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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들/ 마태복음 13:18-2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들(마태복음 13:18~23) -마경훈목사 - YouTube
기독교인들에게 설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설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듣는 분들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설교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설교의 특징은 몇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①현장 설교였습니다. 고정된 장소에서 설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두루다니시며 설교하셨습니다(마 9:35).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사역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 하신 적도 있으셨고 또 삶의 현장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주님은 산 위에서도 설교하셨고 집에서도 설교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바닷가에 앉으셔서 설교하셨습니다. 주님의 설교는 현장 설교였습니다.
②쉬운 설교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쉬웠던 이유는 유대인들의 삶과 밀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중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생활 밀착형 설교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흔히 ‘씨뿌리는 비유’라고 하는데 농사와 관련된 설교였지만 전문성을 가진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사변적인 설교보다는 현실에 바로 적용되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는 쉬워야 합니다.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은 많이 배웠기 때문에 어려운 철학적인 용어나 전문가들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전문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회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이론을 다 알고 계셨지만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설교를 하셨습니다.
③비유 설교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삶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을 비유로 사용하셔서 설교하셨습니다. 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7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 비유들 중에는 어려운 비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들입니다. 마태복음 13:34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예수님은 비유로만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만으로 설교를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를 깨닫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흔히 ‘씨 뿌리는 비유’라고 하는 비유를 다루겠습니다. 사실 저는 ‘씨 뿌리는 비유’ 보다는 ‘네 종류의 밭’의 비유라고 하고 싶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적어도 4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씨앗, 둘째는 밭, 셋째는 물, 넷째는 기후입니다. 오늘은 밭의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밭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게 되니 새들이 와서 그 씨를 먹어 버렸습니다. 어떤 씨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흙이 깊지 않으니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렸습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아서 씨가 자라지 못했습니다.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어떤 것은 100배, 어떤 것은 60배, 어떤 것은 30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오늘 설교는 네 가지 밭 중에서 좋은 밭을 제외한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한 이유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를 나누겠습니다.
1. 악한 자의 역사 때문입니다.
기독교 고전 중에 최고로 꼽히는 책이 천로역정입니다. 천로역정의 저자는 존 번연입니다. 존 번연이 이 책을 쓰기 전에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주일이면 교회에 나갔으나 마음에 감동도, 기쁨도 없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분명한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예배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왜 나에게는 확신도 없고 기쁨도 없는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고민하던 가운데 마태복음 13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밭과 씨앗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말씀을 통해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의 소유자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앉아 있었고, 예배는 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도 좋은 밭이 되고 싶습니다.” 이 시대에도 존 번연의 깨달음과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어떤 분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더니, 자기는 자기를 믿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사람 믿을 게 있습니까?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망치로 머리 한 대 맞으면 바보가 됩니다. 자기를 믿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는 영적인 흑암 가운데 있으며 악한 영에게 이끌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악한 영에게 이끌리고 있다고 하는 말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만 성경은 제 말을 증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2:2입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여기서 이방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은 악한 영이 끄는 대로 우상에게로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새를 19절에서는 악한 자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를 누가복음 8:12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새는 악한 자고 악한 자는 마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것입니다. 말 그대로 복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영원한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드리면 그는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도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갖습니다. 사실 복음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요.
사람들이 복음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그 사람 속에 마귀가 만들어놓은 견고한 진 때문입니다. 고후 10:4,5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마귀가 사람들에게 만들어 놓은 견고한 진은 모든 이론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높아진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모든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거나 마음에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도 고집을 부리고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마귀가 만들어놓은 견고한 진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마귀에게 말씀의 씨앗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2:5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대부분이 아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요. 유머 같지 않은 유머 하나 하겠습니다. 피차 고집이 센 부부가 살았습니다. 서로 절대 상대의 말을 안 들었습니다. 둘은 아주 팽팽한 관계로 평생 재미없게 살다가 남편이 먼저 죽었습니다. 여자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죽었구나. 이제는 고집 못 부리겠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입관식을 하다가 관이 툭 떨어지는 바람에 남편이 깨어났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나 살아났어!”라고 말하자 여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고집 부린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 의사가 죽었다면 죽은 줄 알고 가만히 있지 또 고집 부리고 있네.”
복음을 안 믿으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감동이 와도 안 믿습니다. 지적인 동의가 와도 안 받아드립니다. 왜 그런 고집을 피울까요? 견고한 진 때문입니다. 고집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마귀가 말씀을 빼앗는 것입니다.
