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65
1월9일[주님 세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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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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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4M8AL-j-Rs (신기훈 그레고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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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세례!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겠다는 표현!>
세례(洗禮)! 말마디 그대로 더러워진 몸과 영혼을 씻는 예식, 죄 사함의 의식이요 전례입니다. 그런데 죄나 오점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티 없으신 하느님의 외아들, 무죄하신 어린양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르단강을 찾아오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세례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한갓 피조물인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너무나 황송해서 당황스러웠던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오복음 3장 14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오복음 3장 15절)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지극한 자기 낮춤의 표현인 육화 강생인 성탄에 이어 다시 한번 극단적 자기 낮춤의 명료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듯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죄인인 인간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 우리의 죄와 타락이 너무나 안타까우신 나머지, 우리의 일상사에 늘 현존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 곧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 애틋한 마음을 지니신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주님 세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과 동고동락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 여정을 동반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토록 자신을 한없이 낮추셔서 구질구질한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낮추어, 우리보다 가난하고, 우리보다 더 고통받고 있고, 우리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 사이로 들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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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례는 은혜를 갚아나가는 출발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여사는, 1914년 평안북도 운산 태생으로,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평생의 반려인 정일형 박사를 만나 결혼했지만, 남편이 신학교 교수로 근무하던 1942년, 강의에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이길 확률은 희박하다.”라고 한 것이 국가원수모독죄가 되어서 감옥에 끌려갔고, 결국 생계를 꾸리기 위해 교사를 그만두고 이불 장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가위의 날이 잘 들지 않아 “날이 잘 드는 가위 하나만 있었으면…” 하는 것이 이태영의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이불보를 만드느라 밤새 가위질을 하고 낮에는 이불을 이고 집집마다 다니며 팔았습니다. 전차 삯을 아끼려고 이불 보따리를 이고 수십 리를 걷는 날이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광복이 될 즈음에 감옥에서 나와 아내의 손을 잡은 남편은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습니다. 아내의 오른손 엄지가 90도 넘게 뒤로 젖혀지고 검지와 중지도 크게 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일제 말기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를 죄다 쓸어가 이불보를 자를 제대로 된 가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날이 무디기만 한 가위질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손가락이 휘어 기형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아내를 위해 이제 자신이 무거운 보따리를 바꿔질 때였습니다. 남편의 격려로 이태영 여사는 1946년 서른셋의 나이로 법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서울대학교 역사 최초의 여대생이자 주부학생으로 입학한 이태영은 가방을 두 개 들고 다닐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1949년 8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첫 여성이 되었고 한국의 첫 여성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훗날 남편 정일형 박사는 외국을 나가거나 멀리 여행을 다녀올 때면 아내를 위한 선물을 꼭 하나씩 사 왔는데, 그것은 바로 가위였습니다. 잘 드는 가위 하나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아내의 옛 소망을 그렇게나마 풀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 모은 가위가 200개가 넘었습니다. [참조: 부부 가위 이태영 정일형|작성자 고야]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날입니다. 세례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보증인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성령님을 먼저 받고서 하느님으로부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인정받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전부로써, 성령님을 주신다는 것은 아드님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사랑에 비해 예수님은 아직까지는 아버지를 위해 한 것이 특별하게 없으십니다. 사실 세례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은혜를 조금씩 갚아나가시기 시작하십니다. 공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아버지께서 베푸신 사랑을 갚으십니다. 즉 받으셨던 성령님을 아버지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혹은 성령님을, 완전히 보답해 드렸을 때, 혹은 돌려드렸을 때, 세례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태영 여사는 남편을 위해 손가락이 기형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훗날 정일형 박사는 아내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녀의 공부를 돕고 그 감사의 마음을 매번 가위를 사다 줌으로써 표현했습니다. 정일형 박사가 받은 사랑이 성령님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갚아나가는 사랑도 성령님입니다. 그 사랑의 증표 안에서 둘은 더욱 완전한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의 상징입니다. 죄의 땅 이집트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탈출하게 해 주셨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도 여전히 사막입니다. 그 세례는 비로소 여호수아를 통하여 요르단강을 건널 때 완성됩니다. 그전까지는 하느님의 완전한 백성이 되기 위해 이전의 자신들을 죽이는 작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피와 물을 흘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피와 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그 은혜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가도록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받은 세례를 완성해야 합니다. 세례는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긴 여정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완전히 봉헌되기까지는 우리가 받은 세례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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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어느덧 4년이 되었습니다.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회보장번호(SSN)’가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야 다른 것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이 있습니다. 국내선 비행기를 탈 때도 필요하고, 운전면허증은 신분증의 역할을 하기에 있으면 좋습니다. ‘은행계좌’를 개설합니다. 은행계좌를 통해서 급여를 받기도 하고, 신용카드 결제를 합니다. 미국교회에서 사목하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에 속한 교구로부터 ‘사제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부르클린 교구로부터 사목에 대한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문사의 일도 하지만 다른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론인으로 등록하여 5년 동안 있을 수 있는 비자를 받았지만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은 30개월만 비자를 받기에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 한국엘 다녀오기도 합니다.
