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 (덴마크 1885-1962)
Niels Henrik David Bohr
덴마크의 물리학자.
양자역학의 태동기에 활동했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수장 격이었던 인물이다.
2. 업적
수소의 선 스펙트럼을 설명하면서
원자의 구조에 대한 가설(보어 모델)을 내놓아 192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양자론을 도입했기 때문에 이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내놓는 데 영향을 주었다.
3. 생애
1911년에 트리니티 칼리지로 가서 조지프 존 톰슨에게서 지도를 받았으나
보어의 영어가 서툴렀고
톰슨의 무관심함으로 맨체스터 대학교의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게 가게 된다.
여기서 당시 최신 원자 모형이었던 러더퍼드 모형에 대하여 접하게 되면서
1913년에 자신의 원자 모형을 발표하게 된다.
큰 키, 큰 머리로 눈에 띄었다는 모양이다.
사진 중에는 배우 존 트라볼타를 연상시키는 사진도 있다.
운동도 즐기는 스포츠맨 타입이나 꽤 수줍어 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26세 때의 그를 본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동료는 "소년 같다"고 평하기도.
중년 때는 후학들에게 꽤나 우러러 보였던 모양.
제자인 오토 프리는 편지에 보어와 만났던 일화를 쓰면서
"신이 내 코트 단추를 만졌다"라고까지 했고,
파인만은 회의장에서 보어를 만났을 때를
"거물들에게도 보어는 위대한 신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지금도 코펜하겐에는 보어 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
덴마크에서 유명한 과학자다보니 집도 근사한데,
덴마크 맥주회사인 칼스버그가 기부해줬다.
거기에 수십 년간의 관리비까지 그냥 지급해주어서
그의 후손들은 편하게 잘 먹고 잘 산다고 한다.
그의 아들 오게 보어도 197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고
평생 보어 연구소에서 소장 자리를 맡았다.
오게의 아들도 물리학자다.
그가 원자의 구조 외에 중요한 일을 한 것이 있다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모든 국가에게 개방정책 및 공동 관리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원자력의 폐쇄적 이용에 따른 핵무기 무한 경쟁시대를 우려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정치인들에게 계속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그의 예견대로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는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직접 만나며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처칠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은 지금 정치를 하는 건가, 과학을 하는 건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여부는 정치적인 문제인데
보어가 과학적 입장만 고려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과학이 아니고 정치다.'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107번 원소 '보륨'의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