C.S 루이스(C.S Lewis)라는 분은 『악마의 편지』라는 책에서 이렇게 잘 설명해줍니다. 어떤 노신사가 도서관을 찾아갔습니다. 도서관에 들어간 노신사는 여러 가지의 책을 뒤적이다가 신앙에 관한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그 노신사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악마가 찾아왔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점심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점심이나 먹어.” 그 순간 노신사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식탁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또 갑자기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그런 생각을 하자 악마가 다시 그 마음속에 속삭입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그런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나 끝내.” 점심식사가 끝난 후에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자 악마가 다시 속삭입니다. “오늘은 너무 바빠. 그런 것은 나중에 한가할 때 생각해.” 노신사는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다른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노신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 노신사가 자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내 마음속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마귀가 내 마음속에 만들어놓은 견고한 진을 깨지 못하고, 마귀에게 말씀의 씨앗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귀는 쉬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견고한 진을 만듭니다. 잘못된 이론, 세상적인 가치관 등을 사용합니다. 치명적인 것 중에 하나는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교우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부정적인 말이 여러분 안에 부정적인 견고한 진을 만들어서 여러분이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마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만들어준 사람은 마귀의 사자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2.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6절에 보면 돌밭이 나옵니다. 일부의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 밭은 흙이 깊지 못하므로 곧 싹이 나오지만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립니다. 20,21절에서는 돌밭을 설명해줍니다. 돌밭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곧 넘어지는 자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뿌리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하지만 그 말씀으로 인하여 오는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신앙을 포기합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몇 년 전에 이수자권사님이 전도해온 택시 기사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교회에 나오자마자 곧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택시 운전을 하면서 극동방송을 틀고 다니며 매우 행복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남은 인생을 드릴 것 같이 말했습니다. 한 번은 예배 중에 성령님이 임하시니 견딜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택시 운전을 하다가 작은 사고가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작은 환난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분은 그 작은 환난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저는 그분을 생각하면 돌밭이 생각납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서 돌아다닙니다. 한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쉽게 이동합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합니다. 이런 사람은 열매가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열매 같으나 속은 비어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주님을 떠납니다. 또 한 부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잎이 푸르고 청청합니다. 그들은 어려움이 와도 견고합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고, 교회를 떠나지 않으며 자기 자리를 잘 지킵니다. 예레미야 17:8입니다.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사람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은 신앙입니다. 뿌리가 깊으니 더위와 가뭄 같은 환난과 박해가 있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잎이 청청하고 결실이 그치지 않습니다.
제발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마시고 견고한 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어린이 놀이터에 가면 시소가 있습니다. 영어로 seesaw입니다. 시소는 두 단어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보이다의 현재형 ‘see’와 보았다는 뜻의 과거형 ‘saw’입니다. 직역하면 “보인다! 보았다!”란 뜻입니다. 올라가면 보이고 내려오면 본 것은 사라지고 과거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시소를 타듯이 하면 안 됩니다. 환경에 따라서 “믿는다! 믿었다! 믿는다! 믿었다!”하면 안 됩니다. 영원한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 있더라도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되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무는 해에도 걱정 없이 주만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신앙생활은 고속도로가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맞습니다. 신앙생활은 형통하고 평탄한 길만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넓은 길로 가지 않습니다. 좁은 길을 선택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주님을 잘 믿으면 고난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고난의 상징이죠. 신앙생활이 힘들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길에 영생이 있기에 끝까지 예수님을 믿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천국은 가야 하니까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고난이 없는 영광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에 보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오직 주님께 뿌리를 내리야 합니다. 사람이나 체험에 뿌리를 내리면 안 됩니다. 축복이나 감정에 뿌리를 내려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3. 세상의 염려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앗이 나옵니다. 가시가 자라면서 씨앗의 기운을 막습니다. 그래서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22절에 보면 주님께서 가시가 씨앗의 기운을 빼앗듯이 우리의 신앙의 기운을 빼앗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염려가 가득하고 재물의 유혹을 받는 사람들은 신앙의 기운을 빼앗기기 때문에 영적인 기운이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멍 때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를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의 기운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찬송을 하거나 예배를 드리는데 아주 형식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기운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아주 산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시 신앙의 기운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주의 일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데 아주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기운이 약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의 뜻을 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의 기운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이번 대지에서는 신앙의 기운을 빼앗는 것 중에서 염려를 다루겠습니다. 우리가 세상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①염려는 말씀의 결실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실을 하려면 세상 염려를 극복해야 합니다.