어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3명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 드렸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유대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도 고쳐주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도 칭찬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율법학자가 물어보았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유대인인 레위나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서 한국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대학은 논문을 통과한 사람에게 학위를 수여합니다. 대학은 학위를 수여할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 대학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합니다.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추기경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추기경님께 학위를 수여한 대학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교황님께서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황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학교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오히려 세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회개를 촉구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과정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제 세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그래서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가브리엘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는 지난날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내가 받은 세례의 축복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세례받은 신앙인으로 충실히 살도록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하늘의 소리로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계심을 믿게 하셨나이다. 또한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종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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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의 세례 축일은 전례 개혁을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네 복음에 모두 일치하여 강조하는 것과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사이의 관계에 있다. 이 때문에 동방 전례에서는 오늘 성세수가 축성되고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는다. 주의 세례 축일은 주님 세례의 사명을 알아들으면서 또한 우리가 받은 세례의 사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복음: 마태 3,13-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다.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의 태도는 요한 자신의 놀라움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렇게 당신을 낮추셨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초기 교회 신자들의 놀라움이기도 하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표지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신을 낮추시어 죄가 없으신(요한 8,46) 당신과 죄 많은 인간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심이었다. 또한 세례를 받으시는 행위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1베드 2,24) 당신 자신의 몸을 바쳐 인간의 죄를 모두 없애기 위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행위와 같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라고 세례자 요한은 위엄 있게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없애시는 임무를 지금 그리고 당신의 생애 모든 순간에 수행하여 성취하신다. 그러기에 세례 드리기를 사양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모두 이루어진다.”(15절). 이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신선하고도 철저한 충실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러 오셨고 그분 자신이 맨 먼저 그 뜻을 생활화하신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렇게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고, 따르셨기 때문에 그분의 순명이 첫 아담의 불순명의 죄로 파괴된(로마 5,19 참조) 태초의 질서를 회복시키신다.
이렇게 당신을 겸손되이 낮추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으시며 아버지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17절)로 선포하시어 메시아로 들어 높이신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16절)라는 것은 상징적이며 암시적인 말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다시 제 자리를 찾게 되고, 메시아이신 그분을 통하여 인간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을 활동케 하시는 성령께서 예수 안에 현존해 계신다는 사실과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은 당시의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사상과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겸손과 고통으로 점철된 메시아사상이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러한 메시아니즘을 울리고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이 말씀은 죄로부터 당신 백성을 해방하기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메시아가 짊어지게 되는 고통과 능욕과 수치의 사명을 점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 유명한 야훼의 종 노래의 첫째 노래에서 취해진 것이다. 분명 메시아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던 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멸시를 당한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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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의로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3-17) 여기서 ‘모든 의로움’이라는 말은, ‘인간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의지와 계획’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마태 18,14),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려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단순히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일 자체가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서, 우리는 “사랑은 내려가 주는 것”, 또 “사랑은 같아지는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의로움’이라는 말을,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사랑은 ‘낮춤’과 ‘섬김’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4-18)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 죄인의 처지가 되셨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십자가 수난과 ‘같은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 수난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세례’로 표현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또 높은 자리를 청하는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도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의 시작이고,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일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18.21)
우리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이고,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라는 말은, “바른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하는 일입니다.”로 해석됩니다.
