 다양하다는 점, 즉 상황에 따라 때로는 사납게 때로는 마음을 누그러뜨려서 부드럽게 다루었다. 또한 이것은 마음을 구속하는 모든 장애에 대항해서 임기응변적이고 도전적인 마음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마음은 잠시만 주의를 소홀히 하면 열심히 수행하는 자를 낙담시키거나 흐트러지도록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가지 구실과 불길한 이유를 만들어 낸다.
아찬은 이 모든 고통과 지연(遲延)은 다음에 올 과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언과 도움이 되는 귀뜸을 해줄 훌륭한 스승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자력으로 성찰한 사람으로, 어떤 장애물이 그의 앞에 다가와도 겁내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세력들이 그를 비난해도 문제삼지 않으며 용기와 인내를 갖고 투쟁하는 고독한 전사의 삶이었다. 그에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교훈을 줄 수 있는 선배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 점을 제자들에게 자주 말하며, 자신의 조언과 동반 아래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이점(利點)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너무 자신만만하지 말 것을 경고했으며, ‘만약 너희들에게 어떤 의심이 생기면 필요한 도움과 충고를 줄 수 있도록 내가 바로 거기에 있겠다.’고 말했다.
수행 초기에 아찬은 나콘 판놈 읍의 변경까지 여행하였다. 그 뒤에 라오스에 있는 타 카엑의 숲과 마을을 건넜고 거기서 어느 정도의 내면의 지복과 평화를 얻었다. 그 지방은 태국의 호랑이보다도 더 끔찍하다고 알려진 사나운 호랑이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호랑이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으로 그곳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을 자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이러한 사나운 호랑이에 대해서 다소 무관심했다. 자기방어의 훈련은 받아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최근에 자신들의 친구들 중 몇 명이 바로 눈앞에서 호랑이에게 잡아 히는 것을 보고서도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호랑이가 여전히 배회하고 있고 친구들이 죽은지 오래되지 않은 그 장소에 위험을 무릅쓰고 가곤 했다. 아마 이런 상황이 ‘지나치게 허물없이 놀면 체모를 잃는다.’는 속담에 해당될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위험에 처한 한 친구를 돕기 위해 결코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숲에서 밤새 머무르게 되었을 때 만일 한 친구가 호랑이에게 습격을 당하기라도 하면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각자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사방으로 도망쳤고 그 불행한 희생자는 혼자서 죽음을 맞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모여서 그날 밤을 보낼 가까운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다. 바로 전에 일어났었던 무서운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단지 아이들 정도의 지능밖에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거의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은 듯했고 대단히 무심하였다. 이 지방 사람들과 알고 지내며 이들을 경험해 본 필자인 나로서는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베트남 사람들은 때때로 호랑이로 들끓는 외딴 지역에서 제재업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혼자이건 여럿이건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곤 했다. 그들은 밤중에 마을로 들어오든 캠프로 돌아가든 혼자서도 개의치 않고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두려웠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태국의 호랑이들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으며 심지어 어떤 호랑이들은 사람을 무서워하기도 하지만, 베트남에 있는 호랑이들은 거의 대부분 사람을 잡아먹고 훨씬 더 크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베트남 호랑이들은 한층 더 사나워서 숲에서 밤을 지새야 하는 여행자들은 돼지우리와 같은 울타리를 만들어야 하며 몇몇 지역에서는 마을 사람들조차도 밤에는 호랑이가 공격을 할까 봐 감히 집을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그들은 혼자서 숲에 감히 가지 못하는 타이 사람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아찬이 호랑이가 들끓는 지역에 머무른 동안에는 그를 괴롭히는 호랑이가 한 마리도 없었다. 단지 호랑이들이 지나간 자취가 보이고 밤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를 위협하거나 잡아먹으려고 실제로 나타난 호랑이는 없었다. 아찬 역시 호랑이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이와 같은 사나운 짐승보다는 현생에서 고통의 소멸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처럼 위험한 지방을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와 같은 여행에서의 일들을 단순히 지나가는 일상사로 취급했을 뿐 두려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아찬은 북동부 촌락과 읍 전체를 만행하였다. 수행 초기부터 시작된 이 지역의 여행은 자신에게 미치는 외부적인 자극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역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내부의 기질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후에 타이 중앙부로 내려와서 우기 결제철 동안은 파쑤뫈 사원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방콕 보롬니바 사원에 있는 법력이 높다고 소문난 우팔리 구누파마카리야에게 가르침과 충고를 구하러 갔었다.
우기 결제철이 물러간 후 롭부리 읍으로 올라가서 파이쾅 동굴, 카오 프라 감 산, 싱토 동굴과 같은 여러 동굴에서 머물렀다. 이러한 모든 지역에서 수행에 정진을 거듭한 끝에 통찰력을 균형 있게 발전시켰다. 그의 마음은 내면적인 그리고 외면적인 경계에 대비하여 꾸준히 강화되었고, 명상이 계발됨에 따라 통찰력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한 마음에는 모든 것이 더 높은 성장과 더 깊은 통찰력을 위한 교훈으로 작용했다. 이따금 그는 우팔리의 충고를 구하러 보롬니바 사원에 내려가곤 했다. 그 후에 몇 번이고 홀로 떨어진 외딴 곳을 찾아 나서곤 했다. 이번에는 나콘 나욕 읍의 카오 야이에 있는 사리카 동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