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곱게 지켜
곱게 바치는 땅의 순결.
그 설레이는 가슴
보드라운 떨림으로
쓰러지며 껴안을,
내 몸 처음 열어
골고루 적셔 채워줄 당신.
혁명의 아침같이,
산굽이 돌아오며
아침 여는 저기 저 물굽이같이
부드러운 힘으로 굽이치며
잠든 세상 깨우는
먼동 트는 새벽빛
그 서늘한 물빛 고운 물살로
유유히.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11-다시 설레이는 봄날에’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세례사건에 와서야 비로소 예수의 등장을 알립니다. 그분이 먼동 트는 새벽빛, 그 서늘한 물빛 고운 물살로 오셨다는 것이지요. 요르단강에 제 얼굴을 비추어보고, 하늘빛에 세례받는 사건이 이날 일어났습니다. 그는 몸으로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마음으로는 하늘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는 몸을 굽혔지만, 몸을 일으키자마자 하늘이 열리며 가슴 속에 치미는 하느님의 사랑 속에 이내 잠겨 들어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
마르코복음에서는 마태오나 루카복음처럼 예수의 전생(前生)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요르단강가에 예수가 서있기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밥을 벌었는지,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계신 어머니를 모시며 그가 겪었을 아픔에 대해서도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식민지의 백성으로서, 무력한 평민(유다교의 평신도)으로서, 사대의 슬픔을 안고 사는 젊은이로서 살아온 지난날을 캐묻지 않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생을 모조리 씻겨내고 새로운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세례를 받기로 작정한 것은 먼저 요한의 편에 서기 위해서지요. 요한처럼 백성을 억압하며 부를 누리던 사제계급과 단절을 선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지요. 가난한 백성을 괴롭혔던 정결례를 예수는 나중에 단죄하였지만, 우리가 죄로부터 돌아서야 한다는 예언서의 정신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세례로부터 복음서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예수가 전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 전통을 ‘하느님의 자비에 기대어’ 새롭게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유다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물로 정결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후에 몸을 깨끗하게 씻었는데, 자크 뒤켄의 <예수>에서는 이때 빗물이나 길어놓은 물이 아니라 맑게 흐르는 물에 씻어야 부정을 없애준다고 여겼답니다. 흐르는 물만이 살아있는 물이라 여겼던 탓이지요. 회당의 랍비들이나 바리사이들은 모든 신자들한테도 사제들의 의무사항이었던 정결례를 지키라고 요구했지요. 그래서 요한도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쿰란수도원으로 유명한 에세네파도 목욕을 예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절차를 거쳐 입회자를 받아들였는데, 적어도 2년 동안의 수련기를 마치면 새입회자들은 흐르는 물에 푹 담가서 침례를 받은 뒤에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수도원에 들어갔지요. 그들이 어지나 엄격하게 광야에서 살았는지, 로마인 플리니우스는 이 경건한 사람들을 ‘고독한 종족,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이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그들은 남들 앞에서 침을 뱉지 않았으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침을 뱉을 때에도 악과 부정(不淨)의 편이라고 믿던 왼편에다 침을 뱉었다고 합니다. 용변을 볼 때는 한 곳으로 가서 항상 같은 연장인 괭이로 구멍을 하나 파고 태양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몸을 옷으로 둘둘 감은 채 볼일을 보고 흙으로 덮었답니다. 안식일에는 아예 용변을 보는 게 금지되었으며, 아침바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침묵 속에서 하느님께 해가 뜨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요한 역시 이들처럼 에세네파가 세례를 행했지만, 방식은 달랐습니다. 쿰란공동체에서는 삶의 방식을 이미 바꾸었다고 증명된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지만, 요한은 생활방식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결과에 매달리기보다 동기에 주목했던 것이지요. 에세네파가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리던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세례자 요한은 평범한 대중들을 상대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지요. 엄격한 정결례는 자신의 노동으로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대다수 농민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에세네파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 구원받을만한 사람은 딱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볼 때,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이 모두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열려진 사랑, 만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을 먼저 헤아린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수 또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심판하고 가르치고 중재하는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고 엄포를 놓았으며, 세리들에게 “여러분에게 할당된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시오”하였으며, 군인들에게는 “아무도 괴롭히거나 등쳐먹지 말고 여러분의 봉급으로 만족하시오.”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다른 누구의 권위에 기대어 일할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보라,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라고 하였다지만,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가 사제나 예언자 등의 승인이나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그에게 말을 건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성령이 그분 위에 머무시는 것을 세례자 요한이 보았다고 기록했지만,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에서는 오로지 예수만이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예수만이 하느님에게서 ‘사랑고백’을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헨리나웬은 <그리스도인의 길>(참사람되어 역)에서 예수는 살아가는 내내 “너는 사랑받는 아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에게 나의 사랑이 머물고 있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전합니다. 세례사건 때 예수가 체험한 것은 하느님께서 조건없이 먼저 주시는 첫 번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계속 기억함으로써 예수는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 찬사와 배신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진리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가수 심수봉은 ‘사랑밖에 난 몰라’라고 노래했지만 예수 또한 그러했지요.
이를 두고 헨리나웬은 우리도 예수처럼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해 왔다. 나는 너의 이름을 영원으로부터 내 손바닥에 새겨 놓았다. 나는 지구의 심연 속에서 너를 빚었고 너의 어머니의 움속에 짜 넣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포옹한다.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며 너는 나에게 속한다”는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래야 부침(浮沈) 많은 세상에서 흔들림 없이 예수를 따라 살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이지요. 첫사랑이 영원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는 그 사랑 밖에는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제자였지만 요한에게 매이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지요. 그는 첫사랑에 힘입어 하느님 자비를 세상에 나누는 두번째 사랑에 몰두했다. 직접 빵을 나누고, 병자를 고쳐주고, 귀신들린 이들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죄의식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희망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게 예수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단순히 자기 백성들을 돕기 위해 세례자 요한처럼 기득권을 버리고 투신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안병무 교수의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밝히 말하고 있듯이, 예수 자신이 바로 ‘고통받는 민중’이었습니다. 보잘것 없은 나자렛 촌구석에서 자라나 목수로 살아온 예수는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아래서 성전세력의 비열한 착취 때문에 신음하던 백성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 ‘예수’ 역시 흔하디 흔한 이름중 하나였지요. 그는 지식인도 아니었고, 바리사이도 사두가이파도 아니었고, 그럴듯한 수행자인 에세네파에도 속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로 남루한 생애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예수는 자신의 고통(my pain)에 머물지 않고 만인의 고통(the pain)을 함께 짊어지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하늘을 열었던 사람입니다. 이제 고통받는 대중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운동’(當事者運動)을 시작한 것입니다. (한상봉/야곱의 우물 2010년 4월호에 게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