세례를 받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바른 양심으로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에 일어난 일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증언하신 일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입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로 내려오셨다는 말은, 성령의 모습이 비둘기 같았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내려오심’이 비둘기가 내려앉는 것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신 뒤에 처음으로 성령을 받으신 것은 아니고, 그 일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공적 계시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는 모든 사람을 위한 선포이고, 우리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을(요한 10,30) 확인해 주신 말씀이고,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 즉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요한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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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메시아로서 그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베푼 세례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주실 세례와 비교됩니다. 세례(洗禮)는 회개(悔改)를 의미합니다. 공관 복음서가 모두 이러한 의미의 세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태오 복음서도 특별히 의로움을 강조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이어 주는 주제는 의로움입니다.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는 희망에 찬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공정을 세울 것이라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는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하는 세례자 요한과,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가 강조하는 특징적인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는 군중에게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뛰어넘도록 요구하시고(5,20 참조), 요한이 가르치던 의로운 길을 걷도록 요청하시며(21,32 참조), 하늘나라 또한 의로움과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5,10 참조)
의로움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모든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길은 이렇게 공적 활동의 시작에서부터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여기에 화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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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민 미카엘 신부님]
<의로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이다.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셨음을 알리는 날이다.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세례가 아니라 당신의 강한 체험과 결단을 드러내신 사건이다.
그 강한 체험과 결단이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고 오로지 그 뜻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의로움’을 이루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이루고자 하시는 분이기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묵상해 보면 예수님 당신의 언행 그 자체가 우리에게 복음이 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는 것,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욕망은 인간의 고유한 생존 방식 중 하나이며 그 욕망을 실현하려고 함으로써 자기의 존재 가치를 느낀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인간에게 있어 욕망이란 바로 타인과 같이 되는 것이다. 타인과 같이 됨으로써 자기 존재 가치를 상승시키려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욕망의 기준은 항상 ‘타인’인 것이다. 좋은 아파트를 갖고 싶은 것은 남이 갖고 있으므로 내가 갖고 싶은 것이다.
한편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경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 경쟁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에 의한 경쟁을 한다. 그래서 그 치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쟁적이다.
한국의 대학 입시를 상상해 보라. 결국 인간 삶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다. 모든 환경과 여건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힘들고 괴롭다.
결국 인간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환경과 여건이 최첨단 시설로 바뀐다 해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은 그 본성상 욕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욕망대로 따라가는 것도 문제이다.
바로 여기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그 뜻을 추구했던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잘 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 하더라도 동시에 구원의 길로 가는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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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영한 루도비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세례는 모든 인간이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죄와 자신이 지은 죄를 사해주고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로 태어나게 해 주는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태어나시면서 원죄를 지니셨고 스스로 죄를 지으셨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누구나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부정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아마 청취자 여러분께서 많이 들으셨던 설명은 대개 이러할 것입니다.
요한이 준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세례가 아니라 회개의 표시이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세례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또는 죄많은 사람들과의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의 신앙심을 고취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성서적인 근거는 미약합니다.
