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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시험 대체과제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이고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목차- 서론 칸트의 인식론과의 관계-감성계와 예지계를 통한 정언명령을 중심으로 선험적 형식과 범주 칸트 철학의 비판점 공자의 정명론과 관련하여 칸트철학에 완벽한 비판을 할 수 없는 이유 생물학과 관련하여 생물학과 역사분야와 관련하여-이기적 유전자, 사피엔스와 관련 지어서 칸트, 공자vs 도킨스, 하라리 종합점(서양, 동양 철학과 과학, 역사와 연결되는 요소들) 결론 |
*이 글은 칸트, 공자의 사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종 과학과 역사적인 사례가 결부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 서론
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해 내가 생각하고 느낀 점을 말하려고 한다. 이 영화는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이고 이러한 인간으로 불리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묻는 내용의 영화다. 이 영화는 현대 사회문제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우리의 이름은 무엇이고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시청자들로 하여금 유발시킨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하도록 하겠다.
*2) 칸트의 인식론과의 관계-감성계와 예지계를 통한 정언명령을 중심으로
이 영화를 보고 서양 철학적인 측면에서 칸트의 인식론이 생각이 난다. 칸트는 인간은 두 가지 세계에 속한다고 했는데 하나는 감성계이고 하나는 예지계다. 감성계는 우리가 감각과 경험에 영향을 받는데 있어서 인간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예지계에서는 인간은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도덕법칙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이 두 세계는 인간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요소이고 여기서 칸트가 말하길 인간은 보편적인 이성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 보편적인 이성을 정언명령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언명령은 각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과는 별개로, 이성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원칙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첫째는 보편화 가능성의 원칙으로 이는 내가 하는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인간 존엄성의 원칙으로 너 자신과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정언명령을 통해 우리는 주관적인 것을 웬만해서 개입하지 않고 우리들의 이성은 보편적인 법칙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선험적 형식과 범주
또한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의 요소가 선험적 형식과 범주로 구성된다고 보았는데,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것이 선험적 형식이 된다고 주장하고, 범주는 우리의 이성이 개념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사용하는 기본적인 개념들을 범주라고 불린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칸트는 선험적 형식과 범주를 통해 경험을 구조화하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이성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함을 알 수 있다. 칸트는 물자체를 알 수 없는 대신 현상을 통해 대상을 알 수 있다고 파악을 한 것이고 이를 통해 보편적인 이성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현상이 있기에 선험적 형식과 범주로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보편적인 이성이 됨을 알 수 있다.
*4) 칸트 철학의 비판점
그러나 여기서 보편적인 이성은 비판할 여지가 존재하고, 현상에 대해서도 비판할 여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보편적인 이성을 비판하는 이유는 아무리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이성으로 만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우리 인류는 시대별로 나고 자란 세대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분명 시대적 경험도 다를 것이고, 우리 인류가 살고 있는 기후와 위치는 각각 다를 것이기에 아무리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경험을 구조화 하더라도 다른 시대적 상황과 다른 공간적 환경이 작용하므로 보편적인 이성을 사용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현상도 이러한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라고 하기 힘든 것이다.
*5) 공자의 정명론과 관련하여
동양에서 공자는 정명론을 주장하는데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주장한다. 이는 군자는 군자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부부는 부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비록 칸트의 의견에 어느정도 비판적으로 보는 면이 있는 나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이 공자의 주장은 왕과 신하가 있었던 시대적 공간적 상황에서의 한계가 있지만, 즉 이는 인간 각각이 맡는 역할들을 강조한 것인 것, 이를 통해 우리는 시대, 공간적인 제약이 있다는 한에서 완벽한 이성의 보편성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공자의 주장을 통해서 우리는 칸트의 순수이성의 보편성과 관련 지어 진정성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칸트는 우리들의 감각경험을 통해 받아들인 자료를 순수이성을 통해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조직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순수이성과 공자의 정명론의 공통점을 보았을 때 이러한 순수이성을 통해 받아들인 자료를 가지고 우리는 우리들의 역할을 분배하면서 체계적으로 사는 것이 어쩌면 그 둘의 핵심일 것이다.
*6) 칸트철학에 완벽한 비판을 할 수 없는 이유
따라서 나는 칸트의 의견에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시대와 공간이 끊임없이 변화해 이로 인한 보편적인 이성과 객관이 패러다임을 통해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탄생한 이후로부터 인류사회에는 대부분 전세계적으로 자기 자신 만의 이름과 모든 사람이 사회적 신분을 갖은 점에서는 아직까지 시대적, 공간적인 면이 계속 지속적으로 보편적으로 유지되므로 인류의 고유한 인식이 일부 남아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의견을 완벽히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생물학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생물학과 관련하여 이전 사상가들의 주장과 비교하면서 나의 생각을 서술할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은 유전정보가 들어있는 DNA라고 하는 생명물질이 있다. 이 DNA속에 있는 각각의 유전정보들을 우리는 유전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 개개인의 생각과 사고회로가 어떻게 해서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만약에 이 사례를 인간으로 한정 지어본다고 가정할 때, 그것은 DNA의 염기서열의 순서가 각각 인간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1 참고).
