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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6일 화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녹]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또는 [백] 성녀 헤드비제스 수도자 또는 [백]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동정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셨으니,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할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5,1-6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2 자, 나 바오로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3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본 바리사이는 놀랍니다. 그는 예수님을 율법의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며 가르침을 들으려 했는데 율법을 어기시는 모습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며 잔과 접시의 겉만 닦지 말고, 마음속에 숨겨진 탐욕과 사악함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내면의 추한 모습을 가린 채 위선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거짓을 알고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과 인간적인 잣대를 중요시하며 율법 규정에 매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선함을 보시고 사람을 판단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며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또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헌금에 담겨 있는 믿음과 정성을 알아보고 칭찬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 자체로 의로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만들어 하느님의 은총을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긴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사랑으로 행동하게 만들어 율법을 완성시킵니다. 외면적인 행위와 계명의 세부 규정에 집착하는 사람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힙니다. 하느님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은 죄를 불러일으키는 계명의 준수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영혼 안에 가득 채우며 살아갑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과 영혼과 의지도 깨끗이 씻읍시다! 한 수도원에 들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들고양이지만 색깔도 연한 갈색에다 물결무늬까지 아주 잘 나왔고, 더구나 꽤나 붙임성이 있었습니다. 수사님들과 자연스레 친해진 고양이는 마치 집고양이처럼 편안히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수사님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주제는 고양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였습니다. 결과는 한 식구로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한식구로 받아들여진 고양이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식탁 위에도 올라오지를 않나? 기도 시간에도 성당에 들어와 다른 수사님들을 따라 꾸벅꾸벅 졸지를 않나? 할 수 없이 수사님들은 제2차 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번에도 주제는 고양이였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다들 그간 고양이 한마리로 인해 겪었던 마음의 고통을 털어놓았습니다. 장시간에 걸쳐 열띤 논쟁이 거듭되었고, 마침내 꽤 두툼한 볼륨의 규칙서가 마련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꽤나 웃기는 예화입니다만, 사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규정이며, 정결 예식 규정들도 다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결 예식 규정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패라다임을 한 마디로 산산조각내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복음 11장 39절)
하루에 몇번 정도 손을 씻으시는가요? 돌아보니 가난했고 위생관념이 별로 없던 어린 시절 기껏해야 하루 두세번 정도 손을 씻은 것 같습니다. 아침에 세수할 때 저녁에 자기 전에...지금 생각하니 기가 막힌 일이기도 한데, 매일 샤워나 목욕을 하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손씻기가 하나의 자연스런 문화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물론이고, 화장실 다녀올 때 마다, 그리고 식사 전후...틈만 나면 손을 씻습니다.
환우들을 방문차 병원에 가면, 어디서나 눈에 띄게 손씻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손만 꼼꼼하게, 뽀득뽀득 잘 씻어도 다양한 질병으로부터 예방할수 있게 된다니, 틈만 나면 손을 잘 씻어야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들어갈수록 여기저기 신경써서 씻고 닦고 관리하는 것, 참으로 꼭 필요한 노력임을 절감합니다.
이런 면에서 유다인들은 참으로 시대를 앞서 살았습니다. 의료 수준이 열악하던 시절, 틈만 나면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절, 잘 씻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그들은 일찌기 파악했던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교육시 가장 먼저 잘 씻는 예절부터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너무나 지혜로운 모습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이러한 위생 관념은 그들의 율법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고, 정결예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식사전후, 외출전후뿐만 아니라, 기도나 예식 전에도 손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전, 몸뿐만 아니라 영혼과 정신도 씻는다는 아주 순수하고 기특한 의도였습니다.
정결례는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점점 확대되어, 인간이 사용하는 잔이나 그릇등 생활용품에게도 적용되었고, 나중에는 아주 엄격하게 적용되어, 이를 어길시 강경한 질타와 처벌이 뒤따랐습니다.