성서적 설명은 예수님의 세례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예수님의 준비된 마음의 표현과 이 표현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메시아로 선포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탄 대축일과 주님 공현 대축일로 하느님의 직접 계시를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자를 뜻하는 성서의 언어가 히브리어로는 “마쉬아흐”이고 이 말이 그리스어 음역에 의해 “메시아스”로 됩니다. 그리고 순수한 그리스어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의 본디 의미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인데 이 말은 구약 성서에서 임금, 대사제에게 적용되던 말이었습니다. 그들의 임무가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금이나 대사제가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다운 구원자에 대한 기대는 미래의 인물에게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구약에서 약속된 참된 메시아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생애, 특히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들, 그리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 예수님이 분명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행적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인 이사야서 42,1-7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네 개의 소위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첫째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묘사하는 주님 종의 사명이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메시아의 사명과 일치합니다. 주님의 종은 예수님처럼 주님께 선택되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이입니다.
주님의 종은 세상에 공정을 세우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인물입니다. 나머지 주님 종의 노래들도 모두 주님의 종이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묘사해줍니다.
이 노래들에서 묘사되는 주님 종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선포하고 충실히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계시하시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실 메시아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공적으로 선포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시작되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 안에서 평화와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건설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로 이러한 당신의 사명을 드러내 보이시며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신앙인에게도 같은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선포하고 메시아로서 그분께서 지니신 사명을 설명해 주듯, 우리 신앙인들 역시 세례를 통하여 단지 죄의 사함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메시아의 사명에 동참할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초대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건설은 먼저 우리 신앙인들에게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삶,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회개의 삶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변화된 우리의 삶 안에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 때 하느님 나라는 차츰 차츰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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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이제 하느님을 믿고 삽니다>
"마귀를 끊어버립니까?"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세례 받을 때의 기억이 생생이 떠오르는 문답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단호히 고백하며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지요. 그런데 과연 지금 그렇게 결심한 대로 이기심을 끊어버리고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고 계십니까?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은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인간의 욕망과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제까지 나 중심적이던 내 삶과 신조는 세례를 받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예수님 사랑과 말씀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세례 받기 전과 똑같이 욕심이 앞서고 세상적인 일에 나의 중심이 더 가 있다면 다시 되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으로 다시 와야 하지요. 세례받는다는 것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어느 날 깡패 한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사람들이 깡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무엇을 믿고 삽니까?" 깡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먹을 믿고 삽니다." 이렇게 나를 믿고 살지 누구를 믿고 살겠냐고 힘자랑을 하며 깡패는 사오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을 달리 먹고 세례를 받게 되었지요. 그러자 친구들이 물어봅니다. "너 세례는 왜 받느냐? 이제 무엇을 믿고 살려고 그러냐?" 그 때 이 깡패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을 믿고 산다!"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나를 믿고 나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왔다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지금부터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삶을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의 삶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으면 변화돼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나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세례를 받고 즉시 변화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본인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서서히 변화됩니다.
제 얼굴을 한 번 보십시오. 보시기에 깨끗하지요? 어떤 때 저는 하루에 두 번씩 면도를 합니다. 유난히 수염이 많기 때문이지요. 하루라도 수염을 깎지 않으면 덥수룩해지는데 만약 한 주간 내내 면도를 안 한다면 얼굴에서 수염만 보일 것입니다. 1년 365일을 하루도 안 빠지고, 어떤 때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면도해야 지금의 얼굴이 유지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한 번 결심하고, 일주일에 주일 미사 한 번 참례하는 것으로 삶이 변화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매일 돌아보고 다짐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이 하찮은 수염도 매일 깎아야 하는데 하물며 세상의 수없이 많은 유혹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일에는 얼마나 큰 노력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예수님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하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닮듯이,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려 노력하면 역시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예수님과 하나가 되겠다는 세례 때 약속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서 마침내 예수님과 성모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된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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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신은근 바오로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오 3,13-17)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시며, 그 힘으로 광야에서의 극심한 유혹도, 그리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통의 순간도 견디어 내시고 인류 구원의 길을 가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렸던 이 ‘하늘의 말씀’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하나가 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선포되었습니다. 세례 이후에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설령 어떤 잘못과 죄를 저질렀음에도, 우리를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 (또는 딸)’ 이라고 선포하신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큰 문제는 나의 존재가 쓸모없다고 느낄 때입니다. 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낮은 자존감은 늘 우리를 슬픔에 젖어 있게 합니다. 이럴수록 세례 때 받은 이 엄청난 은총을 끊임없이 마음속에 되뇌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쓰레기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이든, 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고, 하느님의 그 사랑은 우리 삶 속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례가 필요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시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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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태오 3,13-17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까>
세례 받은 이로서
살아가면서
가끔씩이라도
스스로에게 물어야지
참으로 내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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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시간 세례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중교우입니다. 아무 아무에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하시니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 누구에게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러 어려움이 있어도 하루 끼니를 몽땅 거르고 지나는 분은 없습니다. 혹 그렇게 한다면 몸의 기운이 떨어져,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하여야 그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알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제대로 해야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셨지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의 틈에 끼여서 세례를 받으셨고 어둠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옵니다.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3,27)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4)
그리고 그 표징으로 우리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을 자주 불러 주어야 하고 새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쓰리고를 아십니까?
