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그림은 최근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만화이다. 처음엔 그저 메뉴 통일에 대해 막내 사원의 엉뚱한 대처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으나, 인간의 정체성을 음식 메뉴에 빗대어 보니, 개인의 취향에 맞는 음식을 정하는 것마저도 편리함을 위해서 단일화 시키는 모습에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회사 중식메뉴를 고르는데 혼자 뜬금없이 탕수육, 팔보채를 시켜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건 절대 아니다. 허나 선택의 자유와 다양성을 보장하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집단의 편리함을 위해 개인이 볶음밥, 짜장면, 짬뽕 등 다양한 식사메뉴 중 무엇을 먹을지 고르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명분(名分)은 영화 속 대사인 “명분이 없다 명분이!” 같이 무언가 일을 할 때의 정당성을 생각하지만, 우리의 정체성과도 큰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이처럼 우리는 각각의 역할에 마땅히 지켜야 할 보편적인 특성을 ‘~답다’ 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명분은 역할, 사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이름을 가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한다면 어떨까. 과연 ‘나답다’ 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정말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하더라도 내가 속한 사회나 집단에 의해 ‘나답다는 것’을 외면한 채 그저 색도 모양도 같은 집단의 부품 중 하나로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유튜브에 출연해 유명해진 27억 자산가 환경미화원을 그저 환경미화원이 재산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해고하라는 악성민원이 폭주했다는 기사를 최근에 보았다. 기사를 통해 적성에 의해 선택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직업이 자본에 의해 평가되며,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대사회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처럼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직업이 사회와 타인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는데, 지금 우리가 정한 역할이나 선택이 ‘나답다는 것’에서 나온 정체성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현대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라고 표방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만들어진 기준에 순응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사회나 타인이 요구하는 특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남들도 하니까’와 같이 유행이라는 이유나 허영심만으로 행동의 당위성인 명분을 잃은 채 행동하는 경우를 경험하고, 목격한다. 허나 주체를 잃은 행위의 결과에는 무슨 의미가 남는가? 실제로도 유행이나 허영심 때문에 산 물건들을 괜히 샀다며, 좀 더 가치있는 곳에 돈을 쓰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이처럼 정체성을 잃어버린 행위엔 허무만이 남는다. 오늘날 인간은 표면적으로는 자유로워보여도, 사회와 타인에 의해 정체성을 잃고 족쇄에 묶여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홀로 남은 인간의 정체성엔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사회와 타인 역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휩쓸려가는 물살에 몸을 맡기는 와중에도 ‘나는 누구인가?’, ‘왜 이것을 하는가?’ 같이 자신의 명분(名分)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다면, ‘희미해지는 색일지언정 자신만의 색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첫댓글 "짬뽕 넷이요!"라고 주문한 이는 본래 짬뽕을 시키려고 했던 그 한 사람, 막내 사원인 것이지요? 이와 관련해서는 본문에서 제기했던 것과 같이 몇 가지 연관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1.왜 상급자는 메뉴 통일을 요구했을까? 2.그것이 자율적 선택권을 제한하는 행위인가? 3.막내 사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정말 짜장면이 먹고 싶었던 것일까? 4.다른 것을 먹고 싶었는데도 짜장면으로 통일하자는 말에 수긍한 것은 문제적인 행동인가? 5.막내사원은 자신이 먹고 싶은 메뉴를 선택하였으므로 문제가 없는 것인가? 6.막내 사원이 자신이 선택한 메뉴로 통일하여 주문한 행위는 메뉴 통일 요구에 맞서는 정당한 행위인가? 등등이 될 듯합니다. "등등"이라고 표현한 것은 1-6과과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질문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대체로 2와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습니다. 수업시간에 종종 이야기 했듯이 오늘날에는 다양성 보장, 혼종성을 넘어선 잡종성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서는 상당한 수준으로 인권의식을 포함한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의 질문도 숙고해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