위생적인 삶의 습관으로 시작된 정결예식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능가하고, 마침내 신앙의 근간인 하느님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위생적인 삶을 위해 손과 발과 잔을 자주 씻으면 좋겠다는 습관이, 거룩한 사람인가 불결한 사람인가 가름하는 삶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웃기지도 않는 주객전도 현상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 아주 강하게 유다인들의 그릇된 율법주의와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을 질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복음 11장 40~41절)
우리네 인생에서 보다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 늘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늘 점검해봐야겠습니다.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좋으신 우리 주님, 사랑스런 동료 인간, 불멸의 사랑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설때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과 영혼과 의지도 정결하게 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돈은 똥이다>
몇 년 전 SBS ‘궁금한 이야기 Y’에 한 시골 할머니 사연이 방영되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눈이 자주 와서 눈 치우는 게 일인 강원도 정선 산골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마을 사람들이 어느 한 집 눈을 열심히 치워주고는 도망치듯 사라져버립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누구야! 누가 왔다 갔어!”라고 호통을 치시는 90세 호랑이 할머니에게 들키면 혼이 나기 때문이랍니다(이인옥 할머니는 2015년 92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할머니는 50대 때부터 척추 문제로 허리가 굽으셨지만 생활에 불편이 없으시고 후레쉬만 있으면 웬만한 것도 다 보일만큼 정정하십니다. 그런데 귀가 약간 어두운 할머니가 쉬시는 동안 마을 분들이 드나들면서 연탄 갈아주고, 반찬 가져다주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할머니에게 들키면 큰일 나는데도 마을 분들은 왜 이런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일까요?
할머니는 본인의 땅(16000제곱미터 상당)과 집을 모두 마을에 기부하고 기초수급 지원비만으로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하루에 한 번 배달되는 기초수급 도시락을 3등분 하여 하루 식사를 해결하십니다. 그리고 손님이 오면 그것마저도 나누어먹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공덕비까지 세워주었는데,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피난 내려오시면서 가져온 재산과 농사지은 돈으로 마을에 방제초등학교를 세우셨고 할머니는 굶어서 소나무 껍질을 뜯어먹을 지경이었던 탄광촌 150명의 아이들에게 매일 밥을 해 먹이셨다고 합니다. 이분들이 아이들에게 이런 관심을 가진 이유는 딸 셋을 피난통에 굶주림으로 모두 잃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이들을 당신들 아이들처럼 대하며 사셨던 것입니다. 아직도 할머니는 기초수급 지원비를 모은 돈으로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누구든 손님이 찾아오면 몇 만원을 쥐어주시며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마음이잖아, 서로...”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머니에게 돈은 마음이었습니다.
이인옥 할머니는 자주 돈은 똥이라고 하셨습니다. 쌓이면 악취를 풍기지만 뿌리면 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똥이 배출이 되지 않으면 변비에 걸리고 결국 관장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오며 더 심하면 생명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변비가 되지 않기 위해 몸은 설사와 같은 방법으로 변을 빼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적당히 먹고 먹은 만큼 적당히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보내는 것들이 거름이 되어 주위에 양식이 풍성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는 일이란 선행까지도 남들에게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며 불편해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썩었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바리사이는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더러운 사람입니다. 그 속을 더럽히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는 돈입니다. 돈은 쓰일 때 가치가 있고 자신에게 머물러 있을 때는 독이 됩니다. 똥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뉴스에 보니 노키아 핸드폰을 17년 간 사용하고 한 달 용돈 11만원으로 살며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 씨가 자신의 전 재산 8천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영화 한 편 출연하는데 100억 이상씩 받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산이 자신 것이 아니며 잠시 보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있으면 사치스럽게 살고 또 그렇게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하려는 일부 사람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는 삶입니다. 과연 누가 세상을 즐기며 사는 것일까요?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편법이라도 쓰려는 사람들일까요?