1. 불러주고(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있을께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2. 보아주고,
불렀으면 그 사람을 봐줘야 합니다. 얼굴을 보면,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3. 잡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쓰리고” 하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적인 것에만 마음을 씁니다. 이러한 삶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 위로 올라오셨습니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이 말씀은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 듣게 된, 그리고 듣게 되는 음성입니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를 들어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의 모범을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써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사는 법을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세례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은총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고백했습니다.
“마귀를 끊어버립니까?”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정초를 맞이하면 ‘점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사주팔자를 보러 소위 ‘용하다는 집’을 찾는답니다.
자녀를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녀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런 일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혼사를 위해 길일을 택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가정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면 마음이 흔들려서 주님을 등지는 일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이는 점집에 가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 묵주기도를 하고 있답니다. 이런 양다리 걸치기는 결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요,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기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티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티도 3,4-5) 구원은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게 될 때 내 삶이 주님의 삶으로 바뀌고, 은총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새로 태어나는 삶의 시작이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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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연구소에서 실험 참가자들에게 다섯 종류의 초콜릿을 주고 얼마나 맛있는지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한 집단에는 “여기 다음 초콜릿이에요.”라고 말하며 초콜릿을 주었고, 실험 참가자들은 어떤 초콜릿이 마지막 초콜릿인지 모른 대 초콜릿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집단에는 먼저의 집단과 똑같이 말하면서 초콜릿을 주다가, 맨 마지막 초콜릿을 주면서 “여기 마지막 초콜릿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먹고 있는 초콜릿이 마지막 초콜릿인 것을 알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초콜릿이 가장 맛있었는지를 평가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네 번째 초콜릿까지는 두 집단이 비슷하게 맛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다섯 번째 초콜릿에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임을 알고 다섯 번째 초콜릿을 먹은 사람이 훨씬 더 맛있게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초콜릿을 알고 먹은 사람들은 이 실험을 더 재미있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이 주는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이다’라고 생각되면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재미있게 누려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지막은 우리 삶을 더 의식하게 만들고, 깨어있게 만듭니다. 그리고 특별한 날로 만들어줍니다. 오늘을 삶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삶이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닌, 마지막으로 보내는 지금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특별한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모범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대충 사는 삶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편함과 안식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구원을 위해 고통과 시련도 피하지 않는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요한이 주님이신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반대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당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예수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다면 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우리 모두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한 모범을 당신이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세례를 받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세례를 피해야 할까요? 단 한 명도 제외하지 않으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며, 우리는 지금을 어떻게 사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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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물귀신 작전>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를 주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시는 주님을 세례자 요한이 알아보고 그럴 수는 없다고, 자기가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세례를 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당연하고 저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본당에서 새 영세자에게 세례를 주고 있는데 느닷없이 주님께서 나타나 그 줄에 같이 서 계신다면 저는 기절초풍할 것이고 왜 이러시나 하고 그 뜻을 몰라 당황할 것입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받으시는 이유랄까 뜻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심오한 뜻이 있겠으나 오늘 저에게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우리 같이 힘을 합치자는 말씀 같고, 그래서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뜻대로 사는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두가 그 대열에 참여해야 하는데 세례자 요한도 우리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라고 하시며 당신 구원사업의 파트너로 초대하시는데, 이는 대단한 신분 격상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초대하시는데 이 또한 우리를 세례자 요한처럼 여기시는 대단한 신분 격상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능력으로만 구원하신다면 말씀 한마디로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느님은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셨고, 백인대장의 종을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실 정도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셨고,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기에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굳이 이 세상에 들어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그리고 굳이 요르단강 물에도 들어가시어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으시는 겁니다.
