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이러했다.
누군가가 말을 걸기 전에는 먼저 말 걸지 않았다.
누군가가 인사하기 전에는 먼저 인사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미소를 보이기 전에는 먼저 미소를 짓지 않았다.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하기 전에는 먼저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다.
이처럼 나는 누군가에게 호의와 호감, 관심, 사랑을 받은 후에야 표현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항상 누군가에겐 먼저 말을 걸고 싶었고, 누군가에겐 인사를 건네고 싶었고, 누군가에겐 미소를 보여주고 싶었고, 누군가에겐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왜 먼저 표현하지 않았는가? 고작 인사하는 것이 뭐 어때서? 특정 경우에서나 그런 것도 아니고 거의 모든 경우에서 그랬기 때문에, 나에게는 행동양식에 관련된 패턴이나 규칙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패턴이나 규칙이 생겨난 이유는 현재 추측하길, 몇 가지의 우연을 가지고 잘못 인식한 것이 시초였다. 그로 인해 잘못된 방향이 잡힌 내 느낌과 생각 그리고 그 감정과 생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이런 이유인 까닭에 나의 패턴을 방어기제라고 명명해도 되겠다.)
이러한 패턴이 아주 조그맣게 생겨난 이래로, 내가 사람에게 하는 표현은 이 패턴대로 행해왔고 그 패턴을 사용하며 드는 심리적 편안함이 있었기에 이 패턴은 점점 자주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버스를 탄다-기사님께 인사를 하지 않았다-인사를 거부당하지 않았다-심리적으로 편하다-앞으로도 인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에게 심리적 편안함을 주는 패턴은 어느 때마다 영역을 넓혀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버스를 탄다-기사님께 인사를 한다-기사님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심리적으로 불편하다-앞으로는 인사하지 않는다
표현을 하지 않아 심리적 편안함을 얻거나, 표현을 하여 심리적 불편함을 느낀 일이 일어났을 때마다 이 패턴의 권력은 쎄졌다. '아 역시 편하다.' 혹은 ‘아 역시 표현하지 말았어야 해.’ 하면서 패턴의 정합성을 부여했다. 그렇게 해서 정합성을 갖은 패턴은 내 행동양식을 지배했다. 그 패턴이 내놓은 규정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그 패턴은 내가 할 수 있는 표현범위를 좁혀 갔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표현은 너무나도 적어졌고 사람에게 무관심한 것 마냥 최소한의 표현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패턴이 있음을 알게 된 계기가 있다. 패턴의 존재를 알기 전에는, 이 패턴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행동양식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이게 원래 나야.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싶은데 어떡해.’ 라며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 패턴이 있었는 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 계기는 불과 일 년 전쯤, 누군가에게 “시우야, 너는 사람을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라는 말을 들었다. 이것이 계기이다. ‘내가 사람을 안 좋아한다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의문을 갖었고 그와 대화를 이어간 끝에 나에게 패턴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 한 마디를 듣고 패턴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이 패턴의 무엇이 모순점이 되어 불어나기 시작했는지,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는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패턴 안에서는 모순이 없다. 내가 어떠한 표현을 하지 않으므로써 그 표현을 거부 받을 가능성에 내던져지지 않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즉 패턴 안에서만 유효할 수 있는 인과율 안에서만 행동을 해왔고 그게 내가 살아가는 행동양식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패턴은 잘못되었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패턴의 인과율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표현하지 않으니 편함 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선 친근한 사람들에게 표현을 해보았다.
“오늘 재밌었어~”
그 사람이 말했다. “맞아! 또 놀자!”
타인과 표현을 주고받고 하는 대화로 봐서는 내가 먼저하든 상대가 먼저하든, 별다를 내용이랄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먼저 표현하는 데에 성공했고 표현하고서도 편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는 난이도가 올라갔다.
버스를 타려는 데 기사님께서 화를 내셨다.
“빨리 좀 타세요.”
나는 당황스러워서 인사를 못 하고 일단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하차할 때 기사님께 인사를 할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다. 이전에 표현하고 편함을 얻었던 자잘한 경험들을 떠올려보아 용기를 얻고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이 고개를 푹 숙였다가 올리며 인사를 받아주셨다. 뿌듯하면서도 이전 패턴의 지반과는 다른 새로운 지반이 떠올랐다.
상대의 기분이 이미 정해져 있고 그에 따라 나의 표현을 받아주느냐 안 받아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표현함으로써 상대의 기분이 결정나고 그에 따라 나에게 다시 표현을 해준다는 것이다.
이전 패턴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는 상대에 기분에 맞춰/상대가 생각하는 나에 대한 호감에 맞춰서, 내가 상대에 맞춰서 잘 행동했다면 편하고 행동하지 못했다면 불편했던 것 같다.
이제 새로운 지반의 관점에서 이전 패턴의 지반의 모순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현재 새로운 지반으로 패턴을 재구성하고 있다. 패턴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도 어떠한 모순점이 생길 것이고 그로 인해 또 다시 어떠한 현상으로 나타나겠지만, 그럼에도 그 현상을 문제의식하고 또 다시 재구성해 나갈 것이다.
첫댓글 흔히 동양철학은 관계성에 집중하는 특성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서양철학이 주체와 그 실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비교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이든 서양철학이든 그 핵심에는 결국은 그것이 인식의 주체이건, 실천의 주체이건, 주체인 본인에 대한 질문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특히, 불교철학에서는 타자와의 관계성보다는 그러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개인의 인식과 실천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말한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나는 왜 타인의 반응을 염려하고 있을까"입니다. 그것이 심리적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것은 다만 내가 생각하는 패턴의 인과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패턴의 인과율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경험칙이고, 그것이 온전히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자의 반응을 이러저러하게 분석해서, 어떤 패턴을 만드는 것은 타자가 아닌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되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타자와의 관계를 염려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