집착이 없어야 즐길 수 있습니다. 떠나보낼 줄 알아야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연예인을 너무 좋아하면 그 연예인이 죽으면 자신도 따라죽게 됩니다. 이는 사로잡힌 것이지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즐기려면 자유로워야 합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분명 밖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돈이 마치 사람 속에 담긴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돈도 집착하면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과 하나가 되면 즐길 수 없습니다. 축구경기를 보며 분에 못 이겨 싸움을 한다든가 컴퓨터 게임을 하며 화가 나 컴퓨터를 부수는 정도가 되면 즐기는 게 아니고 사로잡힌 것입니다. 사로잡힌 사람이 노예생활 하면서 어떻게 삶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인생을 즐기려면 인생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은 아깝지 않게 떠나보낼 수 있는 상태여야 합니다. 이겨도, 져도 즐길 수 있어야 즐기는 것입니다. 돈을 즐기려면 돈이 있어도, 없어도 상관이 없는 상태여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어야 돈이 더 많이 흘러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깨끗함은 이렇듯 집착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런 깨끗한 마음만이 참으로 이 세상을 자유롭게 살고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뱃속에 똥이 가득 찬 사람의 불안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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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녀 헤드비지스(Hedwig)
신분 : 과부, 수녀
활동연도 : 1174?-1243년
같은이름 : 야드비가, 헤드비가, 헤드비그, 헤드비제스, 헤드비히, 헤트비히
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는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안데흐스(Andechs) 성에서 베르톨트(Berthold) 공작의 여덟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코니아(Franconia)의 키칭겐(Kitzingen)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세 때에 18살의 폴란드 왕자이자 후에 슐레지엔(Schlesien, 실레지아)의 공작이 된 하인리히 1세(Heinrich I)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매우 열심하고 또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내의 신앙생활과 자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브로추아프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의 설립을 후원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수도회에 아낌없는 후원을 보냈다.
또한 1202년 노이마르트(Neumarkt)의 병원에서 나환자 여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의 활동에 감동을 받아 트레브니츠(Trebnitz)에 있는 자신의 땅에 시토회 수녀원을 지어 기부하였다. 이 수녀원은 슐레지엔 지방에 세워진 첫 번째 여자 수도원이었다.
성녀 헤드비지스와 하인리히 1세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다. 1238년에 남편과 사별한 성녀 헤드비지스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하여 큰 덕을 쌓았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물질적, 영성적 이익을 위하여 늘 헌신하였으나, 자기 자신은 극도의 가난 속에서 하느님만을 섬겼다고 한다.
헤트비히, 야드비가(Jadwiga) 등으로도 불리는 성녀 헤드비지스는 1243년 10월 15일 트레브니츠의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나 수녀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성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1267년 3월 26일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슐레지엔 지방의 수호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et Mary Alacoque)
신분 : 수녀, 환시자
활동연도 : 1647-1690년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마르가리타,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알라콕
클로드 알라코크와 필리베르트 라멩의 딸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는 1647년 6월 22일 프랑스 샤롤레 지방 베로브르의 로트쿠르에서 태어났고, 그녀가 8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샤롤레의 성녀 클라라(Clara) 수녀회의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그러나 15세가 될 때까지 5년 동안은 류머티즘 열로 인하여 자리에 누워서 지냈는데, 어릴 때부터 성체께 대한 신심은 남달리 뛰어났다. 그녀는 결혼을 거절하고 1671년 6월 20일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그 이듬해 11월 6일 ‘마르가리타 마리아’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서약을 하였다. 그녀는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유머 없는 수녀로 통했던 것 같다.
그녀는 1673년부터 1675년 사이에 그리스도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러한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당신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고, 특별히 첫 번째 금요일에 영성체할 것과 매주 목요일 밤에 성시간을 갖고 구속사업에 참여하라는 신심을 그녀에게 교육시켰으며, 예수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구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하였으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신의 수녀회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수녀원의 고해신부였던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de la Colombiere, 2월 15일)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콜롱비에르 신부는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이었는데, 그는 마르가리타의 환시가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1684년 멀랭 수녀가 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수도원 내의 반대도 종식되었으며, 후일 그녀는 수련장이 되었다.
1686년 초에는 수녀원에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예수 성심께 봉헌된 경당이 수녀원 뜰에 세워졌고, 곧이어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전세계의 성모 방문 수녀회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마르가리타 마리아는 1690년 10월 17일 수녀원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1864년 9월 18일에 시복되었으며,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와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8월 19일) 그리고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1765년에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선포되었으니, 그녀의 사후 75년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