이는 마치 물귀신 작전 같기도 합니다.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인데 그러나 나쁜 뜻의 물귀신 작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룩한 죽음을 같이 죽자는 영적인 물귀신 작전입니다.
사실 세례의 의미가 이것 아닙니까?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으려고 들지 않으니 당신이 먼저 죽으시며 같이 죽자고 하시는데 오늘 주님의 세례는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이 거룩한 물귀신 작전에 같이 참여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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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이다>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시편 29,11ㄴ)
오늘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곡도 가사도 정말 흥겹고 은혜롭습니다. 사실 성탄시기 축일미사시 ‘손상오’곡 화답송 후렴들은 언제 들어도 좋아, 제가 자주 산책중 노래로 바칩니다.
1.“땅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도다.”(성탄 낮미사)
2.“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성가정 축일)
3.“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천주의 모친 대축일)
4.“하느님 만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주님 공현 대축일)
어제 2023년1월8일 주일에 우리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냈고, 오늘 1월9일에 주님 세례 축일은 지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6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를, 그리고 어제 주일인 1월8일에 주님 세례 축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특히 교황님께서는 어제 주님 세례 축일에는 유서깊은 아름다운 시스티나 경당에서 교황청 직원들의 아기들 13명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1년 주님 세례 축일부터 시행되온 참 아름다운 관습입니다. 1787년 독일의 세계적 시성詩聖 괴테가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남긴 말입니다.
“시스티나 경당을 보지 않고서, 한 인간이 어느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직관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스티나 경당에 관해 공부하고자 자료를 출력했는데 무려 31쪽의 방대한 분량이니 참 대단히 놀랍습니다. 오늘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림과 더불어 읽어보려 합니다. 이날 세례받은 부모들을 향한 프란치스코 강론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그들의 세례 날짜를 가르쳐라. 세례와 더불어 크리스찬 삶으로 재탄생했으니, 이날은 생일과 같다. 이들이 좋은 크리츠찬이 되도록 배우게 하라. 오늘은 여러분의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게 될 아름다운 크리스찬 삶의 여정이 시작되는 참 좋은 축일이다. 이들을 세례받도록 한 여러분의 결정에 감사한다.”
흡사 주님 세례 축일이 우리 하나하나의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얼마나 일생일대의 획기적 놀라운 은총의 사건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마 우리의 세례시 듣지 못했을지 몰라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들려온 말씀도 분명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마태 3,7)
참으로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은 과연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삶이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이듯이 우리의 세례 역시 은총의 선물로 평생 이뤄가야할 의로움의 과제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겸손히 세례를 받으신 주 예수님입니다. 요르단강에서 죄인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모습이 흡사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강생의 신비의 연장인 듯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친히 요한 세례자에게 겸손히 세례를 받으시는 의로운 모습이 감동스럽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오시다니요?”