이것 때문에 인간들은 각각 형질이 다르게 나타나고 생각하는 것과 사고회로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소통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별로 생각과 사고회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서로 소통이 가능한 것은 인간(Homo sapiens)만이 가진 각각의 인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염색체 수와 그 특정 종에 공유하는 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일반적으로 염색체 수가 46개이다. 그리고 99.9%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그림2 참고).
따라서 우리 인간은 개별적인 독특한 형질을 지니면서 공통된 특성 형질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소통이 서로 가능했던 것이고, 우리와 염색체 수가 다른 코알라, 거북이 등과 같은 그리고 유전 형질이 상당히 다른 식물들과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아주 먼 형질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DNA의 유전 단위인 유전자에서 우리 인류의 공통조상이 갖는 고유한 유전자가 있을 것인데 이 유전자가 널리 현대의 인간까지 퍼져서 어쩌면 진화심리학적으로 많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심리인 공통된 유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칸트가 주장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에 대한 존재 유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8) 생물학과 역사분야와 관련하여-이기적 유전자, 사피엔스와 관련 지어서
우선 칸트와 공자와 같은 철학자들의 주장과 비교하기 전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관련하여 이것이 진화심리학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하려 한다. 그리고 그 외 저서와 관련해서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서술해 보려 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 된 로봇운반자다. 유전자는 자신을 복제하고 생존하기 위해 최적의 전략을 선택하며 이를 통해 생명체의 다양한 행동들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유발 하리리의 저서인 “사피엔스”에서 인류는 인지혁명동안 허구를 창조하고 믿는 능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인지, 농업, 인류의 통합(종교), 과학 혁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인류의 능력으로 인해 협력과 조직화가 가능하였다고 주장한다.
*9) 칸트, 공자vs 도킨스, 하라리
그렇다면 이제 칸트와 공자와 같은 철학자의 주장과 도킨스와 하라리의 저서를 비교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칸트와 공자는 보편적인 도덕원칙과 사회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도킨스와 하라리는 유전자와 허구를 통해 인류의 행동과 사회구조를 설명한다는 차이가 있다. 둘째, 칸트와 공자는 도덕적 원칙과 사회적 역할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한다. 반면 도킨스는 유전자의 생존전략을, 하라리는 허구를 통한 협력을 강조한다. 셋째, 칸트는 이성을 통해 도덕적 원칙을 세우는 반면, 하라리는 허구를 믿는 능력이 인류의 협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이 사례를 통해 철학자들과 현대 사회, 과학자들의 의견은 접근방법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로 갈수록 실존주의가 들어서면서 이성의 한계는 강조되지만, 6장에서 언급한 칸트의 철학을 완전히 비판할 수 없는 이유를 무시해서도 안된다.
*10) 종합점(서양, 동양 철학과 과학, 역사와 연결되는 요소들)
위의 글들을 종합해보면 진정한 인간은 보편적인 도덕원칙(칸트 철학 언급)과 사회적인 역할(공자의 정명사상)이 있지만, 인류만에 공통된 유전자(참고로 인류는 99.9%의 유전자를 공유함.)의 성질을 통해 대부분의 사회적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호모 사피엔스 안에 들어있는 독특한 허구를 만들 수 있는 유전자가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그 허구가 다른 동물들이 상상할 수 없는 보편적인 도덕법칙 혹은 사회적 역할을 만들어 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뒷담화(하라리는 당시 언어의 발달로 허구를 만들어내고 뒷담화가 가능 해졌다고 주장한다.)를 통해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고 많은 협력을 촉진하는 중요한 도구라고 했다. 그러나 이 뒷담화만이 인간의 사회적 결속과 협력을 나타내는 요소가 되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칸트의 주장을 대입하면 인간은 보편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어 사회적 결속과 협력을 나타낸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을까? 하라리의 말 대로 인류는 뒷담화를 통해 사회적 결속과 협력을 나타냈을 것이다. 하지만 칸트 철학을 대입시키면 뒷담화와 이성 사이의 거리를 두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에 이성을 가진 인간과 가지지 않는 인간이 태초의 인간시대에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이성이 인류에 있어서 유전적으로 공통된 특성을 나타내는 이유는 어쩌면 이성이 없는 인간 집단보다 이성이 있는 인간 집단이 결속력이 더 강하고 협력적인 요소가 더 강해져서 이성 없이 뒷담화 하는 인간집단을 타파한 것이고 이성 없는 집단 내에 분열이 일어나 사라져 이로서 인간은 보편적인 이성을 가진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도킨스의 주장을 대입시켰을 때 결국 보편적인 이성이 생긴 이유는 결국 자신을 복제하고 최적의 전략으로 살아남기 위한 유전자의 성질 때문에 이성이 없는 뒷담화 하는 집단이 망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생존 전략을 강화하고자 우리는 보편적인 이성적 능력이 발달되었고 이로 인해 보편적인 도덕법칙이 발달되어 이성적 능력이 없는 집단보다 더 생존확률을 높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인류는 보편적인 이성 유전자를 통해 도덕법칙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데이터가 유전적으로 지속적인 전달을 통해 보편적인 이성을 갖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근대로 갈수록 인간은 이성에 대해 한계를 느끼나 이와 반대로 그 당시 이성이라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인류가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게 만들고 이러한 이성이 보편화되어 농업이 일어나고 종교가 일어났으며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러한 것들로 인해 집단구조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역할이라는 것을 만들고 이 사회적 역할을 겪는 것이고 체계화되면서 보편적인 도덕원칙, 질서가 생기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인간이 보편적인 이성을 가짐으로써 생태계의 주도권을 가진 것이 아닐까?