②염려는 마음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염려하면 마음이 나뉘기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마음을 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염려하는 사람은 염려의 대상에게 마음이 빼앗기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③염려한다고 뾰쪽한 수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27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키가 크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 년 때 반 학생이 70명이었습니다. 교실 자리 배치는 키 순서대로 했는데, 저는 뒤에서 두 번째 앉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학생이 60명이었고 역시 자리 배치는 키 순서대로 했는데, 저는 앞에서 두 번째 앉았습니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친구들은 키가 자라고 저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저는 점점 앞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청소년기의 남학생에게 키가 크지 않는 것은 큰 염려거리였지만 염려한다고 키가 크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염려하는 대신 무엇을 해야 할까요?
①기도하십시오. 빌립보서 4:6,7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기도로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②맡기십시오. 베드로전서 5:7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염려를 주께 맡기면 주께서 돌봐주십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상대에게 맡기는 것은 그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함께 사역을 하던 전도사님의 아들이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그 아이는 젖병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놀았는데 희한하게도 젖병을 저에게만 맡겼습니다. 놀다가 저를 보면 젖병을 맡기고 놀았고, 우유가 먹고 싶으면 저에게 와서 병을 달라고 하고 우유를 먹고는 또 저에게 맡겼습니다. 그 아이는 저를 믿었습니다. 제가 자기 우유를 안 먹고 잘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맡긴 것이죠. 저는 그 아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저를 믿어주니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염려를 맡긴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염려를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능력을 믿기 때문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맡기면 그것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충만하셔서 내 문제를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걸 믿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염려하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런데 날이 훤히 밝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되게 안 믿어지네...”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를 맡겼느냐 안 맡겼느냐로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십니다.
4. 재물의 유혹 때문입니다.
22절에서 주님께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재물의 유혹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치한 유머 하나 더 하겠습니다. 한 요술쟁이가 세상을 떠나면서 딸 셋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너희의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줄 테니 말해 보아라.” 첫째 딸은 스타가 되고 싶다고 해서 인기가 좋은 스타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둘째 딸은 왕이 되고 싶다고 해서 왕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욕심이 많은 셋째 딸은 스타도 되고 싶고 왕도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술쟁이는 셋째 딸을 스타킹이 되게 해주었답니다.
모든 죄와 고통의 근원은 욕심입니다. 야고보서 1:15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아담과 하와는 욕심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욕심 그리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유혹을 받아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욕심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특히 재물의 욕심에 주의 하십시오. 욕심 중에 가장 흔한 것이 재물의 욕심입니다.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중에 하나가 재물입니다. 하지만 욕심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절대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재물이 있습니다.
①남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절대 남의 것에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국민의식을 높게 보는 것 중에 하나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랍니다. 외국에는 우리나라처럼 노점에 물건을 꺼내놓고 파는 경우가 드뭅니다. 훔쳐가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들이 놀라는 것 중에 하나는 카페 테이블에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놓고 화장실을 가는 것이랍니다. 외국에서는 금방 사라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중국 7조 부자가 사형을 당했답니다. 그는 중국의 조직폭력배 두목이자 재산 7조 원대 광산 재벌이었습니다. 그는 경쟁 관계에 있는 8명을 살해하는 등 11개 혐의로 조직원 4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펑펑 울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노점이나 작은 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돌보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은 7조였습니다. 7조면 7만 명에게 1억씩 나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는 남의 것에 욕심을 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고 사형을 받은 것입니다.
②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물건에 손을 안 대는 것은 좋은 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라기 3:8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 것을 도둑질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금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려면 십일조와 헌금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③분수에 지나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안배하심임을 믿고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욕심을 부립니다. 그래서 만족이 없고 불행한 삶을 삽니다. 분수를 알고 만족할 때 행복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낚시를 하다가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죽어서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 고기가 자기 입으로는 먹을 수 없는 큰 고기를 먹다가 그것을 삼키지 못하고 입이 막혀서 죽어 있더랍니다. 그 물고기는 분수에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가 죽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기뻐하며 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욕심이 자기를 죽입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빵빵해집니다. 그런데 바람을 계속해서 주입하면 결국 풍선이 빵 터집니다. 욕심이 우리의 인생을 풍선이 터지듯이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항상 만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는 세 종류의 밭을 가지고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살펴봤습니다.
1. 악한 자의 역사 때문입니다.
2.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의 염려 때문입니다.
4. 재물의 유혹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