예수님의 모습에 당황하는 요한에 대한 주님의 겸손한 반응 자체가 말그대로 의로움의 표현입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에게 매사 최종의 판단 잣대는 하느님의 의로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의 하느님의 의로움에 맞갖는 처신에 즉시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 오는 것을 예수님은 보셨고 이어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7)
아마 이보다 예수님의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평생 신원 확립에 이보다 결정적인 말씀 체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하느님과 사람이 완전히 하나로 통교됨을 상징하는 놀라운 구원 사건이자,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복된 운명을 예감케 하는 장면입니다.
특히 어제 주님 세례 축일날 삼종기도 후 교황님의 강론 말씀에 감동했습니다. 계속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죽은 아이들과 병사들의 어머니들을 결코 잊지 말고 기도해달라는 당부였습니다. 예수 아기를 키운 마리아 성모님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자녀들의 죽음으로 고통받는 또 하나의 성모님들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어머니들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못나고 악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어머니들을 생각하면 이들을 보는 눈도 달라질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어머니들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녀들이었을 것이고, 바로 이 측은히 여기는 어머니의 마음은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참으로 교황님의 강론 내용이 시의적절했습니다. 중심 주제는 하느님의 의로움이었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자비로 의로움을 요약했으며, 우리가 주님의 자비로움을 본받아 자비로운 사람이 될 때 우리의 의로움도 완성될 것이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삶의 여정은 날로 주님을 닮아 자비로워지는 의로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삼 이런 의로움의 여정을 통해서 우리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례받았다 하여 자비로운 자녀들이 아니라 평생 자비의 여정의 과제에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의로운 자녀가, 자비로운 자녀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산상설교 참행복 선언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바로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통해 의로운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요약처럼 생각되는 주님의 의로운 종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가 평생 배워 닮아가야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말씀으로 읽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지치지도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내가 너를 빚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자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얼마나 자비롭고 섬세하며 온유하고 겸손한, 이웃을 자유롭게 하는 주님의 종의 모습인지요! 이래야 비로소 사랑의 관상가, 사랑의 신비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님은 이렇게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은 주님의 종을 롤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게 평생 닮아가야 할 롤모델인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세례 축일이자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축일로 여겨도 무방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감으로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의로움을 완성해 갈 것입니다. 아침성무일도시 아름다운 즈카르야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그리스도 세례를 받으심으로 온 세상이 성화되었니, 그분은 우리 죄를 사해 주시어, 물과 성령으로 우리 모두 깨끗하여 졌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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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마태 3,13)
<주님 세례의 참의미!>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 세례 사건에 관한 말씀(3,13-17)'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며칠 전에도 함께 나눈 것처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무슨 죄가 있으셔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앞서 선포된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확증해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세례를 위해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묵상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3,14)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3,15)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난 사건'이고,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에서의 첫 전도를 시작으로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활, 곧 세상에 공정을 세우고, 당신 백성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신적 활동(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본기도)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한번 각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인 '나의 세례와 나의 서약과 나의 서품을 기억해 봅시다!' '그때의 초심(첫마음)을 떠올려 보고, 세례와 서약과 서품의 은총인 다시 태어남의 모습으로 돌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주님 세례의 참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로 짧은 성탄 시기가 끝나고, 내일부터는 '예수님의 땀을 묵상하는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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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Ee9-y-hm1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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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마태 3, 16)
세례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으로
씻어주고
씻어내는
실천입니다.
상대의 허물을
씻어 준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비우지 않고서는
채울 수 없듯이
세례의 방향은
하느님께로 가는
비움의 길입니다.
관계로 태어나고
관계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기에
더더욱 관계의
세례가
중요합니다.
신앙의
역사 안에
세례성사가
있습니다.
모든 신앙은
세례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
자리에는
세례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세례가
있습니다.
씻어야 할 것이
있기에
사람입니다.
사람다운 세상은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씻어주는
세례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것이
세례임을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만나게 됩니다.
세례는 소중함을
되찾는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올려다 놓는
세례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
받으십니다.
사람의 길은
세례의 길이며
세례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참된 사랑으로
만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세례성사의
은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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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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