*11) 결론
그럼에도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이고 이러한 인간으로 불리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왜냐하면 근현대로 갈수록 이성의 한계를 느껴왔고 진실된 자아 정체성 그리고 내가 이 삶을 사는 이유인 실존적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건 이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각각의 인간의 독특한 0.01%의 유전형질로 인한 자신만의 세계가 있기에, 그리고 태어난 환경과 시대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내면의 있는 99.9%의 보편적인 성질이 언젠가로 하여금 보편적인 이성으로 이해됐기 때문에 이 시대를 흘러가며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이성과 도덕법칙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사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현대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유전형질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이 가진 특별한 형질인 유전적 요소인 본인 만의 자아를(물론 인간은 보편적인 이성도 함유하므로 보편적인 성질도 있기에 소통이 가능하지만) 즉 보편적이지 않은 순수한 자아를 통해 실존적인 문제를 직면하고 자아실현을 함으로서 그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진정한 인간으로 불리기 위한 행위이지 않을까?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문제에 있어 돈으로 인해 인격이 상실되는 것을 인지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순수한 자아(0.01%의 유전형질)에 따라서 개개인이 느끼고 생각하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이성(99.9%의 유전형질)이 발현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회문제를 인지하는 것이 아닌가? 비록 보편적 이성이란 것이 시간과 공간적 배경 등이 다른 한계가 있어 있을 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인간이 시공간적 배경 상관없이 특정한 어떤 사회 문제에 처할 때 반응하는 위기의식 자체는 진화심리학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보편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칸트가 주장한 순수이성은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보편적으로 거쳐 이어져 내려온 메커니즘이 우리에게 내려져 오는데 칸트는 그걸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걸 순수이성이라고 하고 보편적 이성이라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성의 시초는 칸트의 순수이성이 시초인 것인가 아니면 조상들이 대대로 보편적으로 거쳐 내려왔으므로 경험적인 것이 유전되어 내려온 경험론에 불과한 것인가 혹은 순수이성은 우리 뇌에 프로그래밍 된 메커니즘에 불과한가? 혹은 우리들의 0.01%의 순수하고 독특한 형질이 바로 순수이성인 것인가?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경험론과 칸트의 인식론과 합리론은 아직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위의 영화를 통해 나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이고 진정한 나에 대해서 성찰해보자면 이러한 다학제적인 분야를 통한 고찰도 좋지만 결국 나를 결정지을 수 없는 미지의 궁금증이 우리에 있어서 알 수는 없지만 진정한 깨달음이 아닐까?
나는 이러한 물음들이 진정한 인간에 대해서 알 수 있을뿐더러 진정한 자기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 하에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출처>
『순수이성비판1, 2』, 지은이: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출판사: 아카넷
『실천이성비판』, 지은이: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출판사: 아카넷
『논어』, 지은이: 공자, 오세진 옮김, 출판사: 홍익
『사피엔스』, 지은이: 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출판사: 김영사
『이기적 유전자』, 지은이: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 이상임 옮김, 출판사: 을유문화사
『캠벨 생명과학』, 지은이: TAYLOR, SIMON, DICKEY, HOGAN, 옮긴이: 김명원 외, 출판사: 라이프 사이언스
첫댓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인간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끌어내었군요. 자신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느냐는 그 '무엇'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고 실천하느냐의 선행 문제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서술한대로 칸트와 공자 같은 동서철학자는 물론, 오늘날의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진화심리학 또는 사회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다른 존재와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99.9%라는 유전자 공유는 종 특성을 말하는 것인데, 그보다는 생명체 또는 존재 일반이 공유하고 있는 존재 원리가 있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존재가 공유하는 99.9%는 존재의 원리가 될 것이고, 그 가운데 생명체가 공유하는 99.9%는 생명의 원리가 될 것이며, 그 가운데 인간이 공유하는 99.9%는 인간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이 가운데 철학에서 관심을 특히 가지는 부분은 인간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동양과 서양에서는 각기 다른 해석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되묻고 싶은 것은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파악한 존재의 원리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